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신인가 아닌가 그것이 문제로다 -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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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머릿말
2. 李齊賢의 生涯와 政治活動
3. 李齊賢의 歷史敍述과 歷史意識
 가. 櫟翁稗說
 나. 金公行軍記
 다. 忠憲王世家
 라. 國史
4. 李齊賢의 歷史속의 意味와 限界
5. 맺음말

본문내용

한 세대 앞선 민지는 주자의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본떠 『본조(本朝)편년강목』을 지었지만 “성리학을 알지 못했다”는 평가를 들었고, 이제현 다음 세대에서 유종(儒宗)으로 일컬어졌던 이색조차 후배들에게서 “학문이 순수하지 못하다”는 비판을 들었다. 따라서 이제현에 대한 위의 평가도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는 과정에서 나올 수 있었던 것일 뿐, 여전히 이제현은 성리학 수용에서 일익을 담당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이제현은 개혁과 성리학의 두 가지 모두에서 의미와 한계를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역사적 의미는 과거를 향해 닫혀 있는 것이고 한계는 미래를 향해 열려 있는 것이니, 우리에게는 언제나 한계가 크게 보이지만, 역사적인 의미를 함께 고려해야만 정당한 평가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개혁을 주장한 정치가이자 성리학자였던 이제현을 평가하는 데도 당시 시점에서 의미와 한계를 고르게 살피는 일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이제현을 연구하는 데 많은 논란이 되는 것은 그의 대원(對元)의식에 관한 것이다. 성리학의 명분론에 따라 원에 대한 사대를 합리화했으니 친원(親元)이라는 견해와, 부원배들이 제기한 입성론을 반대하는데 앞장서서 고려 왕조를 지켜냈으니 반원(反元)이라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당시 고려·원 관계를 비추어볼 때 반원과 친워느 자주와 사대의 이분법은 유용한 판단 기준이 아니다. 세조구제 아래서는 고려 왕조의 존속과 원에 대한 사대, 그리고 원의 정치적 간섭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현은 그런 체제에 충실했던 것이며,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그 현실을 벗어나 사고하고 행동하는 데 이르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제현이 현실을 극복하지 못한 것은 그의 역사의식과 관련이 있다. 이제현은 여러 종의 역사책을 지었는데, 그것들이 모두 고려시대사이고 그 이전의 역사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바로 앞 세대의 일연(一然)과 이승휴(李承休)가 단군조선으로부터 우리 역사의 시작을 찾고자 노력했던 것과 비교할 때, 오히려 뜻밖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현은 고려 왕조의 존립 근거를 단군에서 이어져 내려온 역사 전통에서 구하지 않고, 원 세조가 고려의 토풍을 고치지 않겠다고 약속한 데서 찾았던 것이다. 이런 태도가 뒷날 공민왕의 반원운동을 끝까지 인정하지 못하는 요인이 되었음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5. 맺 음 말
이제현은 고려가 원에 예속되어 있던 이중국가체제 하에서 태어나 그 체제를 수긍하면서 살았다. 그 뿐만 아니라 그는 당시 동양세계에서 국경이 없어진 원의 통일된 국가체제를 ‘동문(同文)’의 국가가 이룩되었다고 환영하였다. 따라서 그는 몽고족을 이민족으로 파악하는 민족의식은 거의 없었다. 이처럼 그가 비록 국제정치에 있어서 민족적 의식은 극히 박약하였지만 그렇다고 이점을 근대에 있어서 식민지 국가의 생활하에서와 똑같이 평가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는 이중국가체제하에서 고려인에 의하여 고려왕조국가를 없애어 원의 직속령으로 만들려는 입성론이 제기 되어 원에서 이를 논의하고 있음을 알았을 때에 이를 반대하는 운동의 최선봉에 서서 활약함으로서 고려왕조를 존속시키는데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자신이 섬기는 왕이 원에 의하여 유배되었을 때에는 그 석방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다. 이러한 왕조와 왕에 대한 충성은 당시에 있어서는 애국심으로 해석하여야 할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그는 고려를 존속시키기 위하여는 국내의 정치, 경제적인 면에서 철저하고도 근본적인 개혁을 단행하여, 국가재정을 확립하고,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함과 부원세력파들의 입성론 모의를 막을 수 있는 방책의 강구를 당시의 가장 급박한 시무(始務)로 인식하였다.
이러한 그의 시대의식은 당시의 지식인으로서는 가장 전진적인 의식이었으며 훗날 조선건국의 주동자에 의하여 제기된 문제를 미리 제시한 것이었다. 이러한 시대의식은 시(詩)로, 상서(上書),로 그리고 과거시험의 책문(策文)으로 제기되었으며, 또한 많은 역사설을 통하여 나타냈다.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던 역옹패설, 김공행군기 등은 모두가 그의 시대의식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따라서 그의 역사서술의 목적은 후대에 교훈을 주기 위하여 서술한다는 감계(鑑戒) 내지 교훈(敎訓)이라는 목적은 거의 나타나지 않고 현실문제의 해결에 두어졌던 것이 그의 사학의 일장일단(一長一短)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의 사상이 전진적이고 철저하였으나 그의 실천적인 행동과는 괴리가 잇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사의 그의 열전에 고법을 좋아하였으나 “재능이 금인(今人)에 미치지 못한다” 하여 개혁이 적극적이 아님을 기술하고 있는 점과 네 차례의 국상을 지내면서 그의 실천을 반성함과 부끄러움을 고백함 등을 보았을 때 그의 성격 탓도 있겠고, 당시의 국제정세나, 고려의 정치적 상황이 입체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것이라 생각되는 바, 그렇게 보았을 때 익재 이제현의 고려국의 충신이니 아니니 하는 탁상공론과 같은 문제가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을이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으며, 비록 후세가 그를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 정도(正道)를 밟지 않는다고 기록하고, 생각해왔지만 다시 한번 이 시대에 신하 이재현, 문학가 이제현, 성리학자 이제현을 다시 한번 재평가를 해볼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 하는 고민을 가진다.
◈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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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현구, 익재 이제현의 정치활동 - 공민왕대를 중심으로, 진단학보51, 진단학회 1981
이익주, 14세기 전반 성리학 수용과 이제현의 정치활동, 전농사론7, 서울시립대학교, 2001
장영희, 역옹패설의 인물기록과 그 성격, 한국어문학연구 50, 한국어문학연구학회, 2008
정구복, 이제현의 역사의식, 진단학보51, 진단학회 1981
한영우선생정년기념논총간행회,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열전, 돌베개,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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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1.25
  • 저작시기20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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