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에 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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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흥선대원군에 관한 고찰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흥선대원군

●생애 초기

●생애 중기

●생애 후기

●평가

본문내용

그녀를 죽이기로 결정하였다고 진술하였다. 편지에서 유길준은 명성황후 암살은 실행되었지만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 암살 문제를 일본공사와 협의하고 일본측에 약간의 도움을 요청한 것은 큰 실수였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유길준은 '도움을 얻기 위해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는 의견도 덧붙였다. 박은식은 춘추전국시대에 조순(趙盾)이 왕을 암살한 것을 비유하여 이와 다를바 없다고 평가하였으며 감정이 사람의 양심을 가린다며 비판하였다.
1896년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대원군은 은퇴하여 다시 양주로 가서 은거하다가 1898년 죽었다. 1907년 대원왕(大院王)에 추봉되었다. 시호는 헌의(獻懿)이다. 이에 따라 헌의대원왕(獻懿大院王)이라고도 부른다. 1898년 5월 16일 경기도 고양군 공덕리에 부인 여흥부대부인 민씨와 처음 묻혔다가 1908년 1월 30일 경기도 파주군 운천면 대덕동으로 이장되었다. 1966년 6월 16일 다시 이장되었다
●평가
1. 통상 수교 거부 정책에 대한 평가
통상 수교 거부 정책에 대해서는 '조선의 발전을 가로막은 폐쇄정책'이라는 평가가 있고, 반면에 '그 당시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 곧 독일의 상인 오페르트가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소를 도굴한 사건, 두 차례의 외세 침공(병인양요, 신미양요),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의 횡포와 문화재 약탈 등 서구열강의 위협 문제는 대원군으로 하여금 열강에 대해 경계하게 만들기에 충분했고 그에 따른 자구책'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이는 또한 대원군이 중시했던 백성을 편안케 하고 조선을 국제사회에서 살아남게 하려는 국제적 공존을 위한 정책이었다는 평가도 있으며, 이는 신미양요 당시 미국 함대 사령관 로저스에게 보낸 치서(致書)에서도 드러나 있다는 주장이 있다
2. 서원 철폐에 대한 평가
서원을 철폐하려고 7년여를 기다린 일에 대해서도 '때를 기다릴 줄 알았다'는 평가와 '완고하고 고루하다'는 평가가 엇갈린다.
3. 상반되는 인물평가
한편 정책 전반에 대해서는 '역사를 역행한 시대착오론자'라는 평가와 '왕권 강화 및 국권 융성을 꾀한 개혁가'라는 평이 엇갈린다. 시대착오론자라는 평가에 대해서는 오히려 일본에 줄기차고 거세게 저항했던 흥선대원군의 민족주의적 성격을 의도적으로 폄하했다는 식민사관의 유산이라는 반론이 있다. 하지만 병인박해의 피해를 입은 한국 천주교회, 안동 김씨, 여흥 민씨 가문 등 흥선대원군과 관련자들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으므로 공정한 평가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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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6페이지
  • 등록일2009.12.24
  • 저작시기2009.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69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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