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제 3 장
제 4 장
제 4 장
본문내용
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약속들은 아무 효과가 없는 것으로 판명될 것이다. 믿음이란 하나님이나 또는 그의 진리에 대한 단순한 인식이나, 또는 신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막연한 신념이 아니라, 복음에서 깨닫고 또 하나님의 면전에서 양심의 평화를 누리며 쉼을 얻게 해주는 하나님의 긍휼에 대한 확실한 지식이다.
15절.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진노’란 단어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해되어야 하는데, 그 의미로 자주 사용된다. 본문에 사용된 표현의 일반적인 의미와 본문을 곧장 첨가하여 말하는 이유로 보아서, 율법이 우리 모두에게 결과시켜 주는 것은 오직 정죄 뿐이라는 것을 바울이 의미한 것임에 분명하다.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어떻게 번역을 하든 간에 본문의 뜻은 마찬가지이다. 즉, 기록된 율법으로 가르침 받지 못하고서 죄를 범한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을 완악하게 깨뜨리며 범하는 사람만큼 큰 범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16절.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믿음으로 되나니.
만일 우리가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의 후사가 된다고 하면, 우리가 양자로 된 믿음은 사라질 것이며, 또한 양자가 된다는 약속도 폐기되어 버릴 것이다. 우리가 양자로 되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만을 근거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된다.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순수한 은혜(우리의 공로 없는 하나님의 은총)만이 믿음 앞에 올 수 있고, 은혜를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모든 것이라고 한다면, 행위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은 그 약속이 은혜에 근거할 때에만 최종적으로 확실하게 된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보다 분명하게 모든 모호한 점을 없애 준다.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 아니라. 여기서의 율법에 속한 자라는 말은 단순히 유대 민족을 의미할 뿐이고, 그들에게 주의 율법이 주어졌었던 것인데, 율법에 속한 자들은 은혜에 참여하지 못하고 제외된다는 것이 확실하다. 이 문장을 다시 의역하여 읽으면, 문장의 뜻이 더욱 분명하여 지는데, 다음과 같다. “율법에 속한 자들에게 뿐아니라, 비록 전에는 율법을 알지 못했지만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는 모든 자에게도니라”아브라함은......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아브라함에게 이 특권이 주어진 것은 우리와의 그의 육적인 관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 즉, “우리의 영적 조상”이라고 한 것이다.
17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그는 마치 생식력과 정력이 왕성하기나 한 것처럼 씨를 약속받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생식 능력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생각의 차원을 높여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을 필요가 있었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은 어떻게 보면 출산할 수 없고 죽은 자나 다름없지만, 그들이 아브라함과 교제를 나누게 된다고 할지라도 불합리할 것은 없다.
18절.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아브라함은 모든 사물의 법칙상 그에게 전혀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믿었다는 것 하신 말씀대로 바울이 의미하는 바는, 너무도 많은 시험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이 실패하면 어떻게 될까 하고서 절망 가운데로 빠져들었을 때 그는 그에게 주어졌었던 약속, “네 씨가 하늘의 별과 바다의 모래와 같이 되리라”는 말씀에 그의 마음을 돌렸다는 것이다.
19절.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그의 환경이 약속의 성취와는 정반대였어도 그는 그가 볼 수 있었던 불리한 환경에 대해 생각하기를 그만두고(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그 자리를 내주었다(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겨버렸다는 것)는 것.
20절.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우리의 환경들은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지만, 우리는 이를 무시해버리고,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것을 우리가 믿지 못하게 방해하거나 막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이 구절은, 아브라함이 그의 시종여일하고 견고한 믿음에 의하여 그가 불신앙을 극복했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이 투쟁을 통하여 결국 승리하게 될 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방어하며 그 말씀에서 힘을 얻는 사람뿐일 것이며, 신앙은 우리의 연약함과 비참함과 결함을 바라보아서는 안 되며, 하나님의 능력에만 온전히 주목해야 한다는 것.
22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이 그에게 의를 가져다준 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했기 때문이며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은혜를 거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믿음과 말씀과의 이 관계는 주의 깊게 견지되어야 하며, 꼭 기억되어야 한다. 이는 믿음은 그것이 말씀에서 받은 것 이상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 수 없기 때문이다.
24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그리스도의 부활은 믿음의 본질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왜냐하면 부활은 내세에서 우리의 소망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만 단지 바울이 말했었다고 한다면, 이 믿음이 어떻게 의를 얻는데 도움이 될 수 있었을까를 파악하기란 그렇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셔서 그 자신의 부활로 생명에 대한 확실한 보증을 주실 때, 우리는 우리의 의의 전가가 어느 근원으로부터 흘러나오는가를 확실하게 알게 된다.
25절.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우리의 죄를 위한 속량이 십자가 위에서 성취되었었다는 것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죽음을 이긴 칭의의 능력을 그리스도의 부활에 기인한 것으로 보아야 하는 까닭은, 이 은혜가 완성된 것이 그의 새 생명에서 보다 분명하게 계시된 때문이다. 그가 먼저 하나님의 손에 매를 맞으심은, 그가 죄인의 몸으로 죄의 고통을 경험하기 위함이었으며, 그리고 후에 그가 생명의 왕국으로 높이 올리우신 것은, 그가 그의 백성에게 의와 생명을 값없이 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전가된 칭의에 대해서 여전히 말하고 있는 것이다.
15절.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진노’란 단어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해되어야 하는데, 그 의미로 자주 사용된다. 본문에 사용된 표현의 일반적인 의미와 본문을 곧장 첨가하여 말하는 이유로 보아서, 율법이 우리 모두에게 결과시켜 주는 것은 오직 정죄 뿐이라는 것을 바울이 의미한 것임에 분명하다.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어떻게 번역을 하든 간에 본문의 뜻은 마찬가지이다. 즉, 기록된 율법으로 가르침 받지 못하고서 죄를 범한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을 완악하게 깨뜨리며 범하는 사람만큼 큰 범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16절.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믿음으로 되나니.
만일 우리가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의 후사가 된다고 하면, 우리가 양자로 된 믿음은 사라질 것이며, 또한 양자가 된다는 약속도 폐기되어 버릴 것이다. 우리가 양자로 되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만을 근거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된다.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순수한 은혜(우리의 공로 없는 하나님의 은총)만이 믿음 앞에 올 수 있고, 은혜를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모든 것이라고 한다면, 행위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은 그 약속이 은혜에 근거할 때에만 최종적으로 확실하게 된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보다 분명하게 모든 모호한 점을 없애 준다.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 아니라. 여기서의 율법에 속한 자라는 말은 단순히 유대 민족을 의미할 뿐이고, 그들에게 주의 율법이 주어졌었던 것인데, 율법에 속한 자들은 은혜에 참여하지 못하고 제외된다는 것이 확실하다. 이 문장을 다시 의역하여 읽으면, 문장의 뜻이 더욱 분명하여 지는데, 다음과 같다. “율법에 속한 자들에게 뿐아니라, 비록 전에는 율법을 알지 못했지만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는 모든 자에게도니라”아브라함은......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아브라함에게 이 특권이 주어진 것은 우리와의 그의 육적인 관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 즉, “우리의 영적 조상”이라고 한 것이다.
17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그는 마치 생식력과 정력이 왕성하기나 한 것처럼 씨를 약속받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생식 능력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생각의 차원을 높여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을 필요가 있었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은 어떻게 보면 출산할 수 없고 죽은 자나 다름없지만, 그들이 아브라함과 교제를 나누게 된다고 할지라도 불합리할 것은 없다.
18절.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아브라함은 모든 사물의 법칙상 그에게 전혀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믿었다는 것 하신 말씀대로 바울이 의미하는 바는, 너무도 많은 시험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이 실패하면 어떻게 될까 하고서 절망 가운데로 빠져들었을 때 그는 그에게 주어졌었던 약속, “네 씨가 하늘의 별과 바다의 모래와 같이 되리라”는 말씀에 그의 마음을 돌렸다는 것이다.
19절.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그의 환경이 약속의 성취와는 정반대였어도 그는 그가 볼 수 있었던 불리한 환경에 대해 생각하기를 그만두고(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그 자리를 내주었다(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겨버렸다는 것)는 것.
20절.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우리의 환경들은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지만, 우리는 이를 무시해버리고,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것을 우리가 믿지 못하게 방해하거나 막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이 구절은, 아브라함이 그의 시종여일하고 견고한 믿음에 의하여 그가 불신앙을 극복했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이 투쟁을 통하여 결국 승리하게 될 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방어하며 그 말씀에서 힘을 얻는 사람뿐일 것이며, 신앙은 우리의 연약함과 비참함과 결함을 바라보아서는 안 되며, 하나님의 능력에만 온전히 주목해야 한다는 것.
22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이 그에게 의를 가져다준 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했기 때문이며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은혜를 거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믿음과 말씀과의 이 관계는 주의 깊게 견지되어야 하며, 꼭 기억되어야 한다. 이는 믿음은 그것이 말씀에서 받은 것 이상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 수 없기 때문이다.
24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그리스도의 부활은 믿음의 본질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왜냐하면 부활은 내세에서 우리의 소망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만 단지 바울이 말했었다고 한다면, 이 믿음이 어떻게 의를 얻는데 도움이 될 수 있었을까를 파악하기란 그렇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셔서 그 자신의 부활로 생명에 대한 확실한 보증을 주실 때, 우리는 우리의 의의 전가가 어느 근원으로부터 흘러나오는가를 확실하게 알게 된다.
25절.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우리의 죄를 위한 속량이 십자가 위에서 성취되었었다는 것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죽음을 이긴 칭의의 능력을 그리스도의 부활에 기인한 것으로 보아야 하는 까닭은, 이 은혜가 완성된 것이 그의 새 생명에서 보다 분명하게 계시된 때문이다. 그가 먼저 하나님의 손에 매를 맞으심은, 그가 죄인의 몸으로 죄의 고통을 경험하기 위함이었으며, 그리고 후에 그가 생명의 왕국으로 높이 올리우신 것은, 그가 그의 백성에게 의와 생명을 값없이 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전가된 칭의에 대해서 여전히 말하고 있는 것이다.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