아편전쟁부터 트루먼독트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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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아편전쟁

*1차 세계대전

*독일배상금 처리문제

*경제대공황

*2차 세계대전

*마샬플랜, 트루먼 독트린

*미하일 고르바초프

본문내용

을 협의하기 위해 유럽의 다른 22개국에게 유럽재건계획 회의에 참가하도록 초청했다. 그러나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국가들은 이를 거절했다. 소련은 동유럽의 위성국가들과 식량 원조와 물물교환에 관한 특별무역협정을 체결하여 서방측에 대응했다. 이에 미국은 그들이 원래 생각했던대로 소련의 불참을 확실시 하게 되면서 서유럽만의 경제적 통합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오래전부터 '덩커어크(Dunkirk) 조약과 브뤼셀 협정(Brusel Pact)을 통해서 서유럽간의 연합을 추구해왔던 영국의 경우 미국이 주도하는 마샬 플랜에 대해 처음에는 협조적이지 않았지만 당시의 전후 유럽 경제 재건을 위해서 미국의 지원이 필수불가결하였기 때문에 미국정부가 마샬 플랜을 유럽지역에 제공하면서 종용한 국가간 협력 강화 요구에 따랐어야 했다.
2. 1948년 경제협력법 제정
1947년 6월 29일부터 7월 2일 사이에 개최되었던 영국, 프랑스, 소련간의 3국의 외무장관회의가 결렬되자, 서유럽 16개국은 7월 12일부터 파리에서 16개 국가의 회의를 열고, '유럽경제협력회의(Committee on European Economic Cooperation: CEEC)'를 설치하여 운영해 나갔다. 참가국들은 오스트리아, 벨기에, 덴마크, 프랑스, 그리스, 아일랜드, 아이슬란드, 이탈리아,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노르웨이, 포르투칼, 스웨덴, 스위스, 터키, 영국 등 16개 국이었다. 이후 유럽경제회의에는 서방점령지역 독일이 참가하다가 1949년 점령기간이 끝나게 되자, 연방공화국 정부(서독)가 독일을 대표해서 참가하였고, 유고슬라비아도 공산진영으로부터 추방당한 후인 1949년부터 참가하게 되었다. 하지만 파리회의는 유럽재건계획의 성격과 목적에 대한 의견 충돌을 겪게 되었다. 그것은 유럽국가들이 그 계획을 제안하는데 있어서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한다는 주장과 마샬 플랜에 대한 원조액수를 미의회가 승인해야 하며 또한 실질적인 원조가 되게 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확고한 의지가 있어야 한다는 견해 때문에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다. 한편 미국은 마샬플랜의 입법화에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 미의회는 1948년 4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하나의 포괄적인 계획을 실행에 옮길 수가 있었다. 미국의 경제협력법은 1948년 4월 3일 대통령의 서명을 거쳐 공식적인 법적 효력을 얻게 되었다. 이를 근거로 미국 정부는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서유럽 16개 국가들과는 물론이고 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한국과 쌍무 협정을 체결함으로써 마샬 플랜에 의한 원조를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 이 조약에 의해 4월 16일 마샬 플랜에 참가하는 유럽국가들은 미국의 대외원조기관인 경제협력처와 관계를 유지할 '유럽경제협력기구(Organization for European Cooperation: OEEC)'를 신설하였다. 이로써 마샬 플랜은 발표된지 10개월만에 경제협력법의 승인을 거쳐 유럽재건을 위한 원조의 길을 열게 되었고, 경제 협력처와 유럽경제협력기구를 통해 자원의 원활한 분배와 효율적인 이용에 기여를 하였다. 이로써 유럽의 재건과 공산주의의 팽창저지라는 본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러한 마샬 플랜에서 만들어진 '유럽경제위원회'를 발판으로 1949년 '유럽위원회', '북대서양조약기구'가 창설되어 대부분의 서유럽 국가들을 흡수했다. 그리고 1950년에 '슈만플랜'을 이끌어 서유럽이 하나의 공동체로 발돋움하게 만들었다. '유럽경제협력기구'는 처음으로 만들어진 유럽공동체기구였으며, 유럽통합의 모체인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European Coal and Steel Community)'에 영향을 주었다. 즉 유럽을 하나로 만들어 평화와 번영을 이루고자 하는 유럽의 이념이 실현되었다.
-트루먼독트린
그 요지는 공산주의 세력의 확대를 저지하기 위하여 자유와 독립의 유지에 노력하며, 소수자의 정부지배를 거부하는 의사를 가진 여러 나라에 대하여 군사적·경제적 원조를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이 원칙에 입각하여 당시 공산세력으로 인하여 직접적인 위협에 직면하고 있던 그리스와 터키의 반공(反共) 정부에 대하여 미국의 경제적·군사적 원조가 제공되었다. 이 원칙은 그후 미국 외교정책의 기조가 되었으며, 유럽부흥계획과 북대서양조약으로써 구체화
되어 갔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1985년 소비에트 연방의 공산당 서기장에 선출되었고, 이어 소비에트 연방의 국무총리와 국가 수반을 겸임하였다. 집권 이후 그는 사회주의 계획 경제(社會主義計劃經濟)의 문제점(비능률적인 행정으로 인한 물자부족 등)을 해결하기 위해서 시장경제를 받아들였고, 모스크바에 최초의 시장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는 언론 자유화를 주장하였다. 그래서 고르바초프의 집권 후, 텔레비전방송에는 자본주의 국가의 영화가 방영되기도 하였으며, 정치에 대한 비판 즉, 사회주의나 소련공산당에 대한 비판도 허용되었다. 또한 이전 지도자들은 그리스도교(러시아 정교회)사제들의 성직활동을 금하는등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고르바초프는 지지세력을 얻고자 하는 정치적 목적에서 교회의 종교활동을 허용했다. 1990년 3월 총리직에서 물러났으나 다시 소비에트 연방의 국가수반인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공산당의 권위와 국내경제가 현저하게 약화한 가운데 벌인 급격한 개혁은 사회적 혼란을 야기하였고, 이에 반발한 보수파틀이 1991년 8월 쿠데타를 일으켜 흐루쇼프처럼 고르바초프를 실각시키고 구체제로 환원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런 보수파의 쿠데타 기도는 옐친을 비롯한 급진 개혁파들과 민중의 저항으로 3일만에 실패하였고, 4일 뒤 그는 다시 권좌로 복귀할 수 있었다. 이후 소련 정부와 공산당의 지도력은 걷잡을 수 없이 땅에 떨어져 결국 12월 벨라베자 조약에 의해 소련은 해체되었다. 고르바초프는 소비에트 연방의 대통령직과 공산당 서기장을 사퇴하였으며, 소련의 각 공화국들은 느슨한 독립국가연합을 구성하기는 했지만 결국 모두 별개의 주권국가로 분리독립하였다. 고르바초프는 소련해체 이후 러시아의 대통령선거에 출마하기도 하였다.
-퇴임 이후
노벨상을 수상하기 위해 조국을 팔았다는 비판을 듣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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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10.17
  • 저작시기200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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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557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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