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정리(위진남북~아편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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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동아시아정리(위진남북~아편전쟁)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南北朝時代
1. 남북조 略史
2. 남북조의 문화와 사상
수 · 당시대
1. 隋 왕조
2. 수의 혼란과 당의 성립
3. 당의 발전과 멸망
4. 당의 문화
5. 측천무후(則天武后;624~705)
6. 玄宗과 양귀비
五代·宋·遼·金 時代
明 時代
청시대(1644~1911)

본문내용

④ 戰費賠償金 1200만달러와, 몰수당한 아편 보상금으로 600만달러를 영국에 지불한다.
⑤ 행상(行商) 즉, 공행(公行)과 같은 독점상인을 폐지한다.
⑥ 수출입 상품에 대한 관세를 제한한다.
⑦ 청나라와 영국 두 나라 관리의 대등한 교섭
영국은 이 조약을 더욱 구체화하여 1843년 7월, 5항 통상장정(通商章程)을, 10월에 호문채(虎門寨) 추가조약을 체결하여, 영사의 재판권 인정과 수출입품의 세율 협정 및 개항장에 있어서의 조계(租界)설치·최혜국대우(最惠國待遇)·조관(條款) 등의 특권을 획득하였다. 이들의 조약을 기본으로 하여 44년에는 미국이 청나라와 망하(望廈)조약을 체결하고, 프랑스도 청나라와 황포(黃浦)조약을 체결하여 영국과 똑같은 여러 특권을 획득하였다. 난징조약을 비롯하여 이에 이어지는 그 뒤의 여러 조약은 근대 중국이 국제관계에서 부담하게 된 불평등조약의 단서가 되어, 영국을 비롯한 유럽 여러 나라의 경제·정치·문화·영토면에서의 중국 침략에 길을 열어준 결과가 되었다. 이후 중국은 점차 유럽 및 일본 등 자본주의 세계의 종속적인 시장으로서 재편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이 조약체결을 기점으로 해서 중국은 반식민지(半植民地)·반봉건사회로 전화(轉化)하였다.
6. 청과 조선의 관계
한반도 북변에 할거하면서 17세기 초 중국 본토에 진출하여 통일왕조 청(淸)을 세운 여진은 조선 개국 초부터 북방개척에 힘을 기울였던 조선 정부의 가장 부심(腐心)거리로 등장하여 때로는 무력으로, 때로는 회유책을 써서 이들의 조공(朝貢)·귀화(歸化)를 권장하였다. 조선 정부는 이들이 노략질하는 동기의 하나가 생활 필수품의 결핍에 있음을 감안하여 함경도의 경성(鏡城)과 경원(慶源)에 무역소를 설치하고 그들이 필요한 물건을 바꾸어 가도록 하였으며, 여진 추장들에게는 중추원지사(中樞院知事)를 비롯하여 호군(護軍)·사직(司直)·만호(萬戶)·천호(千戶) 등의 명예 군직(軍職)을 주기도 하였다. 특히 청을 일으킨 건주여진은 1467년(세조 13) 남이(南怡) 등이 이끄는 조선군의 정벌을 당해, 추장 이만주(李滿住) 부자가 살해되어 그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명나라와 조선의 힘이 만주에 미치지 못하는 틈을 타서 세력을 크게 확장하여 조선 선조가 의주(義州)에 피란하였을 때 건주 여진의 추장 누르하치는 조선에 구원병을 보내겠다고 제의하기도 하였으나 조선 정부는 그 속셈을 알 수 없어 거절하였다. 그 후 후금을 세운 누르하치의 아들 태종은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을 일으켜 조선과 형제의 맹약을 맺고, 1636년(인조 14)에는 다시 병자호란을 일으켜 조선의 항복을 받음으로써 종래의 수직 또는 수평 관계는 전도(顚倒)되어 청나라가 조선의 종주국이 되었다. 이로부터 조선은 약 250년간 해마다 정기·부정기적으로 사절과 조공품을 보내어 사대(事大)의 예를 하였으나, 조선은 내정의 간섭을 받지 않고 대체로 독자성을 유지하여 청나라의 종주국 행세는 극히 형식적인 것이었으며, 양국 관계도 별 어려움이 없이 무난하게 보냈다.
1842년 난징조약[南京條約]으로 조선에 앞서 개국한 청나라는 조선이 일본과의 강화도조약으로 쇄국의 둑이 무너지자, 1882년(고종 19) 조선과 미국의 통상을 권유하고 조미·조독 수호통상조약을 돕는다는 구실로 마건충(馬建忠)·정여창(丁汝昌)이 군함을 끌고 들어와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였다. 또한 같은 해에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군함 3척에 4,500명 병력을 끌고 와서 흥선 대원군을 납치하였고, 청나라의 북양대신(北洋大臣) 이홍장(李鴻章)은 독일인 묄렌도르프 및 마건충 등을 조선 정부의 정치·외교·세관 등의 고문으로 앉게 함으로써 청나라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1884년 갑신정변을 계기로 청·일 양군이 충돌해 톈진조약[天津條約:천진조약]을 맺자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를 주조선 총리로 임명해 정치·경제 등 모든 분야에 걸쳐 간섭하는 등 종주국 행세를 하였다. 청나라는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군대를 파견하여 동학군을 진압하는 데 협력하였으나, 이를 계기로 일본과 충돌하여 청·일전쟁을 일으켰는데 이 전쟁에서 패함에 따라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였다.
조선은 1896년 250년간 사용하여 온 청나라의 연호를 버리고 ‘건양(建陽)’을 연호로 사용함으로써 최초로 자체의 연호를 쓰기 시작하였으며, 1897년에는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쳐 청나라와 대등한 황제국임을 선포하였다. 조선 사회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는 동안에‘숭명배청(崇明排淸)’의 모화사상(慕華思想)이 더욱 일어 당시의 학자는 물론 일반 민중에까지 뿌리깊이 스며들었는데, 학자로서는 송시열(宋時烈)에 이르러 그 극에 달하였다. 이는 중국 본토의‘중화(中華)’만이 문화·가치이고 일본·베트남·거란·몽골·흉노 및 여진[淸]은 야만의‘이(夷)’이니 비문화·비가치(非價値)라는 화이론적(華夷論的) 세계관의 소산이어서, 중국 변두리의 오랑캐 여진족이 형성한 청나라의 문화는 배척되고, 주자학(朱子學)만이 국가사회 유지의 규범으로 정치와 결합되어 숭상되었다. 그러나 주자학이 형식적·관념적·배타적인 면만이 강화되어 학문으로서의 자유로운 비판을 거부하자, 그 반동으로 실학(實學)이 일어났고, 영조·정조 때에는 청나라 고증학(考證學)의 직접적인 영향으로 박학(樸學)이 일어나서 정약용(丁若鏞) 등 실학파에 영향을 주었다. 또한 청나라를 경유하여 서학(西學:유럽의 자연과학과 천주교)이 유입되어 과학기술과 종교에 큰 영향을 끼쳤는데, 특히 전성기를 맞이한 강희~건륭 연간(1662~1795)에 부연사(赴燕使) 일행에 끼어 청나라의 물질문명을 보고 돌아온 박지원(朴趾源)·박제가(朴齊家) 등은 청나라의 문화를 들여와 문화를 개발하고 산업을 일으키자는 ‘북학(北學)’운동을 벌였다. 이와 같이 청나라의 근대문화는 조선의 학자들을 자극하여 그 고증학적 방법과 과학사상을 바탕으로, 역사학·지리학·언어학·금석학(金石學) 및 천문학·지도제작 등에 많은 역작이 나왔고, 이와 같은 학문의 방법은 백과사전파에도 영향을 끼쳐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1770)가 편찬될 정도로 근대문학의 발달을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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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7.02
  • 저작시기2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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