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적’인 것으로서 이점이 정치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구별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폴리스에 관한 학문)을 '인간의 선'의 실현과 동일시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선한 삶은 삶의 주목적이다. 그는 정치를 지향하는 목적과 관련해서 이해하는 '목적론적' 접근을 택했다. 사람들은 목적 추구를 위해 '지적'인 덕과 '윤리적'인 덕의 두 가지를 배양하고 실천해야 한다. 정치는 이러한 것들을 배양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것이다.
정치가 인간의 윤리적 덕을 추구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역할을 한다는 이야기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적 덕목의 목록(용기, 정의, 웅대함, 도량, 좋은 성정, 친절함, 절제)은 플라톤의 덕 개념이 지닌 엄숙함과는 큰 대조를 보이며,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이 속한다고 생각했던 아테네의 특정 계층, 곧 잘 교육받고 성장한 중상류층 사람들의 가치관을 반영한다. 윤리적 덕의 실천은 폴리스 구성원 자격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플라톤의 덕 개념을 존 모로는 엄숙함이라고 표현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적 덕목의 목록은 잘 교육받고 성장한 중상류층 사람들의 가치관을 반영한다, 플라톤은 이런 이야기가 없다. 그만큼 초월적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만큼 엄숙하지도 않고, 현실적으로 함축이 크다. 그만큼 초월적이지 않다는 이야기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윤리적 덕의 실천은 폴리스 구성원의 자격과 분리될 수 없다고 말했다.
정치가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 그것의 구체적인 함축은 윤리적 덕의 실천이 폴리스 구성원 자격과 같이 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폴리스는 하나의 공동체, 즉 구성원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를 공동으로 다루는 삶의 방식으로 살폈다.
폴리스는 인간의 삶의 방식에서 본질적으로 중요하다.
사람의 삶의 목적은 덕을 위한 능력을 완성하는 것이며, 국가는 이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담당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국가는 하나의 협동적 질서를 구성하며, 이를 통해서 그 구성원들은 덕을 실천하고 '선한 삶'을 향유하는 것이다.
폴리스는 결사체의 최고 형태이다. 이것은 단순히 폴리스의 가오를 말하는 게 아니라 폴리스가 있어야만 인간이 완성된다는 의미에서 최고 형태이다. 폴리스 자체가 최고의 단계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통할 때에만 인간이 완전하게 선한 삶을 추구할 수 있고 거기서 완성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최고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국가는 하나의 협동적 질서를 구성하며, 이를 통해서 그 구성원들이 덕을 실천하고 선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여기까지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폴리스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고, 폴리스와 그 폴리스 구성원들의 관계는 어떠한가에 대해서 정리가 된 것이다. 문단 단위로 요약한 다음에 소제목을 단다. 몇 개의 문단을 묶어서 소제목을 다는 것이 중요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한 개인에게 당연히 주어져야 할 것'을 '한 개인이 누릴 수 있는 것'과 결합시켰는데, 이것은 그의 '분배적 정의'에 관한 개념에 따른 판단이다.
분배적 정의라는 말이 중요하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많이 다른 점이 이런 것이다. 분배적 정의의 개념이 나오는데, 플라톤에서는 이런 분배적 정의가 없다. 플라톤은 내면주의이다. 내면의 덕을 가지고 이야기한다.
분배적 정의의 원칙은 한 개인이 공동체 내에서 공유하는 몫과 공동체에 기여하는 바를 개인의 능력과 자질에 연결시키고 있다. '동등한 사람들은 동등하게 대우받아야 한다'는 원칙을 폴리스에 적용하면, 상이한 구성원들이 보유한 능력들이 어떻게 공동체의 목적인 윤리적 목표들의 추구와 연결되는가에 관한 질문들을 제기하게 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기본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이념적인 측면과 방법론적인 차이를 이런 것에서 뚜렷하게 알아두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분배적 정의는 수없이 많은 논문과 저서에서 다루어졌다. 이 경우에 정의라는 말을 쓰기보다는 공정성fairness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공정성의로서의 정의이다.
분배적 정의는 시민권을 적당한 자격을 갖춘 사람들에게만 한정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여자와 노예의 '타고난 열등성'을 지적하면서, 그들에게 낮은 지위를 부여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들은 국가 안에 편입되어 타고난 열등성이 허용하는 정도만큼 덕을 성취할 수는 있지만 엄밀히 말해서 선한 삶을 공유할 수 없다.
시민권 같은 문제가 나온다. 정치공학적인 이야기까지 나오는 것이다.
덕은 오로지 동등한 사람들에게만 시민권을 인정하는 국가의 특징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분배적 정의 개념과 결합되는 시민권 개념을 엮어보면 결론이 이렇게 나온다. 오로지 동등한 사람들에게만 시민권을 인정하는 국가의 특징,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의 현실적인 함의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과 플라톤의 국가를 같은 고전의 레벨에서 다루는 것은 아닌 듯하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판타지가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단순한 연합체'에 불과한 정치적 결사체와 '진정한' 국가를 대비시켰다. 단순한 연합체, 상호방위를 제공하고 경제활동을 진작시키는 단순한 연합체와 진정한 국가, 즉 덕의 완성까지도 이루는 진정한 국가와 대비시킨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의 다른 부분에서는 이보다 덜 극단적인 견해를 보인다.
'우월성에 대한 도덕적 함의'에서 '우월성'을 '탁월함'으로 고친다.
중세의 신학과 중세의 철학의 관계를 이야기할 때 중세 철학은 신학의 시녀였다고 말하지만, 중세에 철학과 신학이 엄청난 대립 관계에 있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기본적으로 플라토닉 비전을 바탕에 깔고 있기 때문이다. 중세 철학을 읽을 때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이, 중세 철학의 기본은 아우구스티누스가 만들었고,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근본에 있어서는 플라토니스트이다. 아퀴나스 이야기가 나올 때도 마찬가지이다. 탁월함에 대한 도덕적 함의는 고대 그리스가 우리에게 남겨준 유산이다. 플라톤은 사심 없이 인간을 사랑한다. 참으로 인간의 저변에, 본질로 내려가서 인간을 사랑한다. 아리스토텔레스와는 다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회과학적이다. 플라톤이 인간을 사랑해서 잘 살자는 열망들이 국가에 나온다. 고전에 하나의 규정을 덧붙이자면 참으로 인간을 사랑하는 자가 쓰는 책이라는 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폴리스에 관한 학문)을 '인간의 선'의 실현과 동일시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선한 삶은 삶의 주목적이다. 그는 정치를 지향하는 목적과 관련해서 이해하는 '목적론적' 접근을 택했다. 사람들은 목적 추구를 위해 '지적'인 덕과 '윤리적'인 덕의 두 가지를 배양하고 실천해야 한다. 정치는 이러한 것들을 배양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것이다.
정치가 인간의 윤리적 덕을 추구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역할을 한다는 이야기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적 덕목의 목록(용기, 정의, 웅대함, 도량, 좋은 성정, 친절함, 절제)은 플라톤의 덕 개념이 지닌 엄숙함과는 큰 대조를 보이며,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이 속한다고 생각했던 아테네의 특정 계층, 곧 잘 교육받고 성장한 중상류층 사람들의 가치관을 반영한다. 윤리적 덕의 실천은 폴리스 구성원 자격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플라톤의 덕 개념을 존 모로는 엄숙함이라고 표현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적 덕목의 목록은 잘 교육받고 성장한 중상류층 사람들의 가치관을 반영한다, 플라톤은 이런 이야기가 없다. 그만큼 초월적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만큼 엄숙하지도 않고, 현실적으로 함축이 크다. 그만큼 초월적이지 않다는 이야기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윤리적 덕의 실천은 폴리스 구성원의 자격과 분리될 수 없다고 말했다.
정치가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 그것의 구체적인 함축은 윤리적 덕의 실천이 폴리스 구성원 자격과 같이 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폴리스는 하나의 공동체, 즉 구성원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를 공동으로 다루는 삶의 방식으로 살폈다.
폴리스는 인간의 삶의 방식에서 본질적으로 중요하다.
사람의 삶의 목적은 덕을 위한 능력을 완성하는 것이며, 국가는 이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담당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국가는 하나의 협동적 질서를 구성하며, 이를 통해서 그 구성원들은 덕을 실천하고 '선한 삶'을 향유하는 것이다.
폴리스는 결사체의 최고 형태이다. 이것은 단순히 폴리스의 가오를 말하는 게 아니라 폴리스가 있어야만 인간이 완성된다는 의미에서 최고 형태이다. 폴리스 자체가 최고의 단계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통할 때에만 인간이 완전하게 선한 삶을 추구할 수 있고 거기서 완성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최고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국가는 하나의 협동적 질서를 구성하며, 이를 통해서 그 구성원들이 덕을 실천하고 선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여기까지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폴리스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고, 폴리스와 그 폴리스 구성원들의 관계는 어떠한가에 대해서 정리가 된 것이다. 문단 단위로 요약한 다음에 소제목을 단다. 몇 개의 문단을 묶어서 소제목을 다는 것이 중요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한 개인에게 당연히 주어져야 할 것'을 '한 개인이 누릴 수 있는 것'과 결합시켰는데, 이것은 그의 '분배적 정의'에 관한 개념에 따른 판단이다.
분배적 정의라는 말이 중요하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많이 다른 점이 이런 것이다. 분배적 정의의 개념이 나오는데, 플라톤에서는 이런 분배적 정의가 없다. 플라톤은 내면주의이다. 내면의 덕을 가지고 이야기한다.
분배적 정의의 원칙은 한 개인이 공동체 내에서 공유하는 몫과 공동체에 기여하는 바를 개인의 능력과 자질에 연결시키고 있다. '동등한 사람들은 동등하게 대우받아야 한다'는 원칙을 폴리스에 적용하면, 상이한 구성원들이 보유한 능력들이 어떻게 공동체의 목적인 윤리적 목표들의 추구와 연결되는가에 관한 질문들을 제기하게 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기본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이념적인 측면과 방법론적인 차이를 이런 것에서 뚜렷하게 알아두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분배적 정의는 수없이 많은 논문과 저서에서 다루어졌다. 이 경우에 정의라는 말을 쓰기보다는 공정성fairness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공정성의로서의 정의이다.
분배적 정의는 시민권을 적당한 자격을 갖춘 사람들에게만 한정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여자와 노예의 '타고난 열등성'을 지적하면서, 그들에게 낮은 지위를 부여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들은 국가 안에 편입되어 타고난 열등성이 허용하는 정도만큼 덕을 성취할 수는 있지만 엄밀히 말해서 선한 삶을 공유할 수 없다.
시민권 같은 문제가 나온다. 정치공학적인 이야기까지 나오는 것이다.
덕은 오로지 동등한 사람들에게만 시민권을 인정하는 국가의 특징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분배적 정의 개념과 결합되는 시민권 개념을 엮어보면 결론이 이렇게 나온다. 오로지 동등한 사람들에게만 시민권을 인정하는 국가의 특징,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의 현실적인 함의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과 플라톤의 국가를 같은 고전의 레벨에서 다루는 것은 아닌 듯하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판타지가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단순한 연합체'에 불과한 정치적 결사체와 '진정한' 국가를 대비시켰다. 단순한 연합체, 상호방위를 제공하고 경제활동을 진작시키는 단순한 연합체와 진정한 국가, 즉 덕의 완성까지도 이루는 진정한 국가와 대비시킨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의 다른 부분에서는 이보다 덜 극단적인 견해를 보인다.
'우월성에 대한 도덕적 함의'에서 '우월성'을 '탁월함'으로 고친다.
중세의 신학과 중세의 철학의 관계를 이야기할 때 중세 철학은 신학의 시녀였다고 말하지만, 중세에 철학과 신학이 엄청난 대립 관계에 있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기본적으로 플라토닉 비전을 바탕에 깔고 있기 때문이다. 중세 철학을 읽을 때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이, 중세 철학의 기본은 아우구스티누스가 만들었고,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근본에 있어서는 플라토니스트이다. 아퀴나스 이야기가 나올 때도 마찬가지이다. 탁월함에 대한 도덕적 함의는 고대 그리스가 우리에게 남겨준 유산이다. 플라톤은 사심 없이 인간을 사랑한다. 참으로 인간의 저변에, 본질로 내려가서 인간을 사랑한다. 아리스토텔레스와는 다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회과학적이다. 플라톤이 인간을 사랑해서 잘 살자는 열망들이 국가에 나온다. 고전에 하나의 규정을 덧붙이자면 참으로 인간을 사랑하는 자가 쓰는 책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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