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目 次
서론.
본론.
1. 무단통치와 식민지 수탈 체제
(1) 치욕의 역사가 시작되다
(2) 무력에 의한 식민 통치
(3) 토지는 빼앗기고 경제 활동은 위축되고
2. 1910년대 나라 안에서 전개된 독립 운동
(1) 공화주의 이념과 독립전쟁론의 대두
(2) 항일 비밀 결사의 활동
(3) 저항하는 농민과 노동자
(4) 개량 서당에선 무엇을 가르쳤나
3. 국외 독립운동기지의 건설
(1) 일송정 푸른 솔은 홀로 늙어 갔어도
(2) 신한촌에 깃든 선열의 꿈
4. 3・1운동의 전개와 그 의의
(1) 빈말에 불과했던 민족자결주의
(2) 왜 3월1일로 정했을까
(3) 전국에 울리는 ‘대한 독립 만세
(4) 성공인가 실패인가
결론.
참고문헌
서론.
본론.
1. 무단통치와 식민지 수탈 체제
(1) 치욕의 역사가 시작되다
(2) 무력에 의한 식민 통치
(3) 토지는 빼앗기고 경제 활동은 위축되고
2. 1910년대 나라 안에서 전개된 독립 운동
(1) 공화주의 이념과 독립전쟁론의 대두
(2) 항일 비밀 결사의 활동
(3) 저항하는 농민과 노동자
(4) 개량 서당에선 무엇을 가르쳤나
3. 국외 독립운동기지의 건설
(1) 일송정 푸른 솔은 홀로 늙어 갔어도
(2) 신한촌에 깃든 선열의 꿈
4. 3・1운동의 전개와 그 의의
(1) 빈말에 불과했던 민족자결주의
(2) 왜 3월1일로 정했을까
(3) 전국에 울리는 ‘대한 독립 만세
(4) 성공인가 실패인가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다. 일제는 평화적으로 전개되는 만세 시위에도 경찰과 군대를 동원하여 무차별 사격을 가하였습니다. 만세 시위는 도시에서 점차 전국의 농촌 지역으로 확대되어 갔습니다. 농촌에서의 만세 시위는 주로 장날 벌어졌는데, 일제의 수탈에 신음하던 농민들이 대거 시위에 가담하여 시위 규모는 더욱 커졌습니다. 일제의 무차별적인 무력 진압에 분노한 노동자와 농민들은 관공서, 경찰서 등 식민 통치 기관을 공격하여 파괴하고 일본인을 처단하는 등 폭력 투쟁을 전개하였습니다.
독립만세의 물결은 나라 밖으로도 확산되었습니다. 만주, 연해주 등 동포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에서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미국의 필라델피아에서는 미주 지역 동포들이 모여 3일간 한인 자유 대회를 개최하고 시가행진을 벌이기도 하였습니다. 일본에서도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위가 전개되었습니다.
(4) 성공인가 실패인가
31운동에서 조선인은 용감히 일어나 치열하게 투쟁하였고 숭고하게 희생하였습니다. 일제의 총칼에도 꺾이지 않는 불굴의 독립의지를 전 세계에 천명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31운동은 성공을 한 것일까요. 아니면 실패한 것일까요.
당장 독립을 쟁치하지 못했다는 관점에서 보면 31운동은 실패한 민족 운동입니다. 물론 그 가장 큰 이유는 일제가 군대와 경찰을 동원하여 조선인의 정당한 요구를 무자비하게 탄압하였기 때문입니다. 경기도 화성의 제암리 학살 사건이 그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그러나 31운동이 지닌 자체적 한계도 지적됩니다. 31운동은 전 민족적인 에너지를 분출하였지만 조직적이고 통일적인 항일 투쟁으로 발전하지는 못하였습니다. 민족 대표들은 평화로운 만세 시위를 대규모로 전개하고 이를 바탕으로 국제 여론에 호소하여 독립을 쟁취하려 하였습니다. 하지만 민족 자결주의는 신기루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세계의 여론은 한국을 동정하고 일제를 비난하였지만 독립을 이룰 수 있는 국제적 여건은 조성되지 않았습니다. 각종 국제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거나 일본에 국권 반환을 요구하는 것은 헛수고였습니다.
어렵고 현학적 표현으로 쓰인 [기미독립선언문]에도 독립의 의지만을 천명하였을 뿐, 일제의 수탈 정책에 대한 비판이나 민중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내용은 전혀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독립을 위해 민중들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도 제시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농민, 노동자 등 민중을 포함한 전 민족의 역량을 충분히 결집하고 이를 바탕으로 일제를 직접 타도하려는 시도를 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31운동은 일제의 식민 통치에 막대한 타격을 주었고, 우리 민족의 독립 운동을 좀 더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전개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성공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우선 나라 밖에서 무장 독립 전쟁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평화적 만세 시위나 산발적인 폭력 투쟁만으로 일제를 몰아내고 독립을 쟁취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한 많은 청년들이 만주, 연해주로 망명하여 독립군에 가담하였기 때문입니다. 일제의 식민 통치 방식도 변화시켰습니다. 즉 일제는 폭압적인 ‘무단 정치’를 포기하고 이른바 ‘문화 정치’를 표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헌병 경찰의 무력만으로는 한국인의 독립 운동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겉으로나마 유화적인 정책을 내놓은 것입니다. 하지만 문화 정치의 본질은 친일파를 양성하여 민족을 분열시키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밖에도 31운동은 중국 54운동, 인도의 비폭력 불복종 운동을 비롯하여, 베트남, 필리핀, 이집트의 독립 운동에도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1919년 전개된 중국의 54운동의 격문을 보면 ‘조선은 독립을 꾀하여 독립하지 못하면 차라리 죽겠다고 했다.’고 하면서 민중의 궐기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결론.
만주의 허허 벌판은 이때부터 흰 옷 입은 우리 민족들로 덮여 갔다. 멀리서 서로 쳐다만 봐도 든든했다. 이렇게 되자 애국지사들은 한인 자치 단체를 만들어 엄격한 규율을 세우고 학교도 세웠다. 일본에 빼앗기 나라를 도로 찾을 때까지 만주 땅에다 한 개의 작은 나라를 만들어 운영한 셈이었다. 소학교는 거리 따라 많이 세우고 중학교는 드문드문 세웠다.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중 허은 지음 (정우사)
이 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만주연해주 일대에 건설된 독립운동기지에는 공통적으로 민족 학교가 설립되었으며, 동포 사회를 이끌어 가는 자치 단체가 조직되었다. 민족 학교에서는 애국심을 일깨우면서 군사 교육도 실시하여 독립 전쟁의 기초를 다졌다. 자치 단체들은 한인 동포 사회를 이끌어 가는 민정 조직과 더불어 독립군 양성과 작전을 담당하는 군정 조직을 갖추고 있어서 마치 하나의 작은 자치 정부와 비슷하였다. 남만주 삼원보를 중심으로 활동한 한족회의 민정 조직을 보면 삼권 분립의 원칙이 적용된 중앙 조직뿐만 아니라, 교포 사회를 효율적으로 이끌어 가기 위한 지방 조직도 갖추고 있었는데 큰 마을에는 천가장을 두고 그 아래에 백기장을, 다시 십가장을 두어 동포 사회를 관할하였다.
앞의 인용 글의 저자 허은 여사는 남만주 상원보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한족회를 이끌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령도 역임하였던 석주 이상룡 선생의 손주며느리이다. 친정은 1908년 의병들의 서울 진공 작전을 이끌었던 왕산 허위 선생의 집안이다.
일제의 조선 강점은 우리 민족에게 더할 수 없는 부끄러움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러나 ‘만세의 함성’을 통해 부끄러움은 새로운 세상을 만들 희망의 싹으로 자라났습니다. 일제의 강압과 수탈에 맞서 우리 민족은 끊임없이 저항하였고, 그것은 신채호가 <조선혁명선언>에서 밝힌 대로 “인류로서 인류를 압박하지 못하며, 사회로서 사회를 박탈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항일 민족 운동의 참모습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참 모습은 전 인류 사회가 저항하는 보편적 가치에 부합되는 것입니다. 그 속에는 분단도 독재도 없었고, 친일도 반공도 없었습니다. 부의 독점과 불공정한 경쟁도 없었습니다. 그 참모습을 기억하고 이어가는 것이야말로 역사가 오늘날 우리에게 부여한 사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 한국근현대사 (두리미디어) 김인기, 조왕호 지음
독립만세의 물결은 나라 밖으로도 확산되었습니다. 만주, 연해주 등 동포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에서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미국의 필라델피아에서는 미주 지역 동포들이 모여 3일간 한인 자유 대회를 개최하고 시가행진을 벌이기도 하였습니다. 일본에서도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위가 전개되었습니다.
(4) 성공인가 실패인가
31운동에서 조선인은 용감히 일어나 치열하게 투쟁하였고 숭고하게 희생하였습니다. 일제의 총칼에도 꺾이지 않는 불굴의 독립의지를 전 세계에 천명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31운동은 성공을 한 것일까요. 아니면 실패한 것일까요.
당장 독립을 쟁치하지 못했다는 관점에서 보면 31운동은 실패한 민족 운동입니다. 물론 그 가장 큰 이유는 일제가 군대와 경찰을 동원하여 조선인의 정당한 요구를 무자비하게 탄압하였기 때문입니다. 경기도 화성의 제암리 학살 사건이 그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그러나 31운동이 지닌 자체적 한계도 지적됩니다. 31운동은 전 민족적인 에너지를 분출하였지만 조직적이고 통일적인 항일 투쟁으로 발전하지는 못하였습니다. 민족 대표들은 평화로운 만세 시위를 대규모로 전개하고 이를 바탕으로 국제 여론에 호소하여 독립을 쟁취하려 하였습니다. 하지만 민족 자결주의는 신기루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세계의 여론은 한국을 동정하고 일제를 비난하였지만 독립을 이룰 수 있는 국제적 여건은 조성되지 않았습니다. 각종 국제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거나 일본에 국권 반환을 요구하는 것은 헛수고였습니다.
어렵고 현학적 표현으로 쓰인 [기미독립선언문]에도 독립의 의지만을 천명하였을 뿐, 일제의 수탈 정책에 대한 비판이나 민중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내용은 전혀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독립을 위해 민중들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도 제시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농민, 노동자 등 민중을 포함한 전 민족의 역량을 충분히 결집하고 이를 바탕으로 일제를 직접 타도하려는 시도를 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31운동은 일제의 식민 통치에 막대한 타격을 주었고, 우리 민족의 독립 운동을 좀 더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전개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성공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우선 나라 밖에서 무장 독립 전쟁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평화적 만세 시위나 산발적인 폭력 투쟁만으로 일제를 몰아내고 독립을 쟁취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한 많은 청년들이 만주, 연해주로 망명하여 독립군에 가담하였기 때문입니다. 일제의 식민 통치 방식도 변화시켰습니다. 즉 일제는 폭압적인 ‘무단 정치’를 포기하고 이른바 ‘문화 정치’를 표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헌병 경찰의 무력만으로는 한국인의 독립 운동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겉으로나마 유화적인 정책을 내놓은 것입니다. 하지만 문화 정치의 본질은 친일파를 양성하여 민족을 분열시키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밖에도 31운동은 중국 54운동, 인도의 비폭력 불복종 운동을 비롯하여, 베트남, 필리핀, 이집트의 독립 운동에도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1919년 전개된 중국의 54운동의 격문을 보면 ‘조선은 독립을 꾀하여 독립하지 못하면 차라리 죽겠다고 했다.’고 하면서 민중의 궐기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결론.
만주의 허허 벌판은 이때부터 흰 옷 입은 우리 민족들로 덮여 갔다. 멀리서 서로 쳐다만 봐도 든든했다. 이렇게 되자 애국지사들은 한인 자치 단체를 만들어 엄격한 규율을 세우고 학교도 세웠다. 일본에 빼앗기 나라를 도로 찾을 때까지 만주 땅에다 한 개의 작은 나라를 만들어 운영한 셈이었다. 소학교는 거리 따라 많이 세우고 중학교는 드문드문 세웠다.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중 허은 지음 (정우사)
이 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만주연해주 일대에 건설된 독립운동기지에는 공통적으로 민족 학교가 설립되었으며, 동포 사회를 이끌어 가는 자치 단체가 조직되었다. 민족 학교에서는 애국심을 일깨우면서 군사 교육도 실시하여 독립 전쟁의 기초를 다졌다. 자치 단체들은 한인 동포 사회를 이끌어 가는 민정 조직과 더불어 독립군 양성과 작전을 담당하는 군정 조직을 갖추고 있어서 마치 하나의 작은 자치 정부와 비슷하였다. 남만주 삼원보를 중심으로 활동한 한족회의 민정 조직을 보면 삼권 분립의 원칙이 적용된 중앙 조직뿐만 아니라, 교포 사회를 효율적으로 이끌어 가기 위한 지방 조직도 갖추고 있었는데 큰 마을에는 천가장을 두고 그 아래에 백기장을, 다시 십가장을 두어 동포 사회를 관할하였다.
앞의 인용 글의 저자 허은 여사는 남만주 상원보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한족회를 이끌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령도 역임하였던 석주 이상룡 선생의 손주며느리이다. 친정은 1908년 의병들의 서울 진공 작전을 이끌었던 왕산 허위 선생의 집안이다.
일제의 조선 강점은 우리 민족에게 더할 수 없는 부끄러움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러나 ‘만세의 함성’을 통해 부끄러움은 새로운 세상을 만들 희망의 싹으로 자라났습니다. 일제의 강압과 수탈에 맞서 우리 민족은 끊임없이 저항하였고, 그것은 신채호가 <조선혁명선언>에서 밝힌 대로 “인류로서 인류를 압박하지 못하며, 사회로서 사회를 박탈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항일 민족 운동의 참모습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참 모습은 전 인류 사회가 저항하는 보편적 가치에 부합되는 것입니다. 그 속에는 분단도 독재도 없었고, 친일도 반공도 없었습니다. 부의 독점과 불공정한 경쟁도 없었습니다. 그 참모습을 기억하고 이어가는 것이야말로 역사가 오늘날 우리에게 부여한 사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 한국근현대사 (두리미디어) 김인기, 조왕호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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