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변한 소국의 성장과 가야의 성립
2. 가야 여러 나라의 역사와 문화
1)김해의 금관가야(金官加耶)
2)함안의 아라가야(阿羅加耶)
3)고성의 소가야(小加耶)
4)창녕의 비화가야(非火加耶)와 성주의 성산가야(星山加耶)
5)고령의 대가야(大加耶)
2. 가야 여러 나라의 역사와 문화
1)김해의 금관가야(金官加耶)
2)함안의 아라가야(阿羅加耶)
3)고성의 소가야(小加耶)
4)창녕의 비화가야(非火加耶)와 성주의 성산가야(星山加耶)
5)고령의 대가야(大加耶)
본문내용
을 순장시킨 순장묘(殉葬墓)가 발굴되었고 또 다른 고분에서는 가야식 금동관을 비롯하여 갑옷, 투구, 금동제 마구 등 집권력을 상징하는 유물들이 다량 출토되었다. 또한 고령에서 출토된 것으로 알려진 가야식 금관도 있어 대가야의 왕권의 존재를 상징하고 있다. 여기에 더하여 고령양식의 장경호에 '대왕(大王)'이라고 쓰여져 있어 대가야에서는 자신의 왕을 대왕이라 불렀던 것으로 볼 수 있고, 합천에서는 '하부사리리(下部舍利利)'라는 글자가 새겨진 토기도 출토되어 고구려의 5부나 신라의 6부와 같이 상부(上部), 하부(下部)의 2부나 상부, 중부, 하부의 3부와 같은 부체제를 갖춘 고대국가를 이룩하였다고 보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토기양식에 있어서도 대가야 토기양식이 확립되었고, 그것이 고령·합천·거창·산청·진주, 남원, 장수지역까지 확산되고 있어 이런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하겠다.
한편 고령의 남쪽, 낙동강과 황강의 합류지점인 합천군 쌍책면에 위치하는 옥전고분군(玉田古墳群) 일대는 다라국(多羅國)이라는 소국이 있었던 곳으로 알려져 왔는데, 이 옥전고분 발굴결과 고분양식도 독특하고 출토유물도 금장식 대도, 갑옷, 투구, 유리잔 등 화려하고 질 높은 유물들이 다량 출토되었다. 그런데 유물양식이 낙동강 건너 맞은편의 창녕양식도 있고 경주양식도 있고 독자성이 강한 양식도 있어 다라국이 한동안 강력한 독자세력으로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5세기 후반부터는 토기양식이 고령양식으로 모두 바뀌고 있어 근처의 다른 지역과 같이 고령의 대가야 영역으로 들어갔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영역을 확보했던 대가야도 6세기 중반(562년) 신라 진흥왕의 공격으로 멸망함으로써 가야 전체가 신라에 의해 복속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보다 앞서 532년에 이미 낙동강하류의 김해 금관가야가 신라에 항복하여 신라에 복속됨으로써 가야남부지역이 신라의 영토가 되었고, 점차 함안의 아라가야도 이미 신라에게 멸망하고 대가야만 남아 있던 것인데 백제와 신라 사이에서 국가를 지키지 못하고 결국 가야전체가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중국에 독자적으로 사신을 파견하여 중국으로부터 관작을 받고 국제무대에서 활약하였고, 한때 신라와 백제와도 동맹을 맺어 지원군을 파견하는 등의 활동을 통해 우리의 역사무대에서 당당히 활동하였던 가야는 자기의 역사기록을 남기지 못하고 멸망함으로써 보잘 것 없는 역사, 사라진 역사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토기양식에 있어서도 대가야 토기양식이 확립되었고, 그것이 고령·합천·거창·산청·진주, 남원, 장수지역까지 확산되고 있어 이런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하겠다.
한편 고령의 남쪽, 낙동강과 황강의 합류지점인 합천군 쌍책면에 위치하는 옥전고분군(玉田古墳群) 일대는 다라국(多羅國)이라는 소국이 있었던 곳으로 알려져 왔는데, 이 옥전고분 발굴결과 고분양식도 독특하고 출토유물도 금장식 대도, 갑옷, 투구, 유리잔 등 화려하고 질 높은 유물들이 다량 출토되었다. 그런데 유물양식이 낙동강 건너 맞은편의 창녕양식도 있고 경주양식도 있고 독자성이 강한 양식도 있어 다라국이 한동안 강력한 독자세력으로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5세기 후반부터는 토기양식이 고령양식으로 모두 바뀌고 있어 근처의 다른 지역과 같이 고령의 대가야 영역으로 들어갔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영역을 확보했던 대가야도 6세기 중반(562년) 신라 진흥왕의 공격으로 멸망함으로써 가야 전체가 신라에 의해 복속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보다 앞서 532년에 이미 낙동강하류의 김해 금관가야가 신라에 항복하여 신라에 복속됨으로써 가야남부지역이 신라의 영토가 되었고, 점차 함안의 아라가야도 이미 신라에게 멸망하고 대가야만 남아 있던 것인데 백제와 신라 사이에서 국가를 지키지 못하고 결국 가야전체가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중국에 독자적으로 사신을 파견하여 중국으로부터 관작을 받고 국제무대에서 활약하였고, 한때 신라와 백제와도 동맹을 맺어 지원군을 파견하는 등의 활동을 통해 우리의 역사무대에서 당당히 활동하였던 가야는 자기의 역사기록을 남기지 못하고 멸망함으로써 보잘 것 없는 역사, 사라진 역사가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