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다른 이는 종말인으로 된다고 말한다. 이렇게 인간의 유형을 두 개로 나누고 한 쪽에 절대적 우위를 두었다는 점에서, 또 위버멘쉬가 되는 것은 너무나 추상적이라는 점에서 자신이 비판했던 플라톤 이후의 형이상학적 이분법을 그대로 답습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또한 이러한 우열의 관계를 상정한 것은 인간은 되어가는 존재이며 그래서 변해가는 그 과정 자체들을 긍정하고 소중히 생각해야 한다는 자신의 철학에 반대되는 행위이다. 어느 한 곳에 절대적인 우위를 두게 되면, 그때까지 겪게 되는 과정의 의미는 퇴색되고 미천한 것으로 간주되어 버린다. 니체는 나폴레옹이나 케사르를 위버멘쉬의 한 전형이라고 생각했고 이들에게서 위버멘쉬에 대한 많은 영감을 얻었다. 이렇게 구체적인 대상을 상정해놓고 그 대상을 설명할 수 있는 인간상을 만든 것이 바로 위버멘쉬이다. 이에 따라 니체의 철학 안에서 위버멘쉬의 덕목들이나 행동들은 매우 구체적으로 등장하는 반면에, 위버멘쉬로 이행하는 과정들의 설명들은 추상적이다. 그는 위버멘쉬로 되어가는 과정을 힘에의 의지라는 추상적인 원리로만 설명하고 있다. 다시 영원회귀 사유를 예로 들어보자. 영원회귀에 의한 극적 허무주의로 인해 실존적 위기를 겪게 되었을 때, 어떤 이는 위버멘쉬가 될 수 있고 어떤 이는 종말적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라는 설명은 너무나 추상적이다. 왜, 어떻게,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그렇게 나뉘어질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 설명이 부족하다. 이렇게 위버멘쉬가 되는 과정에 대한 불충분한 설명은 허무주의에 직면한 인간에게 허무주의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주기보다는 오히려 좌절의 나락으로 빠지게 하는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
결론)
- 니체철학의 현대적 의의
지금까지 니체 철학에서의 인간상을 살펴보았다.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니체는 영혼과 육체를 분리시켜 인간을 설명했던 전통 형이상학적을 부정하고, 새로운 개념인 신체로써 인간을 설명하였다. 이러한 신체, 즉 인간은 힘에의 의지에 의해 역동적 변화를 스스로 구성해내는 결코 고정될 수 없는, 되어가는 존재이다. 니체는 또한 위버멘쉬라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이상적 인간상을 제시한다. 자신의 결단과 의지로서 자기극복적인 삶을 살고자 하며, 또 그런 삶을 영위하는 인간이 위버멘쉬이다. 이러한 위버멘쉬는 고급스럽고 귀족적인 삶, 즉 주인도덕을 행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는 니체의 철학에서 몇 가지 한계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전통적인 형이상학을 부정하고 해체했던 그가 여전히 전통 서양 철학의 틀 안에서 사고하고 있음을 발견했고, 이러한 근본적인 한계는 허무주의의 극복 가능성을 흐릿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에게 니체의 철학은 많은 것들을 일깨워주고 있다. 복잡해진 현대사회에서 현대인들은 자신이 왜 자신이 살아가야 하는지도 모른 채,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다. 대중적 가치와 믿음을 아무런 비판 없이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보존과 안락만을 추구하며, 이러한 자신의 보존에 위협적인 일은 감행하려 하지 않는다. 이러한 현대인들의 모습은 니체가 제시하는 종말인의 모습과 깜짝 놀랄 정도로 비슷하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니체가 말한 위버멘쉬적 인간상이나 주인도덕은 현대에 와서도 여전히 의미있는 것이다.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가치, 절대적인 믿음과 존재를 한 번쯤 의심해 보는 게 어떠한가? 만일 그것들의 목적이나 가치가 허무하고 올바르지 않다면, 자신의 안에서 부정하고 파괴하라. 그렇다면, 당신은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자기 목적적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니체가 지향했던 위버멘쉬의 모습이다.
또한 이러한 우열의 관계를 상정한 것은 인간은 되어가는 존재이며 그래서 변해가는 그 과정 자체들을 긍정하고 소중히 생각해야 한다는 자신의 철학에 반대되는 행위이다. 어느 한 곳에 절대적인 우위를 두게 되면, 그때까지 겪게 되는 과정의 의미는 퇴색되고 미천한 것으로 간주되어 버린다. 니체는 나폴레옹이나 케사르를 위버멘쉬의 한 전형이라고 생각했고 이들에게서 위버멘쉬에 대한 많은 영감을 얻었다. 이렇게 구체적인 대상을 상정해놓고 그 대상을 설명할 수 있는 인간상을 만든 것이 바로 위버멘쉬이다. 이에 따라 니체의 철학 안에서 위버멘쉬의 덕목들이나 행동들은 매우 구체적으로 등장하는 반면에, 위버멘쉬로 이행하는 과정들의 설명들은 추상적이다. 그는 위버멘쉬로 되어가는 과정을 힘에의 의지라는 추상적인 원리로만 설명하고 있다. 다시 영원회귀 사유를 예로 들어보자. 영원회귀에 의한 극적 허무주의로 인해 실존적 위기를 겪게 되었을 때, 어떤 이는 위버멘쉬가 될 수 있고 어떤 이는 종말적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라는 설명은 너무나 추상적이다. 왜, 어떻게,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그렇게 나뉘어질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 설명이 부족하다. 이렇게 위버멘쉬가 되는 과정에 대한 불충분한 설명은 허무주의에 직면한 인간에게 허무주의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주기보다는 오히려 좌절의 나락으로 빠지게 하는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
결론)
- 니체철학의 현대적 의의
지금까지 니체 철학에서의 인간상을 살펴보았다.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니체는 영혼과 육체를 분리시켜 인간을 설명했던 전통 형이상학적을 부정하고, 새로운 개념인 신체로써 인간을 설명하였다. 이러한 신체, 즉 인간은 힘에의 의지에 의해 역동적 변화를 스스로 구성해내는 결코 고정될 수 없는, 되어가는 존재이다. 니체는 또한 위버멘쉬라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이상적 인간상을 제시한다. 자신의 결단과 의지로서 자기극복적인 삶을 살고자 하며, 또 그런 삶을 영위하는 인간이 위버멘쉬이다. 이러한 위버멘쉬는 고급스럽고 귀족적인 삶, 즉 주인도덕을 행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는 니체의 철학에서 몇 가지 한계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전통적인 형이상학을 부정하고 해체했던 그가 여전히 전통 서양 철학의 틀 안에서 사고하고 있음을 발견했고, 이러한 근본적인 한계는 허무주의의 극복 가능성을 흐릿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에게 니체의 철학은 많은 것들을 일깨워주고 있다. 복잡해진 현대사회에서 현대인들은 자신이 왜 자신이 살아가야 하는지도 모른 채,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다. 대중적 가치와 믿음을 아무런 비판 없이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보존과 안락만을 추구하며, 이러한 자신의 보존에 위협적인 일은 감행하려 하지 않는다. 이러한 현대인들의 모습은 니체가 제시하는 종말인의 모습과 깜짝 놀랄 정도로 비슷하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니체가 말한 위버멘쉬적 인간상이나 주인도덕은 현대에 와서도 여전히 의미있는 것이다.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가치, 절대적인 믿음과 존재를 한 번쯤 의심해 보는 게 어떠한가? 만일 그것들의 목적이나 가치가 허무하고 올바르지 않다면, 자신의 안에서 부정하고 파괴하라. 그렇다면, 당신은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자기 목적적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니체가 지향했던 위버멘쉬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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