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조선.중국.일본 왕조의 특성
2. 조선.중국.일본 국왕의 권한 차이
3. 인사권이 제한되었던 조선 국왕
4. 왕명보다 앞서는 당명
5. 택군(擇君)의 두 가지 방식-반정과 독살
6. 정조의 정치개혁 실패와 일당독재
2. 조선.중국.일본 국왕의 권한 차이
3. 인사권이 제한되었던 조선 국왕
4. 왕명보다 앞서는 당명
5. 택군(擇君)의 두 가지 방식-반정과 독살
6. 정조의 정치개혁 실패와 일당독재
본문내용
권은 강화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사랑까지 왕권 강화의 도구로 이용해야 했다는 그 자체가 조선 국왕의 미약했던 왕권의 크기를 말해주는 것이다.
숙종은 할아버지 효종과 아버지 현종, 그리고 그 아들 경종이 모두 독살설에 휘말렸던 임금들이었다. 이런 상황이니 숙종은 왕권 강화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하나가 왕비와 후궁을 둘러싼 사랑이었다. 이런 냉혹함이 그를 독살설에서 벗어나게 해 준 것인지도 모른다.
독살설에 휘말리는 국왕들을 보면 한가지 공통적인 특색이 있다. 독살설의 배후에 그 임금을 반대했던 정당이 존재하며 임금이 죽은 후 숙종 즉위 때를 제외하면 어김없이 그 당이 집권한다는 점이다. 이는 특정 정당이 특정 임금과 정치적 갈등이 극대화되었을 경우 임금을 갈아치우는 것을 해결책으로 선택하지 않았는가하는 의구심을 갖게한다. 이는 임금이 절대적인 충성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 한 정당이 선택할 수 있는 상대적인 존재였음을 뜻하는 동시에 신하들이 특정 임금을 배척할 수도 있었음을 뜻한다.
5. 택군(擇君)의 두 가지 방식-반정과 독살
이를 신하가 임금을 선택했다는 뜻의 '택군(擇君)'이라 하는데 국왕독살설은 그야말로 이 '택군'의 결과인 것이다. 왕조국가에서 신하들이 택군이란 말을 입에 올리면 그 자체로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였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택군이 거의 공공연히 이루어졌다.
택군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그 하나는 국왕을 독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 임금을 공개리에 갈아치는 것이다. 이를 반정(反正)이라한다. 연산군을 내쫓은 중종반정이나 광해군을 내쫓은 인조반정은 신하들이 공개리에 임금을 축출하고 새로운 임금을 옹립한 쿠데타였다. 그나마 '정도(正道)로 돌아가다'라는 뜻의 반정은 정도(正道)라는 명분과 임금을 내쫓을 힘을 지니고 있는 경우였다.
그러나 명분이 부족하거나 그 명분을 강행할만한 힘이 부족할 경우 은밀하게 국왕의 신체에 위해를 가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독살'이다. '반정'과 '독살'은 둘 다 신하들이 임금을 선택한 결과라는 점에서 동전의 양면이다. 반정은 공개리에 이루어지므로 상당한 정치적 부담이 있는데 비해 독살은 은밀히 이루어지므로 정치적 부담이 덜하다는 장점이 있다.
이 택군의 논리야말로 조선시대 국왕독살설을 만들어낸 정치 용어이자 왕조국가 조선이 말기까지 갔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조선의 국왕 중 독살설에 휘말리는 인물은 소현세자와 사도세자를 포함해 무려 9명이나 된다.
6. 정조의 정치개혁 실패와 일당독재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는 힘겨운 과정 끝에 즉위한 후 정치개혁을 서둘렀다. 정조 시대의 정치개혁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내몬 집권 노론의 당세를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조는 끝내 정치개혁에 실패하고 그 역시 독살설을 남기며 재위 24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조정은 계속 노론의 수중에 있었다. 조선은 국왕의 나라가 아니라 노론의 나라였던 것이다.
조선이 이처럼 왕권이 약했으면서도 500년 이상을 존속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역설적으로 왕권이 약했기 때문이다. 왕권이 약했기에 실질적 지배세력인 사대부들이 왕조를 교체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일본의 천황이 명목상이었기에 막부의 쇼군들이 천황을 폐쇄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문제는 실질적인 지배층들인 이들 사대부들이 권리만 있고 의무는 없는 존재였다는 점에 있다. 나라가 일본에 빼앗기 때까지 실질적인 지배자였던 이들은 국망(國亡)에 어떠한 책임도지지 않았다. 이들 사대부들은 오히려 일본에 붙여 자신들의 권력을 계속 유지했다.
현재 우리나라가 맞고 있는 지배층에 대한 극심한 불신의 뿌리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사랑까지 왕권 강화의 도구로 이용해야 했다는 그 자체가 조선 국왕의 미약했던 왕권의 크기를 말해주는 것이다.
숙종은 할아버지 효종과 아버지 현종, 그리고 그 아들 경종이 모두 독살설에 휘말렸던 임금들이었다. 이런 상황이니 숙종은 왕권 강화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하나가 왕비와 후궁을 둘러싼 사랑이었다. 이런 냉혹함이 그를 독살설에서 벗어나게 해 준 것인지도 모른다.
독살설에 휘말리는 국왕들을 보면 한가지 공통적인 특색이 있다. 독살설의 배후에 그 임금을 반대했던 정당이 존재하며 임금이 죽은 후 숙종 즉위 때를 제외하면 어김없이 그 당이 집권한다는 점이다. 이는 특정 정당이 특정 임금과 정치적 갈등이 극대화되었을 경우 임금을 갈아치우는 것을 해결책으로 선택하지 않았는가하는 의구심을 갖게한다. 이는 임금이 절대적인 충성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 한 정당이 선택할 수 있는 상대적인 존재였음을 뜻하는 동시에 신하들이 특정 임금을 배척할 수도 있었음을 뜻한다.
5. 택군(擇君)의 두 가지 방식-반정과 독살
이를 신하가 임금을 선택했다는 뜻의 '택군(擇君)'이라 하는데 국왕독살설은 그야말로 이 '택군'의 결과인 것이다. 왕조국가에서 신하들이 택군이란 말을 입에 올리면 그 자체로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였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택군이 거의 공공연히 이루어졌다.
택군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그 하나는 국왕을 독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 임금을 공개리에 갈아치는 것이다. 이를 반정(反正)이라한다. 연산군을 내쫓은 중종반정이나 광해군을 내쫓은 인조반정은 신하들이 공개리에 임금을 축출하고 새로운 임금을 옹립한 쿠데타였다. 그나마 '정도(正道)로 돌아가다'라는 뜻의 반정은 정도(正道)라는 명분과 임금을 내쫓을 힘을 지니고 있는 경우였다.
그러나 명분이 부족하거나 그 명분을 강행할만한 힘이 부족할 경우 은밀하게 국왕의 신체에 위해를 가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독살'이다. '반정'과 '독살'은 둘 다 신하들이 임금을 선택한 결과라는 점에서 동전의 양면이다. 반정은 공개리에 이루어지므로 상당한 정치적 부담이 있는데 비해 독살은 은밀히 이루어지므로 정치적 부담이 덜하다는 장점이 있다.
이 택군의 논리야말로 조선시대 국왕독살설을 만들어낸 정치 용어이자 왕조국가 조선이 말기까지 갔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조선의 국왕 중 독살설에 휘말리는 인물은 소현세자와 사도세자를 포함해 무려 9명이나 된다.
6. 정조의 정치개혁 실패와 일당독재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는 힘겨운 과정 끝에 즉위한 후 정치개혁을 서둘렀다. 정조 시대의 정치개혁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내몬 집권 노론의 당세를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조는 끝내 정치개혁에 실패하고 그 역시 독살설을 남기며 재위 24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조정은 계속 노론의 수중에 있었다. 조선은 국왕의 나라가 아니라 노론의 나라였던 것이다.
조선이 이처럼 왕권이 약했으면서도 500년 이상을 존속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역설적으로 왕권이 약했기 때문이다. 왕권이 약했기에 실질적 지배세력인 사대부들이 왕조를 교체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일본의 천황이 명목상이었기에 막부의 쇼군들이 천황을 폐쇄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문제는 실질적인 지배층들인 이들 사대부들이 권리만 있고 의무는 없는 존재였다는 점에 있다. 나라가 일본에 빼앗기 때까지 실질적인 지배자였던 이들은 국망(國亡)에 어떠한 책임도지지 않았다. 이들 사대부들은 오히려 일본에 붙여 자신들의 권력을 계속 유지했다.
현재 우리나라가 맞고 있는 지배층에 대한 극심한 불신의 뿌리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