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판소리의 개념----------------3
2.판소리의 의미----------------4
3.판소리의 발전과정------------5
4.판소리의 기원----------------8
5.판소리의 역사----------------12
6.판소리의 작가----------------15
7.판소리의 내용----------------16
8.판소리의 특징----------------19
9.판소리의 미학----------------20
10.관련 논문 요약--------------22
11.참고문헌--------------------26
2.판소리의 의미----------------4
3.판소리의 발전과정------------5
4.판소리의 기원----------------8
5.판소리의 역사----------------12
6.판소리의 작가----------------15
7.판소리의 내용----------------16
8.판소리의 특징----------------19
9.판소리의 미학----------------20
10.관련 논문 요약--------------22
11.참고문헌--------------------26
본문내용
전국 주요 도시에 권번(기생 조합)이 설치되어 여기서 판소리를 가르치기 시작함으로써 다수의 여자 창자가 배출되었다는 점이다. 이 시대에 활동했던 사람 중에서, 5명창에는 들지 못 하지만 주목할 만한 사람으로는 이선유, 장판개, 김정문, 박봉래, 공창식, 박동실 등이 있다.
이 시기의 말기에는 임방울, 김연수, 강장원 등이 활발한 활동을 하기 시작하였다
-○해방이후 판소리
1)해방이 되자, 4일 후인 8월 19일 국악 건설 본부가 발족되었으며, 이는 후에 \'국악원\'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창극 운동도 다시 활발해져 다시 여러 단체가 생기는 가운데, 1948년 5월에는 여성 국악인 30여 명으로 구성된 \'여성국악동호회\'가 결성되어, 여성만으로 창극을 공연하게 되었으며, 레퍼터리도 전통 판소리를 벗어나 설화나 야사, 야화 등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이 때의 대표적인 창극 단체와 창극은 국극사의 [만리장성], 국극협단의 [예도성의 삼경], 조선창극단의 [왕자호동], 김연수 창극단의 [단종과 사육신] 등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며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한편 여성국악동호회의 [햇님달님]도 공전의 대히트를 하여, 공연장마다 인파가 몰려들었다.
그러나 그런 호황도 잠깐, 6.25로 인하여 거의 아사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6.25 이후에는 다시 여성국극단이 생겨 일시 인기를 끄는 듯했으나, 마침내는 16개 단체가 난립하는 가운데, 1958년 이후는 기울어지기 시작하여 4.19 이후에는 거의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여성국극단의 종말은 판소리의 종말과 일치한다. 왜냐하면, 당시의 판소리는 순수 판소리를 고집하던 임방울, 정응민, 박봉술, 신영채 등 일부 소수를 제외하고는, 창극단이나 여성국극단으로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개화 이후 계속되어온 판소리의 창극화가 여성국극단에 이르러 종언을 고하게 되는 과정은, 장르의 순수성이 무너질 때 그것이 어떤 결과에 이르게 되는지를 잘 보여주는 실례가 된다. 서구식 무대의 도입에 의해 \'청취의 대상\'이었던 판소리가 \'관람의 대상\'으로 바뀌고, 관람의 대상으로서 \'볼거리\'에 치중하면서 마침내 전통적인 내용과 형식을 벗어나게 되어, 창극은 자멸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여기에 민족적 시련과 서구화에 의한 민족문화의 해체가 가속작용을 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1961년 11월에는 \'사단법인 한국국악협회\'가 발족되었고, 1961년 정부조직법의 개정으로 국립극장이 마련되어 여기에 국립창극단이 창설되었으며, 1973년부터는 국립창극단 단원 전원에게 유급제가 실시되어, 정부가 판소리에 대한 지원을 하기 시작하였다.
2)무형문화재시대의 명창들
그러나 판소리를 비롯한 전통문화에 대한 정부의 정책적 개입은, 1964년 일본에 이어 시행된 무형문화재 제도로부터 본격화되었다. 그리하여 1964년 김연수, 정광수, 김소희, 김여란이 판소리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이래, 박동진, 박녹주, 박초월, 박귀희, 정권진, 한승호, 강도근, 오정숙, 성창순, 성우향, 조상현 씨등이 지정되어 국가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무형문화재 제도의 실시는 사라져가는 전통문화에 대한 국가적 보호의 필요성을 느낀 정부에 의해 시행되었지만, 그 시행 자체가 이미 전통문화가 자생력을 잃었다는 한 증거이기도 하다.
판소리가 재생의 계기를 맞게 된 것은 정부의 무형문화재 지정에 뒤이은 판소리 창자들의 완창 발표회, 그리고 일부 뜻 있는 지식인들에 의해 주도된 판소리 감상회였다. 판소리 완창 발표회는 판소리 한 바탕을 처음부터 끝까지 부르는 발표회로, 1968년 박동진에 의해 처음 실시된 이래, 판소리 창자 및 감상자들 사이에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키면서 확산되었으며, 이제는 이 방식이 소리꾼의 기량을 선보이고 평가받는 방식으로 굳어졌다. 이는 서양식 무대와 서양식 제도를 이용하면서도 전통 판소리를 전혀 훼손하지 않음으로써, 바람직한 방식으로 자리를 확고히 한 것으로 평가된다.
6. 판소리의 작가: 신재효
신재효는 우리 민족 고유의 소리인 ‘판소리’를 모아 책으로 내고 또 후학들에게 소리를 가르쳐 그 명맥을 이은 소리꾼의 아버지입니다. 당시 판소리는 열두 마당이 있었으며 선생은 이 가운데 여섯 마당을 정리했다. 때문에 사람들은 신재효 선생을 ‘판소리 정리자’, ‘판소리 후원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신재효는 거친 내용의 판소리 여섯마당을 합리적으로 개작했는가 하면, 판소리 광대가 갖추어야 할 법도를 규정해 직접 가르치기도 했다. 판소리가 민중 연행예술 단계에서 벗어나 고급예술로 발돋움하기 위해 어떻게 자기 갱신해야 할지 명확하게 제시했다.
전국의 이름난 판소리 광대와 수많은 기생 가운데 재능있는 인물을 선별해 직접 지도하며 전문적인 가창 예능인으로 육성했다. 요즘 말로 말해 작사, 작곡은 물론 연예기획자 역할까지 담당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광대라도 그의 가르침을 받지 않고는 당대 명창의 반열에 오를 수 없었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 정도였다.
신재효는 전라도 고창의 향리였고 대단한 부자였다. 중앙정부 및 지방의 행사라든가 번번이 찾아드는 흉년과 같은 재해에 상당한 재물을 헌납했다. 그래서 고창 사람들은 유애비를 세워 그의 선정을 기렸다.
신재효는 향촌사회의 부자를 봉건 국가 또는 지방 수령에게 수탈당한 최대 피해자로 꼽았던 것이다. 하지만 가난하고 힙없는 일반 백성보다 부자와 아전을 먼저 꼽는 것이 타당할지는 모르겠지만 신재효 자신이 고창의 향리이지 부자로 지내면서 절감했던 문제의식의 발로로 보아야 옳을 것이다. 신재효는 당대 민중의 고난과 염원을 담아 엮어냈다는 판소리 사설을 내밀하게, 그러나 처절하게 부자 또는 향리라는 자신의 계급적 시각에서 개작했던 것이라 보는 사람도 많다.
조선 후기의 판소리 이론가, 개작가, 후원자인 신재효의 호는 동리이고, 전라남도 고창 출생이다. 그는 고창원의 향리와 서민들과 깊이 사귀었을 뿐만 아니라 죽은 뒤에 여러 양반들이 만장을 써보낸 것으로 보아 신분을 넘어선 폭넓은 교우를 맺었으리라 추정된다. 판소리에서 정신세계를 찾은 그는 판소리를 즐기는 동시에 자신의 넉넉한 재력을 이용하면서 판소리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서편제의 장점을 조화시키면서 판소리의 듣는 측면에
이 시기의 말기에는 임방울, 김연수, 강장원 등이 활발한 활동을 하기 시작하였다
-○해방이후 판소리
1)해방이 되자, 4일 후인 8월 19일 국악 건설 본부가 발족되었으며, 이는 후에 \'국악원\'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창극 운동도 다시 활발해져 다시 여러 단체가 생기는 가운데, 1948년 5월에는 여성 국악인 30여 명으로 구성된 \'여성국악동호회\'가 결성되어, 여성만으로 창극을 공연하게 되었으며, 레퍼터리도 전통 판소리를 벗어나 설화나 야사, 야화 등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이 때의 대표적인 창극 단체와 창극은 국극사의 [만리장성], 국극협단의 [예도성의 삼경], 조선창극단의 [왕자호동], 김연수 창극단의 [단종과 사육신] 등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며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한편 여성국악동호회의 [햇님달님]도 공전의 대히트를 하여, 공연장마다 인파가 몰려들었다.
그러나 그런 호황도 잠깐, 6.25로 인하여 거의 아사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6.25 이후에는 다시 여성국극단이 생겨 일시 인기를 끄는 듯했으나, 마침내는 16개 단체가 난립하는 가운데, 1958년 이후는 기울어지기 시작하여 4.19 이후에는 거의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여성국극단의 종말은 판소리의 종말과 일치한다. 왜냐하면, 당시의 판소리는 순수 판소리를 고집하던 임방울, 정응민, 박봉술, 신영채 등 일부 소수를 제외하고는, 창극단이나 여성국극단으로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개화 이후 계속되어온 판소리의 창극화가 여성국극단에 이르러 종언을 고하게 되는 과정은, 장르의 순수성이 무너질 때 그것이 어떤 결과에 이르게 되는지를 잘 보여주는 실례가 된다. 서구식 무대의 도입에 의해 \'청취의 대상\'이었던 판소리가 \'관람의 대상\'으로 바뀌고, 관람의 대상으로서 \'볼거리\'에 치중하면서 마침내 전통적인 내용과 형식을 벗어나게 되어, 창극은 자멸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여기에 민족적 시련과 서구화에 의한 민족문화의 해체가 가속작용을 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1961년 11월에는 \'사단법인 한국국악협회\'가 발족되었고, 1961년 정부조직법의 개정으로 국립극장이 마련되어 여기에 국립창극단이 창설되었으며, 1973년부터는 국립창극단 단원 전원에게 유급제가 실시되어, 정부가 판소리에 대한 지원을 하기 시작하였다.
2)무형문화재시대의 명창들
그러나 판소리를 비롯한 전통문화에 대한 정부의 정책적 개입은, 1964년 일본에 이어 시행된 무형문화재 제도로부터 본격화되었다. 그리하여 1964년 김연수, 정광수, 김소희, 김여란이 판소리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이래, 박동진, 박녹주, 박초월, 박귀희, 정권진, 한승호, 강도근, 오정숙, 성창순, 성우향, 조상현 씨등이 지정되어 국가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무형문화재 제도의 실시는 사라져가는 전통문화에 대한 국가적 보호의 필요성을 느낀 정부에 의해 시행되었지만, 그 시행 자체가 이미 전통문화가 자생력을 잃었다는 한 증거이기도 하다.
판소리가 재생의 계기를 맞게 된 것은 정부의 무형문화재 지정에 뒤이은 판소리 창자들의 완창 발표회, 그리고 일부 뜻 있는 지식인들에 의해 주도된 판소리 감상회였다. 판소리 완창 발표회는 판소리 한 바탕을 처음부터 끝까지 부르는 발표회로, 1968년 박동진에 의해 처음 실시된 이래, 판소리 창자 및 감상자들 사이에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키면서 확산되었으며, 이제는 이 방식이 소리꾼의 기량을 선보이고 평가받는 방식으로 굳어졌다. 이는 서양식 무대와 서양식 제도를 이용하면서도 전통 판소리를 전혀 훼손하지 않음으로써, 바람직한 방식으로 자리를 확고히 한 것으로 평가된다.
6. 판소리의 작가: 신재효
신재효는 우리 민족 고유의 소리인 ‘판소리’를 모아 책으로 내고 또 후학들에게 소리를 가르쳐 그 명맥을 이은 소리꾼의 아버지입니다. 당시 판소리는 열두 마당이 있었으며 선생은 이 가운데 여섯 마당을 정리했다. 때문에 사람들은 신재효 선생을 ‘판소리 정리자’, ‘판소리 후원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신재효는 거친 내용의 판소리 여섯마당을 합리적으로 개작했는가 하면, 판소리 광대가 갖추어야 할 법도를 규정해 직접 가르치기도 했다. 판소리가 민중 연행예술 단계에서 벗어나 고급예술로 발돋움하기 위해 어떻게 자기 갱신해야 할지 명확하게 제시했다.
전국의 이름난 판소리 광대와 수많은 기생 가운데 재능있는 인물을 선별해 직접 지도하며 전문적인 가창 예능인으로 육성했다. 요즘 말로 말해 작사, 작곡은 물론 연예기획자 역할까지 담당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광대라도 그의 가르침을 받지 않고는 당대 명창의 반열에 오를 수 없었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 정도였다.
신재효는 전라도 고창의 향리였고 대단한 부자였다. 중앙정부 및 지방의 행사라든가 번번이 찾아드는 흉년과 같은 재해에 상당한 재물을 헌납했다. 그래서 고창 사람들은 유애비를 세워 그의 선정을 기렸다.
신재효는 향촌사회의 부자를 봉건 국가 또는 지방 수령에게 수탈당한 최대 피해자로 꼽았던 것이다. 하지만 가난하고 힙없는 일반 백성보다 부자와 아전을 먼저 꼽는 것이 타당할지는 모르겠지만 신재효 자신이 고창의 향리이지 부자로 지내면서 절감했던 문제의식의 발로로 보아야 옳을 것이다. 신재효는 당대 민중의 고난과 염원을 담아 엮어냈다는 판소리 사설을 내밀하게, 그러나 처절하게 부자 또는 향리라는 자신의 계급적 시각에서 개작했던 것이라 보는 사람도 많다.
조선 후기의 판소리 이론가, 개작가, 후원자인 신재효의 호는 동리이고, 전라남도 고창 출생이다. 그는 고창원의 향리와 서민들과 깊이 사귀었을 뿐만 아니라 죽은 뒤에 여러 양반들이 만장을 써보낸 것으로 보아 신분을 넘어선 폭넓은 교우를 맺었으리라 추정된다. 판소리에서 정신세계를 찾은 그는 판소리를 즐기는 동시에 자신의 넉넉한 재력을 이용하면서 판소리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서편제의 장점을 조화시키면서 판소리의 듣는 측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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