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서론>
<본론>
<결론>
<본론>
<결론>
본문내용
일반의 문제로 보고자 한 것이다.
한편, 조동팔은 이 소설의 마지막에서 남경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며 우리들로 하여금 또 한번 생각할 기회를 갖게 한다.
“나도 때늦은 홍길동이보다는 이 사회의 기본 구조를 변혁시키는 쪽이 더 많은 사람을 보다 효과적으로 구할 수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소. 방금도 거리 구석구석에서 이웃들이 굶주리고 병들어 죽어가고 있는데 어디 그런 장구한 계획으로 시간을 끌 틈이 있단 말이오? 불확실한 미래에 만명을 구하는 계획보다는 지금 당장 눈앞에서 고통받는 하나를 구해내는 편이 낫소. 이데올로기를 만들고 그 전파와 호응에 힘입어 세계를 바꾸려는 것은 가진 자의 각성과 거기서 비롯된 자비심으로 세상의 상처들이 절로 치유되기를 기다리는 것만큼이나 어렵소. 세계의 개선이 지연되는 것은 앞서가는 철학과 논리를 행동이 허겁지겁 뒤따랐기 때문이오. 나는 오히려 그들더러 뒤따르라 하고 행동으로 앞서가는 쪽을 택했소. 행동의 아름다움은 작더라도 확실한 걸 얻어내는 데 있소. ”
<결론>
철학과 논리에 허겁지겁 쫓아가는 행동보다는 작은 결과나마 행동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좀더 현실적이라는 말은 상당히 설득력을 가진다. 특히 철학이 실제 사회와의 조화를 등한시한 채 자신의 갈 길만을 갔다는 혐의가 더러는 인정되는 상황에서 이러한 행동의 요구는 충분히 받아들여질 만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나 이들이 했던 실천은 남다른 선행이었으므로 남보다 앞서 실천을 하는 이가 당연히 아름다워 보일 수 있는 것이다. 그 때문에 소설 속에서 조동팔을 아는 이들이 그에게 연민을 느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현실 사회와의 조화를 등한시 하여 비난 받을 수 있는 것은 철학 뿐만이 아니라 종교도 마찬가지이다. 종교가 세인들에게 인정 받을 수 있으려면 믿는 자 뿐만이 아니라 믿지 않는 자라 할지라도 그들 마저도 다 포용할 수 있어야 진정한 의미로서의 종교가 아닐까. “사람은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 라는 성경의 말씀은 현실의 삶에 고달픈 사람들에겐 더 이상의 가치가 없는 것이다. 이제 종교는 현실에 찌들린 그들에게 그들의 삶을 풍요롭거나 윤택하게 해줄 수 있는 현실적인 무엇인가를 마련해주어야 그들의 마음속에도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 이라는 것이 자리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 해본다. 그럴때만이 예수가 ‘신의 아들’ 이 아닌 진정한 ‘사람의 아들’ 로서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을까.
한편, 조동팔은 이 소설의 마지막에서 남경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며 우리들로 하여금 또 한번 생각할 기회를 갖게 한다.
“나도 때늦은 홍길동이보다는 이 사회의 기본 구조를 변혁시키는 쪽이 더 많은 사람을 보다 효과적으로 구할 수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소. 방금도 거리 구석구석에서 이웃들이 굶주리고 병들어 죽어가고 있는데 어디 그런 장구한 계획으로 시간을 끌 틈이 있단 말이오? 불확실한 미래에 만명을 구하는 계획보다는 지금 당장 눈앞에서 고통받는 하나를 구해내는 편이 낫소. 이데올로기를 만들고 그 전파와 호응에 힘입어 세계를 바꾸려는 것은 가진 자의 각성과 거기서 비롯된 자비심으로 세상의 상처들이 절로 치유되기를 기다리는 것만큼이나 어렵소. 세계의 개선이 지연되는 것은 앞서가는 철학과 논리를 행동이 허겁지겁 뒤따랐기 때문이오. 나는 오히려 그들더러 뒤따르라 하고 행동으로 앞서가는 쪽을 택했소. 행동의 아름다움은 작더라도 확실한 걸 얻어내는 데 있소. ”
<결론>
철학과 논리에 허겁지겁 쫓아가는 행동보다는 작은 결과나마 행동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좀더 현실적이라는 말은 상당히 설득력을 가진다. 특히 철학이 실제 사회와의 조화를 등한시한 채 자신의 갈 길만을 갔다는 혐의가 더러는 인정되는 상황에서 이러한 행동의 요구는 충분히 받아들여질 만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나 이들이 했던 실천은 남다른 선행이었으므로 남보다 앞서 실천을 하는 이가 당연히 아름다워 보일 수 있는 것이다. 그 때문에 소설 속에서 조동팔을 아는 이들이 그에게 연민을 느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현실 사회와의 조화를 등한시 하여 비난 받을 수 있는 것은 철학 뿐만이 아니라 종교도 마찬가지이다. 종교가 세인들에게 인정 받을 수 있으려면 믿는 자 뿐만이 아니라 믿지 않는 자라 할지라도 그들 마저도 다 포용할 수 있어야 진정한 의미로서의 종교가 아닐까. “사람은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 라는 성경의 말씀은 현실의 삶에 고달픈 사람들에겐 더 이상의 가치가 없는 것이다. 이제 종교는 현실에 찌들린 그들에게 그들의 삶을 풍요롭거나 윤택하게 해줄 수 있는 현실적인 무엇인가를 마련해주어야 그들의 마음속에도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 이라는 것이 자리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 해본다. 그럴때만이 예수가 ‘신의 아들’ 이 아닌 진정한 ‘사람의 아들’ 로서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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