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우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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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기독교의 우월성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이슬람, 기독교와 무엇이 다른가
2. 기독교(基督敎)와 천주교(天主敎)의 교리 비교(敎理 比較)
3. 기독교와 가톨릭 비교

본문내용

을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요구되는 만큼 다른 이들과 차별성 있게 살아간다면, 그를 바라보는 그들의 마음에는 의문이 떠오르게 될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인이 그런 의문을 예리하게 다듬어 줄 수 있는 기회가 된다.”(스티븐 닐을 인용)
개혁주의신학의 대표적 인물로 영역 주권론을 강조하며 네덜란드 수상을 역임했던 칼빈주의자 아브라함 카이퍼(1837-1920)가 가톨릭교회에 속한 수녀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마더 테레사(1910-1997)를 리차드 마우의 사상에서 만났다. 물론 이 두 사람이 리차드 마우의 신앙과 삶 속에서 만나 기독교적 정중하고 예의 바른 시민교양을 형성하였다는 말이다.
“카이퍼는 승리하신 왕 곧 권능으로 하늘의 보좌에 승천하신 왕에게 초점을 맞추기를 좋아했다. 테레사 수녀는 아직도 가난한 자와 억압받는 자 가운데서 고통 받고 있는 우리의 구원자를 찾으라고 요청한다. 서로 다른 방식이긴 해도 두 사람 모두 그 승리의 주님을 섬기는 데 헌신하도록 요청하고 있다. 우리가 시민교양을 계발하려면 두 사람 모두에게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들도 서로의 말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아브라함 카이퍼, 테레사 수녀를 만나다!”
그렇다면 마우에게 있어 실질적으로 기독교인이 가톨릭 교인을 만나는 일은 불교도나 이슬람을 만나는 일과는 뭔가 구별이 되고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8) 맺는말
개신교와 가톨릭교회의 신학적 관계를 종교개혁 당시와 오늘에 이르러서 몇 가지 역사적 사실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물론 가톨릭교회와 개신교는 1517년 이전까지는 분명 하나였다. 아니 단지 하나의 교회일 뿐이었다. 물론 오늘에도 개신교와 가톨릭교회는 같은 사도신경을 암송하고 있으며, 하나의 교회(una sacta catholica ekklesia)를 고백하고 있다. 종교개혁자들 역시 마지막까지 교회가 분열하기 보다는 보다 바른 개혁된 그 하나의 교회이길 갈망했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 24년이 지난 1541년 시점에서도 앞에 언급한 대로 두 측의 사람들은 하나의 교회를 위해 노력했다. 그렇지만, 칭의론에서 두 측은 결코 하나 될 수 없음을 확인하였고, 결정적으로 다른 길을 가야만 했다. 성찬에 대한 이해도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럼에도 칼빈은 그 구 신앙 안에도 바른 신앙을 가진 그루터기 교회가 존재함을 끝까지 믿었고, 가톨릭교회의 세례에도 정당성을 부여하길 잊지 않았는데, 세례를 주는 자는 성삼위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개신교와 가톨릭교회와의 오늘에 이르러서까지도 법적 관계는 가톨릭교회의 영세를 개신교가 인정하고 있는 점이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될 수 있다. 더 엄격하게 말하면 많은 부분 다른 구원관에도 불구하고 세례의 목적과 효능은 불변함을 믿었다는 말이다. 물론 감리교와 루터교 등 최근 구원론에 공동성명에 이른 것은 많은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공통점이 있다고 믿기 때문인 점에는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고 독일 루터교 안에서도 분명하게 말하면 대다수가 합의에 이를 수 없었던 것을 보면, 차이점과 한계점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16세기 종교개혁의 교회가 분리되며 믿는 바 ‘전가된 의’가 가톨릭교회의 입장 ‘내재된 의’의 관점에서 보다 명료하게 인정을 받아야만 두 측의 칭의론이 합의에 이를 수 있음을 인식할 때 제2바티칸 공의회의 추구였던 교회일치주의에서 나온 무리한 행동으로 밖에 더 이상 볼 수 없다. 물론 감리교의 구원관이 어쩌면 다른 교파보다는 상당부분 가톨릭교회의 구원관과 공통점을 이루기에 공동성명이 나올 수 있었던 점은 인정한다. 그렇지만 오늘 한국교회가 영성신학을 강조하며 도입하고 벤처마킹해온 수도원운동적 영성훈련 프로그램으로 가져온 TD, 관상기도 등은 종교개혁 신학의 필터링을 이뤄져야 함이 옳다. 그런 후 수정 보완하여 한국교회의 프로그램으로 재정립하여 활용함이 바람직하다. 무분별하고 무질서한 도입은 혼란을 가중시킬 수 있고, 심지어는 잘못된 신앙에 빠질 위험이 없지 않다. 게다가 가톨릭교회가 칭의론에 있어 분명한 차이점이 두 측간에 있음을 알면서도 무리한 시도를 감행한 것은 제2바티칸공의회의 신학적 입장과도 상관성이 있다 하겠다. 유대교와 이슬람까지를 포함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생각하는 바, 그들의 입장이라면 종교개혁의 구원관이 결정적으로 다름을 알면서도 교회일치주의라는 또 다른 관점에서 이를 시행하고자 하였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가톨릭교회를 중심으로 세계교회를 하나로 묶어보려는 마음이 엄격하게 교리를 따지기 보다는 앞서고 있다는 말이다.
한국교회는 가톨릭교회와 어떤 관계를 갖는 것이 바람직할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불교도와 이슬람을 대하는 것과는 보다 근원적 구별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1517년 종교개혁 이전까지 우리는 하나의 교회였다. 게다가 가톨릭교회의 세례를 법적으로 인정하는 것을 보아서도 그렇다. 또한 가톨릭교회 안에 여전히 구원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존재함을 믿는 신앙도 다르지 않다. 이러한 역사적 법적 관계는 가톨릭교회를 보는 한 개인의 신념이나 소신, 철학과는 상이할 수 있다. 물론 우리가 가진 신학이나 신앙을 저버리거나 무시할 때 우리가 예의 바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우리가 가진 강한 신념이나 신앙 때문에 우리가 무례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옳지 않다. 종교개혁 신앙에 굳건히 서서 우리는 예의바른 시민교양의 소유자로서 가톨릭교회를 바라보고 대화하며 관계를 가져야 한다. 그럼에도 여기서 잊지 않아야 할 사실은, 신념을 수반한 교양은 힘써 노력해야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확고한 신념과 시민정신을 두루 갖춘 사람을 많이 배출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교양 있는 사람들이 더 확고한 신념을 갖도록 돕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강한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더욱 교양을 갖추도록 돕는 것이다. 혹은 둘 다 하는 것인데, 각각의 전략이 모두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시민교양을 갖추면 더욱 강한 신앙을 소유한 기독교적 신앙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확실히 요구되는 덕목은 관용이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빌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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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3.13
  • 저작시기2012.0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82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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