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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 같은 것을 발견했다고 보고한 것이다. 카터는 즉시 달려가 표면을 석회로 입힌 입구에 지하 묘지를 지키던 사람들의 관인과 투탕카멘 파라오의 인장이 찍혀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11월 26일 카터는 카나번과 그의 딸, 사위, 그리고 인부들을 뒤에 세워 둔 채 문에 구멍을 뚫는다. 그리고는 어둠 속으로 불을 비추면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방안에서 훅 하고 뛰쳐나온 더운 공기 때문에 촛불이 흔들렸다. 그러나 이윽고 내 눈이 빛에 익숙해지자 이상한 동물이며 조각상 등 방안의 풍경들이 차츰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황금! 온 사방에 눈부신 황금들이 번쩍거렸다.”
투탕카멘이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이유는 아마도 호화로운 유물보다는 발굴에 관계된 사람들에게 찾아온 의문사, 소위 ‘파라오의 저주’라는 전설 때문일 것이다. 이집트 파라오의 관에는 일반적으로 “왕의 영원한 안식을 방해하는 자에게 벌을 내릴 것이다.”라는 저주의 글이 쓰여 있다. 사람들은 투탕카멘의 무덤에도 이런 글이 써 있으리라 생각했다. 이것이 이른바 파라오의 저주로 비약된 것이다.
‘파라오의 저주’를 만든 장본인은 사실상 카나번이라고 볼 수 있다. 투탕카멘의 묘가 발굴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전보를 받고 카나번이 이 이 소식을 당시 유명한 신비론자인 하몬 백작에게 이야기하자 그는 카나번에게 투탕카멘 왕의 무덤에 들어가지 말라고 한다. 파라오의 저주가 카나번에게 내려지면 틀림없이 이름 모를 병에 걸리고 끝내는 죽음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런 말을 듣고 기분이 나빠진 카나번은 유명한 점장이를 찾아갔다. 그러나 그 노파 점장이의 점괘도 죽음이었다.
이런 충고를 듣지 않고 카나번은 이집트에 도착하여 카터와 무덤의 발굴에 참여한다. 이후 영국의 일간지 「데일리 메일」지의 특파원 아더 웨이갈은 카나번에게 만약 투탕카멘 왕의 저주가 사실이라면 6주밖에 살지 못할 것이라고 농담을 던졌고, 이 말을 들은 소설가 마리 코렐리는 카나번이 사망하기 15일 전 왕의 저주에 대한 흥미 위주의 작품을 발표한다. 그런데 정말 기가 막히게도 카나번은 투탕카멘의 얼굴에 나 있는 상처와 똑같은 부위를 모기에 물린 후 합병증으로 1923년 4월 5일 사망하고 만다. 무덤에 손 댄지 약 5개월 후의 일이었다.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카나번이 사망할 당시 카이로의 전등이 이유 없이 꺼졌고 영국에 있던 카나번의 애완견이 갑자기 경련을 일으키며 죽었다는 것도 확인되었다. 이후 카터 및 카나번과 관련된 사람들의 의문의 죽음이 이어졌고, 지금까지 약 30여 명이 파라오의 저주로 사망하였다.
파라오의 저주에 관한 이야기는 수많은 소설이나 영화, TV 시리즈물로 제작되어 잘 알려져 있지만 과학적인 분석이라는 것은 파라오의 저주가 사실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파라오의 저주에 대해서 조사하던 학자들은 매우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한 마디로 파라오의 저주라는 전설은 조작되었다는 것이다. 투탕카멘 파라오의 무덤 발굴과 관련된 사람들은 모두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는 이야기와는 달리 실제로 그 발굴 작업에 관련된 1천 5백여 명 가운데 10년 이내에 사망한 사람은 21명에 불과했다. 1933년 독일의 고고학자 슈타인도르프는 그 동안 신문이 발표한 21명의 죽음을 하나하나 뒤쫓아 분석하였다. 그 결과 나이가 들어 죽었거나 발굴과는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의 죽음이거나 우연한 죽음이라고 진상을 밝혔다. 파라오의 관에는 일반적으로 “사자의 안녕을 방해하는 자에게 저주가 있으라.”는 문구가 써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투탕카멘의 관에는 정반대로 “왕의 이름을 알리는 자에게 복이 있으라.”는 말이 쓰여 있었다.
투탕카멘의 저주에 대한 이야기는 당시 세계 각국의 언론사와 카나번 사이의 복잡한 이해관계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카나번이 발굴하는 데 자금이 쪼달리게 되자 발굴이 성공할 경우 모든 정보를 독점적으로 보도할 수 있는 권리를 주겠다고 약속하고 런던 타임스 신문사의 지원을 받게 된다. 당시 유례가 없던 이 일은 전 세계 언론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파라오의 저주는 때마침 카나번이 일찍 죽게 되자 이런 ‘악감정’을 가진 언론에 의하여 과대 포장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런 기사들이 예상 외의 반응을 보이자 언론은 ‘파라오의 저주를 받은 죽음’, ‘파라오의 복수’라는 제목으로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게 된 것이다. 실제로 카터는 ‘투탕카멘의 저주를 둘러싼 소문은 중상 모략을 위해서 짜낸 착상’이라고 혹평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방안에서 훅 하고 뛰쳐나온 더운 공기 때문에 촛불이 흔들렸다. 그러나 이윽고 내 눈이 빛에 익숙해지자 이상한 동물이며 조각상 등 방안의 풍경들이 차츰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황금! 온 사방에 눈부신 황금들이 번쩍거렸다.”
투탕카멘이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이유는 아마도 호화로운 유물보다는 발굴에 관계된 사람들에게 찾아온 의문사, 소위 ‘파라오의 저주’라는 전설 때문일 것이다. 이집트 파라오의 관에는 일반적으로 “왕의 영원한 안식을 방해하는 자에게 벌을 내릴 것이다.”라는 저주의 글이 쓰여 있다. 사람들은 투탕카멘의 무덤에도 이런 글이 써 있으리라 생각했다. 이것이 이른바 파라오의 저주로 비약된 것이다.
‘파라오의 저주’를 만든 장본인은 사실상 카나번이라고 볼 수 있다. 투탕카멘의 묘가 발굴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전보를 받고 카나번이 이 이 소식을 당시 유명한 신비론자인 하몬 백작에게 이야기하자 그는 카나번에게 투탕카멘 왕의 무덤에 들어가지 말라고 한다. 파라오의 저주가 카나번에게 내려지면 틀림없이 이름 모를 병에 걸리고 끝내는 죽음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런 말을 듣고 기분이 나빠진 카나번은 유명한 점장이를 찾아갔다. 그러나 그 노파 점장이의 점괘도 죽음이었다.
이런 충고를 듣지 않고 카나번은 이집트에 도착하여 카터와 무덤의 발굴에 참여한다. 이후 영국의 일간지 「데일리 메일」지의 특파원 아더 웨이갈은 카나번에게 만약 투탕카멘 왕의 저주가 사실이라면 6주밖에 살지 못할 것이라고 농담을 던졌고, 이 말을 들은 소설가 마리 코렐리는 카나번이 사망하기 15일 전 왕의 저주에 대한 흥미 위주의 작품을 발표한다. 그런데 정말 기가 막히게도 카나번은 투탕카멘의 얼굴에 나 있는 상처와 똑같은 부위를 모기에 물린 후 합병증으로 1923년 4월 5일 사망하고 만다. 무덤에 손 댄지 약 5개월 후의 일이었다.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카나번이 사망할 당시 카이로의 전등이 이유 없이 꺼졌고 영국에 있던 카나번의 애완견이 갑자기 경련을 일으키며 죽었다는 것도 확인되었다. 이후 카터 및 카나번과 관련된 사람들의 의문의 죽음이 이어졌고, 지금까지 약 30여 명이 파라오의 저주로 사망하였다.
파라오의 저주에 관한 이야기는 수많은 소설이나 영화, TV 시리즈물로 제작되어 잘 알려져 있지만 과학적인 분석이라는 것은 파라오의 저주가 사실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파라오의 저주에 대해서 조사하던 학자들은 매우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한 마디로 파라오의 저주라는 전설은 조작되었다는 것이다. 투탕카멘 파라오의 무덤 발굴과 관련된 사람들은 모두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는 이야기와는 달리 실제로 그 발굴 작업에 관련된 1천 5백여 명 가운데 10년 이내에 사망한 사람은 21명에 불과했다. 1933년 독일의 고고학자 슈타인도르프는 그 동안 신문이 발표한 21명의 죽음을 하나하나 뒤쫓아 분석하였다. 그 결과 나이가 들어 죽었거나 발굴과는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의 죽음이거나 우연한 죽음이라고 진상을 밝혔다. 파라오의 관에는 일반적으로 “사자의 안녕을 방해하는 자에게 저주가 있으라.”는 문구가 써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투탕카멘의 관에는 정반대로 “왕의 이름을 알리는 자에게 복이 있으라.”는 말이 쓰여 있었다.
투탕카멘의 저주에 대한 이야기는 당시 세계 각국의 언론사와 카나번 사이의 복잡한 이해관계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카나번이 발굴하는 데 자금이 쪼달리게 되자 발굴이 성공할 경우 모든 정보를 독점적으로 보도할 수 있는 권리를 주겠다고 약속하고 런던 타임스 신문사의 지원을 받게 된다. 당시 유례가 없던 이 일은 전 세계 언론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파라오의 저주는 때마침 카나번이 일찍 죽게 되자 이런 ‘악감정’을 가진 언론에 의하여 과대 포장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런 기사들이 예상 외의 반응을 보이자 언론은 ‘파라오의 저주를 받은 죽음’, ‘파라오의 복수’라는 제목으로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게 된 것이다. 실제로 카터는 ‘투탕카멘의 저주를 둘러싼 소문은 중상 모략을 위해서 짜낸 착상’이라고 혹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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