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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압과 싸우는 가운데 1908년 5월 27일부터 발행인 명의를 영국인 만함(萬咸:Alfred Marnham)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1909년 5월 1일 배설이 죽고 난 후, 1910년 6월 1일부터는 발행인이 이장훈(李章薰)으로 바뀌었고, 국권피탈이 되면서 조선 총독부의 기관지로 전락했다.
6) 만세보
1906년(광무 10) 6월 17일 동학(東學)의 영수 손병희(孫秉熙)의 발의로 천도교(天道敎)에서 창간한 일간신문이다. 손병희는 동학의 일파였던 이용구(李容九)가 일진회(一進會)를 만들어 일제(日帝)를 돕는 반역을 자행하자 그와 손을 끊고 따로 동학의 전통을 계승한 천도교를 창건하는 한편,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만세보》를 창간하였다. 사장에 오세창(吳世昌), 발행인 겸 편집인에 신광희(申光熙), 주필에 이인직(李人稙)의 진용으로 발족하였는데, 반민족행위에 대한 비난과 일진회를 공격하는 데에 앞장섰다. 그러나 《만세보》가 경영난에 빠지자, 이완용(李完用)의 사주를 받은 이인직이 1907년 6월 30일 《만세보》의 시설 일체를 매수하여, 《대한신문(大韓新聞)》으로 제호(題號)를 바꾸고 친일내각의 기관지로 탈바꿈함으로써 창간된 지 1년 만에 문을 닫았다.
6) 만세보
1906년(광무 10) 6월 17일 동학(東學)의 영수 손병희(孫秉熙)의 발의로 천도교(天道敎)에서 창간한 일간신문이다. 손병희는 동학의 일파였던 이용구(李容九)가 일진회(一進會)를 만들어 일제(日帝)를 돕는 반역을 자행하자 그와 손을 끊고 따로 동학의 전통을 계승한 천도교를 창건하는 한편,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만세보》를 창간하였다. 사장에 오세창(吳世昌), 발행인 겸 편집인에 신광희(申光熙), 주필에 이인직(李人稙)의 진용으로 발족하였는데, 반민족행위에 대한 비난과 일진회를 공격하는 데에 앞장섰다. 그러나 《만세보》가 경영난에 빠지자, 이완용(李完用)의 사주를 받은 이인직이 1907년 6월 30일 《만세보》의 시설 일체를 매수하여, 《대한신문(大韓新聞)》으로 제호(題號)를 바꾸고 친일내각의 기관지로 탈바꿈함으로써 창간된 지 1년 만에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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