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를 살펴야 했다.(왕하16:18)베가가 죽은 후 이스라엘은 얼마간 더 독립을 유지했으나 앗수르왕 사르곤에게 수도 사마리아는 함락되었다.(B.C.722, 왕하17) 그 후 앗수르는 계속 강대국으로 남아 있으면서 산헤립(B.C.704-681)과 에살히돈(B.C.681-669)과 앗수바니팔(B.C.669-626)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마침내 메데와 갈대아의 연합군에 의하여 망하게 되었는데(B.C.612) 그것은 유다의 요시야왕(B.C.640-608) 때였다.
제2편 이스라엘의 분열과 반역(Ⅱ)
기원전 722년에 북방 이스라엘이 멀망한 후에도 남방 유다는 B.C.586까지 계속되었다. 그 역사적 배경은 남방 유다나 북방 이스라엘이 거의 비슷하다. 계속적인 앗수르의 위협과 남북관계의 충돌과 선지자들의 활동은 남북간의 차이가 별로 없다. 그리고 남방 유다와 에돔과의 관계는 또 북방 이스라엘과 다메섹(아람)과의 관계와 비슷하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북방 이스라엘은 여러 차례 왕조가 바뀌었으나 남방 유다는 다윗 왕조로서 다윗왕가가 일관하였다는데 있다. 남방유다도 일시 아합왕의 딸인 아달랴가 유다왕국을 지배한 때가 있다. 그러나 비록 그때에도 숨어 자라던 요아스가 7년만에 표면에 나타나서 왕위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제1장 남북 투쟁시대의 유다왕국 (B.C.931-870, 왕상14:21-15:24, 대하10-16)
처음 여로보암이 분열할 당시에는 르호보암을 따른 지파는 오직 유다뿐이었다. (왕상12:20) 맨처음 베냐민 지파는 아마도 여로보암을 좆은 것 같다. 역사적으로도 베냐민은 항상 남방 유다보다도 북방 지파들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이제 베냐민은 르호보암에게로 돌아와서 우다와 합하게 되었다. 여로보암은 선지자 아히야의 예언과 같이 열 지파를 소유하게 되었다.(왕상11:31) 이처럼 베냐민이 돌아온 것은 유다와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었고 따라서 르호보암의 압력이 크게 작용하였을 것으로 본다. 여로보암은 나라를 세운 후 그가 금송아지의 우상을 만들고 또 백성들이 예루살렘을 사모하여 가지 못하도록 절기도 유다와 비슷하게 정하였다. 이러한 율법을 어긴 행위는 레위 제사장들의 불평을 샀을 것은 분명한 일이다. 그러므로 여로보암은 그들로 제사장 직분을 하지 못하도록 금하고 스스로 제사장을 세울 때 레위 족속들은 르호보암에게로 돌아왔고 또 다른 지파들 중에서도 여호와를 구하는 진실한 사람들에 레위 족속을 따라 유다로 넘어왔음으로 르호보암의 세력은 강화되었다.(대하11:13-17)
1. 분열 유다의 첫 왕 르호보암과 애굽의 침략
1)르호보암(B.C.931-913, 왕상14:21-31, 대하10-12)
르호보암은 41세에 왕위에 올라 예루살렘에서 17년간 다스렸다. 그는 그 신앙에 있어서 조부 다윗을 따른 것이 아니라 그 아비 솔로몬의 말기의 영향을 받아 문란하도록 우상을 섬겼다. 그가 그처럼 신앙적으로 타락한 것은 그 어머니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본다. 그는 위에 오르면서부터 큰 전쟁들로 시달려야 했다. 먼저 이스라엘과의 사이에는 계속 전쟁이 있었다(왕상14:30) 그는 유다와 베냐민 지파에서 용사 18만을 뽑아 여로보암을 쳐서 남과 북을 통일하려 했으나 선지자 스마야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금하셨다. 여로보암의 나라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임을 가르쳤다. (대하11:1-4) 그러나 계속되는 전쟁은 주로 국경분쟁이었던 것으로 본다. 그는 전쟁을 위하여 요새지와 양식과 무기를 갖추고 있었는데 그것은 블레셋과 애굽을 겨냥한 듯하다. 애굽의 침략은 르호보암에게 큰 고통이었다. (왕상14:25,26)
2)시삭의 침략(왕상14:25-27, 대하12:2-12)
르호보암 5년에 애굽의 시삭(B.C.945-924)의 예루살렘의 침략은 그의 교만을 징벌하기 위한 하나님의 징계였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대하12:1,2,5, 7-8) 그가 왕위에 오른 3년 동안은 온 유다가 모두 다윗과 솔로몬의 길을 걸었다.(대하11:17) 북방 이스라엘 지파들 중에서도 경건한 자들과 레위 족속들이 힘써 남방유다를 도왔고 그들은 더욱 경건한 신앙의 길을 걸었다. 그 동안 유다는 강성해 졌다. 그러나 그것은 3년을 넘기지 못했다.(대하11:16,17) 애굽 시삭의 침략을 받게 된 것이다. 그는 솔로몬을 피하여 간 여로보암에게 피난처를 제공하여 주었던 왕이다. (왕상11:40) 그가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왔을 때 르호보암은 성전의 보물과 왕궁의 보물은 물론이요, 솔로몬 때에 만든 금방패까지 다 빼앗겼다.(왕상14:26, 대하12:9) 물론 그것은 르호보암이 시삭에게 조공으로 바친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그는 겨우 유다의 독립을 유지했고, 예루살렘에서 원수들이 물러 가게 했다. 그러나 시삭의 침략으로 인하여 르호보암과 온 유다가 얼마나 어려웠던가 함은 선지자 스마야를 통하여 들려주신 말씀에서 짐작할 수 있다.(대하12:4-8) 시삭의 침략은 유다의 르호보암뿐만 아니라 북방 이스라엘도 많은 손해를 입었음은 시삭의 전승비가 므깃도에 세워졌다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의 점령 도성들의 이름 중에 므깃도를 위시하여 북방 이스라엘의 도성들의 이름이 들어 있다. 그러나 당시 여로보암의 수도였던 세겜(왕상12:25)이 빠져 있다. 그는 북방 이스라엘에도 그의 정치적 또는 경제적 힘을 확대하려 했으나 여로보암을 굴복시키려는 의도는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시삭의 후계자들은 그의 권세를 계속 유지할 수는 없었다. 팔레스틴에서의 애굽의 세력은 그후 점점 물러갔다.
2. 여로보암을 이긴 아비야왕 (B.C.913-911, 왕상15:1-8, 대하13:1-22)
르호보암은 17년을 다스린 후 그 아들 아비야가 대신 왕이 되었다. 그는 3년을 다스렸다. 그는 르호보암의 죄를 버리지 못했다 하였지만(왕하15:3)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허락한 등불을 기억하시고 그에게 은혜를 입혀 예루살렘을 견고케 해 주셨다고 했다.(왕상15:4, 왕상11:13,36) 그러므로 북방 이스라엘과의 치열한 전투에서 아비야는 가장 중요한 이스라엘의 남쪽 종교 중심지인 벧엘을 점령했고 몇 성읍과 마을을 빼앗았다.(대하13:19) 여로보암은 계속 그 앞에서
제2편 이스라엘의 분열과 반역(Ⅱ)
기원전 722년에 북방 이스라엘이 멀망한 후에도 남방 유다는 B.C.586까지 계속되었다. 그 역사적 배경은 남방 유다나 북방 이스라엘이 거의 비슷하다. 계속적인 앗수르의 위협과 남북관계의 충돌과 선지자들의 활동은 남북간의 차이가 별로 없다. 그리고 남방 유다와 에돔과의 관계는 또 북방 이스라엘과 다메섹(아람)과의 관계와 비슷하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북방 이스라엘은 여러 차례 왕조가 바뀌었으나 남방 유다는 다윗 왕조로서 다윗왕가가 일관하였다는데 있다. 남방유다도 일시 아합왕의 딸인 아달랴가 유다왕국을 지배한 때가 있다. 그러나 비록 그때에도 숨어 자라던 요아스가 7년만에 표면에 나타나서 왕위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제1장 남북 투쟁시대의 유다왕국 (B.C.931-870, 왕상14:21-15:24, 대하10-16)
처음 여로보암이 분열할 당시에는 르호보암을 따른 지파는 오직 유다뿐이었다. (왕상12:20) 맨처음 베냐민 지파는 아마도 여로보암을 좆은 것 같다. 역사적으로도 베냐민은 항상 남방 유다보다도 북방 지파들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이제 베냐민은 르호보암에게로 돌아와서 우다와 합하게 되었다. 여로보암은 선지자 아히야의 예언과 같이 열 지파를 소유하게 되었다.(왕상11:31) 이처럼 베냐민이 돌아온 것은 유다와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었고 따라서 르호보암의 압력이 크게 작용하였을 것으로 본다. 여로보암은 나라를 세운 후 그가 금송아지의 우상을 만들고 또 백성들이 예루살렘을 사모하여 가지 못하도록 절기도 유다와 비슷하게 정하였다. 이러한 율법을 어긴 행위는 레위 제사장들의 불평을 샀을 것은 분명한 일이다. 그러므로 여로보암은 그들로 제사장 직분을 하지 못하도록 금하고 스스로 제사장을 세울 때 레위 족속들은 르호보암에게로 돌아왔고 또 다른 지파들 중에서도 여호와를 구하는 진실한 사람들에 레위 족속을 따라 유다로 넘어왔음으로 르호보암의 세력은 강화되었다.(대하11:13-17)
1. 분열 유다의 첫 왕 르호보암과 애굽의 침략
1)르호보암(B.C.931-913, 왕상14:21-31, 대하10-12)
르호보암은 41세에 왕위에 올라 예루살렘에서 17년간 다스렸다. 그는 그 신앙에 있어서 조부 다윗을 따른 것이 아니라 그 아비 솔로몬의 말기의 영향을 받아 문란하도록 우상을 섬겼다. 그가 그처럼 신앙적으로 타락한 것은 그 어머니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본다. 그는 위에 오르면서부터 큰 전쟁들로 시달려야 했다. 먼저 이스라엘과의 사이에는 계속 전쟁이 있었다(왕상14:30) 그는 유다와 베냐민 지파에서 용사 18만을 뽑아 여로보암을 쳐서 남과 북을 통일하려 했으나 선지자 스마야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금하셨다. 여로보암의 나라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임을 가르쳤다. (대하11:1-4) 그러나 계속되는 전쟁은 주로 국경분쟁이었던 것으로 본다. 그는 전쟁을 위하여 요새지와 양식과 무기를 갖추고 있었는데 그것은 블레셋과 애굽을 겨냥한 듯하다. 애굽의 침략은 르호보암에게 큰 고통이었다. (왕상14:25,26)
2)시삭의 침략(왕상14:25-27, 대하12:2-12)
르호보암 5년에 애굽의 시삭(B.C.945-924)의 예루살렘의 침략은 그의 교만을 징벌하기 위한 하나님의 징계였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대하12:1,2,5, 7-8) 그가 왕위에 오른 3년 동안은 온 유다가 모두 다윗과 솔로몬의 길을 걸었다.(대하11:17) 북방 이스라엘 지파들 중에서도 경건한 자들과 레위 족속들이 힘써 남방유다를 도왔고 그들은 더욱 경건한 신앙의 길을 걸었다. 그 동안 유다는 강성해 졌다. 그러나 그것은 3년을 넘기지 못했다.(대하11:16,17) 애굽 시삭의 침략을 받게 된 것이다. 그는 솔로몬을 피하여 간 여로보암에게 피난처를 제공하여 주었던 왕이다. (왕상11:40) 그가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왔을 때 르호보암은 성전의 보물과 왕궁의 보물은 물론이요, 솔로몬 때에 만든 금방패까지 다 빼앗겼다.(왕상14:26, 대하12:9) 물론 그것은 르호보암이 시삭에게 조공으로 바친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그는 겨우 유다의 독립을 유지했고, 예루살렘에서 원수들이 물러 가게 했다. 그러나 시삭의 침략으로 인하여 르호보암과 온 유다가 얼마나 어려웠던가 함은 선지자 스마야를 통하여 들려주신 말씀에서 짐작할 수 있다.(대하12:4-8) 시삭의 침략은 유다의 르호보암뿐만 아니라 북방 이스라엘도 많은 손해를 입었음은 시삭의 전승비가 므깃도에 세워졌다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의 점령 도성들의 이름 중에 므깃도를 위시하여 북방 이스라엘의 도성들의 이름이 들어 있다. 그러나 당시 여로보암의 수도였던 세겜(왕상12:25)이 빠져 있다. 그는 북방 이스라엘에도 그의 정치적 또는 경제적 힘을 확대하려 했으나 여로보암을 굴복시키려는 의도는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시삭의 후계자들은 그의 권세를 계속 유지할 수는 없었다. 팔레스틴에서의 애굽의 세력은 그후 점점 물러갔다.
2. 여로보암을 이긴 아비야왕 (B.C.913-911, 왕상15:1-8, 대하13:1-22)
르호보암은 17년을 다스린 후 그 아들 아비야가 대신 왕이 되었다. 그는 3년을 다스렸다. 그는 르호보암의 죄를 버리지 못했다 하였지만(왕하15:3)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허락한 등불을 기억하시고 그에게 은혜를 입혀 예루살렘을 견고케 해 주셨다고 했다.(왕상15:4, 왕상11:13,36) 그러므로 북방 이스라엘과의 치열한 전투에서 아비야는 가장 중요한 이스라엘의 남쪽 종교 중심지인 벧엘을 점령했고 몇 성읍과 마을을 빼앗았다.(대하13:19) 여로보암은 계속 그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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