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생산의 거울
제5부 맑스주의와 정치경제학 체계
역사의 유클리드 기하학
정치경제학의 세 번째 단계
모순과 전복 : 정치의 이동
정치적 혁명과 문화적 혁명
이데올로기와 모사모델로서의 경제
맑스주의 이론과 노동운동 : 계급의 개념
궁극목적으로서의 혁명 : 역사의 일시정지
유토피아의 급진성.
제5부 맑스주의와 정치경제학 체계
역사의 유클리드 기하학
정치경제학의 세 번째 단계
모순과 전복 : 정치의 이동
정치적 혁명과 문화적 혁명
이데올로기와 모사모델로서의 경제
맑스주의 이론과 노동운동 : 계급의 개념
궁극목적으로서의 혁명 : 역사의 일시정지
유토피아의 급진성.
본문내용
고 있다. 그러므로 이 혁명은 더 이상 여기서, 지금 순간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적 궁극성이 된다. 부르주아 계급에 의한 진보의 영향 아래 실증주의화되건, 맑스주의에 의한 혁명의 영향 아래 변증법화되건, 그것은 언제나 자신의 무의미 속에서 모든 궁극성을 관통하느 욕망의 급진성에 대항하여, 하나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며, 객관적인 궁극성을 합리적으로 투영하는 것이다.
역사적 유물론을 가장하여, 생산의 관념론은 결국 혁명계급에게 긍정적인 정의를 내리게 된다. 이때 혁명계급은 노동력의 보편성에 따라 보편 속에서 정의된다. 부르주아 계급은 자본의 보편성에 의해 자신의 역사적 존재 속에 기초를 둔 각기의 가치로서 서로 대립한다. 각자가 저마다 자신의 객관적인 역사적 지시를 갖는 계급들의 이러한 대립 속에서 언제나 승리를 거두는 것은 부르주아계급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계급 계념이 부르주아계급에 속하기 때문이며, 부르주아계급이 프롤레타리아를 그 개념 안에 가두는데 성공할 때는 이미 이긴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정의의 질서 안에 그것을 가두는 것이다. 계급이라는 지위의 출현은 노동 운동과 노동자혁명의 합리화를 뜻한다. 다시 말하면 노동 운동은 산업질서의 전체적인 합리성에 맞추는 것을 뜻한다. 그리하여 계급을 위한 계급은 생산수단과의 관계의 차원에서 실제로 적대관계를 의미할 수 있지만, 이것은 생산의 궁극성 자체를 조금도 파괴하지 않는다. 그와 반대로, 이 도식은 정치경제학의 과정을 내부로부터 변증법화함으로써 계속 그것과 한없이 교대하고 있다.
혁명적인 이중부정의 역사적인 실패는 무엇때문인가? 그것은 단순히 맑스에 의해 밝혀진 계급의 소멸을 지향하는 혁명적인 이론과 혁명의 주체와의 결합 때문이다. 우리는 심지어 이 결합이 그 자체를 서서히 배반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 결합은 뛰어넘을 수 없는 계급, 즉 조직에 의해 자신의 존재 안에서 곧 굳어져버린 이론적인 계급 속에서, 사회적 반란의 실제화를 논리적으로 산출했다. 거기서부터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맑스주의 이론은 서로 옳다고 인정하였고, 그리하여 서로 상쇄되어 균형을 유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현재 실현되고 있는 반란의 요구사항과 마찬가지로 맑스의 요구사항이었던 삶을 바꾸려는 계획은 서서리 프롤레타리아의 승리가 되어 갔다.
궁극목적으로서의 혁명 : 역사의 일시정지
혁명은 목적이 된다. 혁명은 급진적인 요구 속에는 전혀 있지 않다. 이 급진적인 요구란 궁극적인 합산을 가리키기는 커녕, 인간이 자신의 반란 안에 이미 온전히 있다고 생각하는 요구이다. 이것이 바로 유토피아의 의미이다. 유토피아가 공상적인 관념론에서 끄집어내졌을 경우에, 유토피아는 모순들이 펼처져 있는 도식을 거부한다. 즉 유토피아는 혁명의 이성, 혁명의 의식적이고 논리적인 조직, 지연된 혁명의 변증법적인 예측가능성에 여지를 남겨놓는 이 관념적인 구조화를 거부한다. 요컨대 목적과 수단들의 순수하고 단순한 구조에 너무도 빨리 빠져들게 되는 이 변증법을 거부한다. 목적으로서의 혁명은 사실상 수단들의 자율화를 뜻한다. 이 모든 것은 현 상황을 경시하고 그것의 즉각적인 전복을 피하며 장기적인 해결책 속에서 그것의 폭발적인 반을을 확대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맑스는 미래의 차원에 의해 궁극화되지 않는 사회적 발언의 특수성을 설명할 수 없을 객관적인 목적에 호소한다. 오늘날 국제 공산주의가 자기 진리의 유일한 증거를 찾게 되는 것도 이 역사의 심판속에서이다. 심지어 더 이상 변증법적인 이성 속에서가 아니라, 사실들의 내재성 속에서인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볼 때 역사는 더 이상 하나의 진전 상황이 아니라 매우 짧은 하나의 과정이며, 반란은 거기서 언제나 유죄선고를 받게 되는 것이다.
유토피아의 급진성.
인간을 소유권을 박탈당한 자로, 소외된 자로 가정하고, 완전한 인간, 완전한 타자에 결부시키는 맑스주의적 분석과는 반대로, 유토피아는 소외의 개념을 알지 못한다. 유토피아는 모든 인간이나 모든 모든 인간이나 모든 사회가 각 시기마다 자신의 상징적인 요구에 이미 전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맑스주의는 성숙의 도중에 있는 현실로서의 혁명이 엿보일 때만 반란이나 사회의 움직임 자체를 분석한다. 완전함의 민족주의인 동시에 이성의 완성된 단계의 민족주의인 맑스주의는 나머지 모든 것을 시대에 뒤진 무가치한 것으로 여긴다. 여기서 맑스주의는 그 자체속에 있는 모든 것을 통해, 과학적인 단계에서까지, 소외를 겨냥하는 하나의 철학으로 심오하게 나아있다. 그런데 소외라는 용어로 구성된 비판적인 사상이 지향하는 다른 곳은 분열된 존재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언제나 총체적인 하나의 본질이다. 총체성의 이 형이상학은 분리된 현실세계와 전혀 대립되지 않으며, 그것과 더불어 체계를 이루고 있다. 역사의 끝에 자신의 투명성이나 지산의 총체적인 사용가치를 되찾으려는 주체에게 있어서의 전망은 본질의 회복만큼이나 종교적이다. 소외는 주체가 꿈꾸는 상상계이다. 주체는 오늘날에는 자신을 상실해야 한다. 주체의 합산은 여전히 의식의 정치경제학의 정수이다. 이 때 의식은 정치 경제학이 등가원리에 의해 견고해지듯이 주체의 동일성에 의해 견고해진다. 이러한 개념 자체는 사라져야 한다. 그러나 인간들에게 그들의 잃어버린 동일성과 그들의 미래의 자율성에 대한 환상을 품어서는 안된다.
가능한 것이나 불가능한 것은 없다. 유토피아는 바로 정치경제학에 대항하는 모든 에너지 속에 있다. 그러나 이 유토피아적인 폭력은 축적되지 않고 사라진다. 그것은 경제적인 가치처럼 죽음을 없애기 위해 축적되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결코 권력을 원하지도 않는다. 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역사적인 유일한 가능성 속에 피착취자들을 가두는 것은 일어난 혁명의 최악의 방향전환이엇따. 여기서 우리는 정치경제학의 원리가 어느 정도로 깊숙이 혁명적인 전망을 약화시키고 포위하며 일탈시켰는지를 보게 된다. 유토피아는 권력에 대항하는 발언이기를 원한다. 그리고 유토피아는 체계와 체계의 무한한 재생산의 환각에 지나지 않는 현실원칙에 대항하는 발언이기를 원한다. 유토피아는 오직 발언이기를 원하면서 그 발언 속에서 사라져가는 것이다.
역사적 유물론을 가장하여, 생산의 관념론은 결국 혁명계급에게 긍정적인 정의를 내리게 된다. 이때 혁명계급은 노동력의 보편성에 따라 보편 속에서 정의된다. 부르주아 계급은 자본의 보편성에 의해 자신의 역사적 존재 속에 기초를 둔 각기의 가치로서 서로 대립한다. 각자가 저마다 자신의 객관적인 역사적 지시를 갖는 계급들의 이러한 대립 속에서 언제나 승리를 거두는 것은 부르주아계급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계급 계념이 부르주아계급에 속하기 때문이며, 부르주아계급이 프롤레타리아를 그 개념 안에 가두는데 성공할 때는 이미 이긴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정의의 질서 안에 그것을 가두는 것이다. 계급이라는 지위의 출현은 노동 운동과 노동자혁명의 합리화를 뜻한다. 다시 말하면 노동 운동은 산업질서의 전체적인 합리성에 맞추는 것을 뜻한다. 그리하여 계급을 위한 계급은 생산수단과의 관계의 차원에서 실제로 적대관계를 의미할 수 있지만, 이것은 생산의 궁극성 자체를 조금도 파괴하지 않는다. 그와 반대로, 이 도식은 정치경제학의 과정을 내부로부터 변증법화함으로써 계속 그것과 한없이 교대하고 있다.
혁명적인 이중부정의 역사적인 실패는 무엇때문인가? 그것은 단순히 맑스에 의해 밝혀진 계급의 소멸을 지향하는 혁명적인 이론과 혁명의 주체와의 결합 때문이다. 우리는 심지어 이 결합이 그 자체를 서서히 배반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 결합은 뛰어넘을 수 없는 계급, 즉 조직에 의해 자신의 존재 안에서 곧 굳어져버린 이론적인 계급 속에서, 사회적 반란의 실제화를 논리적으로 산출했다. 거기서부터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맑스주의 이론은 서로 옳다고 인정하였고, 그리하여 서로 상쇄되어 균형을 유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현재 실현되고 있는 반란의 요구사항과 마찬가지로 맑스의 요구사항이었던 삶을 바꾸려는 계획은 서서리 프롤레타리아의 승리가 되어 갔다.
궁극목적으로서의 혁명 : 역사의 일시정지
혁명은 목적이 된다. 혁명은 급진적인 요구 속에는 전혀 있지 않다. 이 급진적인 요구란 궁극적인 합산을 가리키기는 커녕, 인간이 자신의 반란 안에 이미 온전히 있다고 생각하는 요구이다. 이것이 바로 유토피아의 의미이다. 유토피아가 공상적인 관념론에서 끄집어내졌을 경우에, 유토피아는 모순들이 펼처져 있는 도식을 거부한다. 즉 유토피아는 혁명의 이성, 혁명의 의식적이고 논리적인 조직, 지연된 혁명의 변증법적인 예측가능성에 여지를 남겨놓는 이 관념적인 구조화를 거부한다. 요컨대 목적과 수단들의 순수하고 단순한 구조에 너무도 빨리 빠져들게 되는 이 변증법을 거부한다. 목적으로서의 혁명은 사실상 수단들의 자율화를 뜻한다. 이 모든 것은 현 상황을 경시하고 그것의 즉각적인 전복을 피하며 장기적인 해결책 속에서 그것의 폭발적인 반을을 확대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맑스는 미래의 차원에 의해 궁극화되지 않는 사회적 발언의 특수성을 설명할 수 없을 객관적인 목적에 호소한다. 오늘날 국제 공산주의가 자기 진리의 유일한 증거를 찾게 되는 것도 이 역사의 심판속에서이다. 심지어 더 이상 변증법적인 이성 속에서가 아니라, 사실들의 내재성 속에서인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볼 때 역사는 더 이상 하나의 진전 상황이 아니라 매우 짧은 하나의 과정이며, 반란은 거기서 언제나 유죄선고를 받게 되는 것이다.
유토피아의 급진성.
인간을 소유권을 박탈당한 자로, 소외된 자로 가정하고, 완전한 인간, 완전한 타자에 결부시키는 맑스주의적 분석과는 반대로, 유토피아는 소외의 개념을 알지 못한다. 유토피아는 모든 인간이나 모든 모든 인간이나 모든 사회가 각 시기마다 자신의 상징적인 요구에 이미 전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맑스주의는 성숙의 도중에 있는 현실로서의 혁명이 엿보일 때만 반란이나 사회의 움직임 자체를 분석한다. 완전함의 민족주의인 동시에 이성의 완성된 단계의 민족주의인 맑스주의는 나머지 모든 것을 시대에 뒤진 무가치한 것으로 여긴다. 여기서 맑스주의는 그 자체속에 있는 모든 것을 통해, 과학적인 단계에서까지, 소외를 겨냥하는 하나의 철학으로 심오하게 나아있다. 그런데 소외라는 용어로 구성된 비판적인 사상이 지향하는 다른 곳은 분열된 존재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언제나 총체적인 하나의 본질이다. 총체성의 이 형이상학은 분리된 현실세계와 전혀 대립되지 않으며, 그것과 더불어 체계를 이루고 있다. 역사의 끝에 자신의 투명성이나 지산의 총체적인 사용가치를 되찾으려는 주체에게 있어서의 전망은 본질의 회복만큼이나 종교적이다. 소외는 주체가 꿈꾸는 상상계이다. 주체는 오늘날에는 자신을 상실해야 한다. 주체의 합산은 여전히 의식의 정치경제학의 정수이다. 이 때 의식은 정치 경제학이 등가원리에 의해 견고해지듯이 주체의 동일성에 의해 견고해진다. 이러한 개념 자체는 사라져야 한다. 그러나 인간들에게 그들의 잃어버린 동일성과 그들의 미래의 자율성에 대한 환상을 품어서는 안된다.
가능한 것이나 불가능한 것은 없다. 유토피아는 바로 정치경제학에 대항하는 모든 에너지 속에 있다. 그러나 이 유토피아적인 폭력은 축적되지 않고 사라진다. 그것은 경제적인 가치처럼 죽음을 없애기 위해 축적되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결코 권력을 원하지도 않는다. 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역사적인 유일한 가능성 속에 피착취자들을 가두는 것은 일어난 혁명의 최악의 방향전환이엇따. 여기서 우리는 정치경제학의 원리가 어느 정도로 깊숙이 혁명적인 전망을 약화시키고 포위하며 일탈시켰는지를 보게 된다. 유토피아는 권력에 대항하는 발언이기를 원한다. 그리고 유토피아는 체계와 체계의 무한한 재생산의 환각에 지나지 않는 현실원칙에 대항하는 발언이기를 원한다. 유토피아는 오직 발언이기를 원하면서 그 발언 속에서 사라져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