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주의 국가의 기본적인 형태에 대해 알아보고, 에스파냐, 프랑스, 영국의 각각의 국가 성립 과정을 살펴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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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들어가며 - 근대 국가의 형성

2. 근대 초기의 국가 형성 - 절대주의 국가(the Absolutist State)
(1) 중세 봉건제 국가
(2) 절대주의 국가의 정의
(3) 절대주의 국가의 특징

3. 에스파냐
(1) 에스파냐 절대주의 - 우연한 탄생
(2) 절대주의의 융성 및 몰락
(3) 절대주의 국가 성립과 몰락의 요인

4. 프랑스
(1) 절대주의를 위한 초석 - 카페 & 발루아 왕조 (987~1328, 1328~1589)
(2) 절대주의의 확립 - 부르봉 왕조(1589~1789)

5. 영국
(1) 강한 중세왕정과 절대주의의 시작
(2) 영국 절대주의의 형성과 한계
(3) 영국 절대주의의 표면적인 영광과 종결

6. 나가며 - 절대주의 국가의 양면성

<참고문헌>

본문내용

한 스튜어트 왕정을 어렵게 만들었다. 영국 국교회와 같은 의식을 스코틀랜드에 강요함으로써 군사적인 충돌이 일어났고, 잉글랜드의 경우와는 달리 귀족과 젠트리가 군사적 성격을 가지고 있던 스코틀랜드에서는 강력한 군대를 동원하게 되었다. 그 후 1년 뒤 가톨릭 교도들의 반란이 아일랜드에서 일어났고, 이러한 갈등 상황은 의회와 국왕을 내전으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결국 왕은 처형되었고, 영국의 절대주의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
6. 나가며 - 절대주의 국가의 양면성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서유럽의 절대주의 국가들은 각각 중앙 권력을 뒷받침하기 위해 상비군, 관료제, 조세체계, 무역 활성화, 외교 제도를 정비했다. 이러한 제도는 절대주의 국가의 양면성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제도 자체는 근대적이지만 그 양상은 봉건 시대의 유산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한 예로 상비군의 경우 루이 14세 시대에는 30만에 달할 정도였지만 그 내부는 국민병이 아닌 주로 스위스와 독일이 주 공급원이 되는 외국의 용병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군을 지휘하게 될 귀족 계층이 농민들이 무장하게 되는 데 대해 불안감을 느꼈던 탓이며 동시에 보다 전문적인 병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즉, 군은 외부 전쟁 이외에 내부 반란을 진압하는 데 동원되었으며 외인 병력은 내란 진압에 효과적이었다. 또한 전문적인 용병은 잦은 전쟁시 전투 전문가로서 효과적인 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동시에 ‘근대적’인 상비군은 ‘봉건적’인 왕조 계승과 봉건 권리 보호를 위해 활용되었다. 이 과정에서 국가 자체가 전쟁을 위해 조직되는 양상을 보였다. 일례로 프랑스 최초의 전국적 조세인 ‘인두세’는 친위대의 재정을 위해 거두어졌으며, 16세기 중엽까지 에스파냐의 국가 수입 80퍼센트는 군비로 쓰여졌다. 심지어 1789년의 프랑스 조차 국가 지출의 3분의 2를 군대 유지에 할애하고 있었다. 패리 앤더슨, 함택영 외 공역, 『절대주의 국가의 계보』, (서울, 서울프래스, 1994) p.36
이런 양상은 근대 자본주의 국가라기보다는 전쟁 수행이 존재 목적이었던 중세 영주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관료제와 조세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는 일견 근대적인 체제로 보이나 실제 관료제는 관직 매매라는 형태로 부르주아를 귀족 계급에 편입시키는 역할을 수행했으며, 이로 인해 상업 자본 축적은 저해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국가의 조세는 특권 계층을 제외한 나머지에게 부과되었으며 영주의 권력이 온전히 해체되지 않은 상황에서 농민은 2중적인 강제징수를 당할 수 밖에 없었다.
중상주의로 대표되는 무역의 활성화도 마찬가지 성격을 지니고 있다. 중상주의는 국내 산업은 진흥하고 수입 상품에는 막대한 관세를 매겨 진입 장벽을 만드는 방식으로 국내의 단일한 거대 시장을 창출하기 위한 제도였다. 이러한 중상주의 제도는 국내 시장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동시에 폐쇄적인 성격으로 인해 일정 수준을 넘어선 시점부터는 시장 확대의 걸림돌이 되고 말았다.
이처럼 절대주의 국가는 봉건적인 국가였지만 동시에 근대적인 맹아를 지니고 있었던 양면적인 국가였다. 절대주의 국가는 여전히 봉건적인 국가였고 ‘중세를 지배하였던 바로 그 귀족 계급의 지배기구’였지만 또한 ‘봉건 제 및 자본주의 생산 양식의 결합’을 통해 유지되었고, 중상주의적 자본주의 확산은 상품 생산과 교환을 증가시켜 궁극적으로 농노제를 비롯한 봉건 관계를 해체시키는 데 기여했다. 절대적인 강제력이 강화되는 동시에 사적 소유권이 증가된 점도 간과할 수 없다. 패리 앤더슨, 함택영 외 공역, 『절대주의 국가의 계보』, (서울, 서울프래스, 1994) p.473 참조
또한 각 국가의 상이한 조건은 절대주의 국가 형성 양상이 서로 전혀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에스파냐가 내적 토대 없이 홀란드와 신대륙의 재화로 절대주의 국가를 형성한 점이나 프랑스가 대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여전히 절대주의 국가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점, 가장 절대주의 국가가 느리게 형성되었고 약했던 것처럼 보였던 영국이 오히려 가장 먼저 근대 국가의 형태를 이뤘다는 점은 각국의 상이한 물적 토대와 전쟁 조건에 따른 것이다.
에스파냐는 영국이나 프랑스와 달리 내부 제도 정비와 상품 생산 토대를 갖추기 전에 너무 빨리 절대주의 국가를 형성시켰으며 패권 추구 과정에서 지나친 전쟁으로 인해 정신적, 물질적 자원을 소모해야 했다. 프랑스는 내부 제도 및 생산 토대를 갖추었으나 역시 패권 전쟁에 휘말린 탓에 변화의 기회를 쉽게 잡지 못했다. 반면 영국은 유럽의 대륙 패권에서 멀어진 탓에 오히려 내부 정비와 물적 토대의 바탕 아래 근대 국가로 가장 빨리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덧붙여 봉건 사회에서는 ‘경제외적 강제’, 즉 강력한 개별적 인신적 지배를 통해 농민의 노동력을 수탈하고자 했으나 절대주의 국가에서는 이러한 면모가 크게 약화될 수 밖에 없었던 점을 주목해야 한다. 요컨대 절대주의 국가는 농민들을 재억압하려는 봉건적 재편성이기도 했으나 또한 도시 부르주아의 상업 자본의 압력을 받아야 하는 양면적인 특성도 지니고 있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절대주의 국가의 공통점으로 봉건적인 동시에 근대적인 양면적 제도를 들 수 있을 것이고 차이점으로는 각국이 처해 있던 내부 제도 및 물적 토대, 그리고 대외 전쟁 양상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공통점과 차이점은 각국을 절대주의 국가로 형성시킨 동시에 서로 다른 양태를 도출시켰으며 그로 인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른 역사적 조건을 갖는 결과를 낳았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도서
패리 앤더슨, 함택영 외 공역, 『절대주의 국가의 계보』, (서울, 서울프래스, 1994)
브라이언 타이어니, 시드니 페인터 공저, 이연규 역, 『서양 중세사』, (서울, 집문당, 2000)
존 H. 엘리엇, 김원중 역, 『스페인 제국사』, (서울, 까치, 2000)
임승휘, 『절대왕정의 탄생』, (서울, 살림, 2004)
박지향,『영국사-보수와 개혁의 드라마』(까치 2007)
나종일 외,『영국의 역사』(한울아카데미 2005)
서울대 정치학과 공저, 『정치학의 이해』, (서울, 박영사, 2006 중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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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10.04
  • 저작시기20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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