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조의 개혁정치와 기묘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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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광조의 개혁정치와 기묘사화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조광조는 누구인가?
2. 당시 시대적 상황
1) 대신과 삼사의 대립(원종공신 남수/음직 가자 문제)
2) 삼대장과의 갈등
3) 능상문제
4) 5차례의 역모사건(중종의 개혁모색)
5) 사림과 기묘사림
6) 경연
3. 조광조의 개혁정치
1) 폐비신씨 복위문제
2) 정몽주와 김굉필의 문묘배향
3) 소격서 폐지
4) 향약 실시
5) 현량과 실시
6) 위훈삭제
4. 기묘사화와 조광조

Ⅲ. 결론
※ 참고문헌

본문내용

에 염증을 내고 있던 터였다. 현실적으로 정치 원로의 자리를 굳히고 있는 공신 세력을 일거에 몰아내려고 하는 것은 자칫 조정에 엄청난 파란을 몰고 올 수 있다는 판단을 한 중종은 더 이상 조광조의 급진적인 행동을 방치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중종의 이런 내면을 잘 읽고 있던 훈구 세력은 조광조를 제거하기 위한 계략을 짜고 실행하였다. 조광조를 몰아내는데 앞장선 사람은 사림파로부터 소인배로 비난받던 남곤과 공신 자격을 박탈당한 심정, 그리고 한때 조광조의 탄핵을 받아 실권할 지경에 처했던 희빈 홍씨의 아버지 홍경주 등이었다. 앞의 책. p.235.
이들은 경빈 박씨 등 후궁을 이용해 중종에게 ‘온 나라의 인심이 모두 조광조에게 돌아갔다’고 하면서 조광조가 왕권을 넘보고 있음을 피력했다. 그리고 궁중에 있는 나뭇잎에 주초위왕(走肖爲王) 이라고 쓰고 그곳에 꿀물과 과일즙을 발라 벌레가 갉아먹게 한 다음 궁녀를 시켜 왕에게 바치도록 하였다. 주초(走肖)는 조(趙)를 분리한 글자이므로 ‘조씨(조광조)가 왕이 되려 한다’는 뜻이었다. 이는 비록 미신에 불과했지만 중종은 몹시 불쾌해 했다. 또한 홍경주와 남곤, 김전, 이장곤, 고형산, 심정 등은 밤에 은밀히 왕을 만나 조광조 일파가 붕당을 조성하여 중요한 자리를 독차지하고 임금을 속여 국정을 어지럽히고 있기에 이를 엄히 다스려야 한다는 상소를 했다. 이들의 상소가 있자 중종은 조광조를 비롯한 일단의 사림 세력을 치죄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정국공신 개정 문제가 임박한 1519년 11월 15일 저녁에 갑자기 조광조를 비롯한 그의 추종자들이 일제히 검거되고 말았다. 신동준,『조선의 왕과 신하, 부국강병을 논하다』, 살림출판사, 2007. pp.281-282 참조.
이후 조광조 세력에 대한 처벌문제로 나라전체는 시끄러웠다.
결국 중종은 최종적으로 조광조 등 네 사람은 사형을 면하는 대신 벼슬을 내린 임명장을 몰수하고 곤장 백 대를 쳐 먼 곳으로 유배 보내라는 명을 내렸다. 이에 조광조는 전라도 능성으로 유배되었다. 이후 훈구파 세력들로 정국이 바뀐 후, 조광조는 기묘년인 1519년 12월 20일 12월 유배지 능주에서 사약을 받고 사사되었다. 조광조는 사약을 받기 전 중종이 있는 북쪽을 향해 정좌하고 다음과 같은 시를 한 수 지었다고 한다.
愛君如愛父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 사랑하듯 하였고
憂國如憂家 나라 근심하기를 집안 근심하듯 하였노라
白日臨下土 밝은 해가 아래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昭昭照丹衷 거짓 없는 이내 충정을 환하게 비추리라 이영철,『주초위왕[走肖爲王] 음모에 꺾인 ‘개혁의 꿈’』, 주간동아, 2009. 12. 15. pp.82-95 참조.
이 사건이 조선의 4대 사화 중 세 번째인 기묘사화이고, 이때 희생된 조신들을 기묘명현이라고 한다. 그의 개혁노선을 지지하고 실천에 옮기려 했던 많은 선비들이 죽음을 당하거나 귀양을 가는 등 큰 화를 당하였다. 신병주,『조선을 움직인 사건들』, 새문사, 2009. p.116.
Ⅲ. 결 론
16세기에 살았던 사상가 조광조는 자신의 사상을 실천에 옮긴 개혁가이기도 했다. 그의 개혁이념은 주자성리학이요, 개혁의 목표는 조선사회를 개혁이념에 따라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도덕적 이상 국가를 실현하는 일이었다. 당시 정치적으로는 훈구계열의 권력 독점을 통한 왕권의 약화와 민폐의 증가, 국가운영에서의 행정원칙 붕괴 등이 문제점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따라서 조광조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성리학적 사유에 입각한 국정개혁을 통해 해결하려고 부단히 노력하였다. 그가 실현코자 했던 소격서 철폐, 현량과와 향약의 실시, 잘못된 공신들을 삭제한 위훈삭제의 실현 등, 그의 개혁전략을 매우 웅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조광조의 개혁추진은 그가 관직에 오른 이후 4년 정도의 기간 동안에 이루어졌다. 지나치게 급격하고 시행 기간에 너무 짧아 개혁세력 양성의 실패와 저항세력의 증가를 낳았다. 개혁의 이념에 원론적으로 충실했지만 실천과정에서의 저항세력에 대한 효과적인 대항방법과 시간 부족에서 연유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군주의 통치에 대한 이념적 지향은 오히려 중종을 압박하는 수단되었다. 조광조의 개혁추진에서 그는 자신이 의존했던 중종, 즉 국왕이 자신에게 행한 정치적 신뢰도 결국 상실하게 된다. 너무도 아까운 38세의 나이에 어처구니없게도 가장 믿었던 정치적 파트너로부터 사약을 받아야 했다. 이런 점에서 그의 개혁전략은 높이 평가해야 하지만 개혁방법에서 문제가 있었다고 보고 있다.
그렇다면 조광조의 국정개혁은 과연 실패한 것인가? 조광조의 국정개혁은 실패였다고 단정 지을 수 없다. 그 이유는 그의 국정개혁은 선조 대 이후의 사림파가 정권을 장악한 이후에 율곡 이이 등에 계승되었고, 특히 그가 내세운 선비의 모델과 개혁이념은 조선 후기에 까지 영향력을 미쳤다는 점 때문이다. 개인의 이익이나 영달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공의(公義)로운 삶을 학처럼 살다간 그에게 좌절은 있었지만 실패는 없었다. 조광조는 조선을 지탱하는 선비정신의 표상이었으며, 올곧은 그가 선비로서 행했던 개혁추진은 우리현실에 큰 귀감이 될 것이다.
※ 참고문헌
단행본
김범,『사화와 반정의 시대』, 역사비평사, 2007.
김인숙,『조선 4대 사화』, 느낌이 있는 책, 2009.
박영규,『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들녘, 1996.
신동준,『조선의 왕과 신하, 부국강병을 논하다』, 살림출판사, 2007.
신병주,『조선을 움직인 사건들』, 새문사, 2009.
신연우 신영란,『제왕들의 책사』, 생각하는 백성, 2007.
이덕일,『사화로 보는 조선 역사』, 석필, 2005.
이상성,『한국 도학의 태산북두 조광조』,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06.
임채영,『조선의 위대한 패배자들』, 경덕출판사, 2008.
정두희,『조광조 평전』, 아카넷, 2000.
최락도,『우리시대에 조광조가 있다면』, 푸른샘, 2002.
함규진,『108가지 결정』, 페이퍼로드, 2008.
논문
박준규,『趙光祖의 政治活動과 社會改革에 관한 硏究, 경기대학교 일반대학원』, 2009.
잡지
이영철,『주초위왕[走肖爲王] 음모에 꺾인 ‘개혁의 꿈’』, 주간동아, 2009. 1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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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6.25
  • 저작시기2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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