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머리말
2. 사회적 변화
1) 신분적 변화
2) 임란으로 인한 사족층의 사회 집권 확립
3) 정치 ․ 군사제도의 개편
3. 경제적 변화
1) 부세정책의 변화
2) 농업생산력과 농촌사회의 변화
3) 서울의 인구 집중과 상업도시화
4) 일본과의 무역의 변화
5) 명, 청과의 무역의 변화
4. 맺음말
5. 초록
6. 참고문헌
2. 사회적 변화
1) 신분적 변화
2) 임란으로 인한 사족층의 사회 집권 확립
3) 정치 ․ 군사제도의 개편
3. 경제적 변화
1) 부세정책의 변화
2) 농업생산력과 농촌사회의 변화
3) 서울의 인구 집중과 상업도시화
4) 일본과의 무역의 변화
5) 명, 청과의 무역의 변화
4. 맺음말
5. 초록
6. 참고문헌
본문내용
란을 계기로 1609년 기유약조를 체결하기 전까지는 일본과의 국교가 단절된다. 김대길,『시장을 열지 못하게 하라』, 가람기획, 2000, p185
임란 이후, 17세기 초반 재개된 대일무역에 대한 우리 학계의 연구는 많지 않아 강만길,『조선후기사 연구의 현황과 과제』, 창작과비평사, 2000, p272
임란이 대일무역에 어떠한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는 확인이 쉽지 않다.(조선후기사 연구의 현황과 과제) 그런 가운데, 한명기의 은의 유통과정에 관한 연구는 임란 이후의 대일무역 관계 확인에 약간의 도움을 준다. 즉 그는 임란 중에 중국 은이 조선에서 중국으로 유출되었으며, 따라서 광해군대 국내에서 필요하나 은의 대부분은 잠상을 통해 일본에서 유입되고 있었음을 밝혔다. 은의 무역은 삼포왜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조선에서 일본으로 수출하던 품목중 하나였다. 그러던 것이 중종 37년(1542) 이후 은 제련 기술이 일본으로 전수되면서 일본의 순도가 높은 은 산출액이 급증하여 조선으로 대량 유입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17세기말부터 막부는 일본은의 해외 유출을 통제하기 시작함으로써 대일무역은 깊은 정체의 늪에 빠지게 된다. 국사편찬위원회,『한국사』, 1997, p471~472
5) 명, 청과의 무역의 변화
17세기는 양란 이후 조선을 비롯한 동아시아 3국의 외교 무역체제가 정비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대적 특성으로 인해 17세기 대외무역 연구는 주로 외교체제 정비에 따른 대외무역제도 검토에 치우친 경향을 보인다. 강만길,『조선후기사 연구의 현황과 과제』, 창작과비평사, 2000, p269
중국과의 무역은 대체로 사대관계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대외무역에서 커다란 변화가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것은 사무역이 공무역을 압도하게 된 것이다.
기존의 대중국 무역이 사신의 왕래를 통한 이른바 사행무역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늘어나는 민간인들의 수요를 충족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였기에, 개시무역이 그 해결책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중강개시가 처음 열렸던 것은 임란 중에 유성룡의 건의로 군량과 말을 조달할 목적으로 명나라에 요청하여 개설되었다. 그 후 조선은 중국 측 관리와 상인의 수세과정상 비리를 이유로 임란이 끝난 직후인 1601년 폐지됐다. 그러나 이번에는 명나라의 반발과 요청으로 이듬해 다시 개시되었다가 1609년 또다시 혁파되었다. 그런 가운데 후금이 국호를 청으로 개칭하고 중원을 지배하게 되면서, 중강개시는 1646년(인조 24)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여 연 2회 전례에 따라 중강에서 시행하게 되었다. 강만길,『조선후기사 연구의 현황과 과제』, 창작과비평사, 2000, p270
그러나 이 후 17세기 대청무역의 경우 병자호란을 기점으로 그 성향이 다르게 나타나고 있으며, 병자호란 이후 청국과의 외교적 안정에 따라 무역의 경제적 측면이 점차 부각 강만길,『조선후기사 연구의 현황과 과제』, 창작과비평사, 2000, p270~271
되었기에 임란의 영향으로 인해 발생했다고 하기에는 어렵다고 본다. 다만, 개시 치폐에 대한 구체적인 인과관계적 분석과 개시에 참여한 상인에 대한 분석 및 병자호란 이후 개시의 실상 등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가 구체적으로 분석되지 않은 현 시점에서, 명 청과의 무역에 임란이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고 섣불리 단정 지을 수는 없다.
4. 맺음말
임진왜란사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일제의 한반도 식민지화와 때를 같이한 1910년대의 일이다. 주로 일본 관학자들에 의해 주도된 이 분야의 연구는 이께우찌 히로시가 『문록경장의 역』목차에서 사용한 '경성진격', '평양점령', '황해도경략' 등의 용어가 말해주듯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을 당당하게 서술하고 이를 학술적으로 뒷받침하여 과시하려는 의도까지 풍기고 있다.
이와 같이 일제강점기에 정복전쟁사의 시작으로 연구되기 시작한 임진왜란사는 해방 후 국내학자들에 의해 지난날과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새로운 연구가 진행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1960년대부터 조선시대의 임란 이후의 후기 시대를 자본주의 맹아론, 내재적 발전론이 새로운 역사해석의 방식으로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러한 해석 방법에 대해 옭고 그름을 현재에는 정확하게 판별할 수는 없다. 국내의 임란에 관한 연구는 아직 많지 않은 것이 사실이고, 조선시대의 사회상에 대해 역사적 사료를 통해 분석하기에는 그 사료 또한 부족한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17세기 이후의 조선시대를 명확히 확인하기 위해서는 임진왜란이 조선시대의 경제적, 사회적 구조에 어떠한 영향을 주게 되었는지 다시 한번 확인해볼 필요성이 있다.
5. 초록
임진왜란이 조선사에 어떤 영향을 이끌었는지에 대해, 일제시기의 일본인 학자들은 조선사회는 임란을 겪으면서 사회체제가 급격하게 붕괴, 해체되었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그렇지만 1960년대 이후 자본주의 맹아론, 내재적 발전론이 역사해석의 새로운 조류로 부상하게 됨에 따라 전란 이후 시기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 인식은 불식되기 시작했다. 전란 이후의 변화상은 자본주의 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사회현상을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세를 이루게 된 것이다. 이러한 주장들을 다시 한 번 돌아보고 확인하기 위해서는 임란이 조선사회에 미친 영향을 더욱 면밀히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임란으로 인한 신분제의 변화나 사족층의 득세, 정치 군사제도의 개편 등의 사회적 변화와 부세정책의 변화, 농업생산력과 농촌사회의 변화 대외 무역의 변화 등의 경제적 변화를 여러 서적을 통해 확인하여, 임란으로 인한 17세기 이후의 조선후기를 고찰하였다.
6. 참고문헌
- 강만길,『조선후기사 연구의 현황과 과제』, 창작과비평사, 2000
- 김대길,『시장을 열지 못하게 하라』, 가람기획, 2000
- 국사편찬위원회,『한국사』, 1997
- 김성우,『조선중기 국가와 사족』, 역사비평사, 2001
- 한일관계사연구논집 편찬위원회,『임진왜란과 한일관계』, 경인문화사, 2005
- 한국역사연구회,『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사회, 경제생활 이야기』, 청년사, 2005
임란 이후, 17세기 초반 재개된 대일무역에 대한 우리 학계의 연구는 많지 않아 강만길,『조선후기사 연구의 현황과 과제』, 창작과비평사, 2000, p272
임란이 대일무역에 어떠한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는 확인이 쉽지 않다.(조선후기사 연구의 현황과 과제) 그런 가운데, 한명기의 은의 유통과정에 관한 연구는 임란 이후의 대일무역 관계 확인에 약간의 도움을 준다. 즉 그는 임란 중에 중국 은이 조선에서 중국으로 유출되었으며, 따라서 광해군대 국내에서 필요하나 은의 대부분은 잠상을 통해 일본에서 유입되고 있었음을 밝혔다. 은의 무역은 삼포왜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조선에서 일본으로 수출하던 품목중 하나였다. 그러던 것이 중종 37년(1542) 이후 은 제련 기술이 일본으로 전수되면서 일본의 순도가 높은 은 산출액이 급증하여 조선으로 대량 유입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17세기말부터 막부는 일본은의 해외 유출을 통제하기 시작함으로써 대일무역은 깊은 정체의 늪에 빠지게 된다. 국사편찬위원회,『한국사』, 1997, p471~472
5) 명, 청과의 무역의 변화
17세기는 양란 이후 조선을 비롯한 동아시아 3국의 외교 무역체제가 정비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대적 특성으로 인해 17세기 대외무역 연구는 주로 외교체제 정비에 따른 대외무역제도 검토에 치우친 경향을 보인다. 강만길,『조선후기사 연구의 현황과 과제』, 창작과비평사, 2000, p269
중국과의 무역은 대체로 사대관계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대외무역에서 커다란 변화가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것은 사무역이 공무역을 압도하게 된 것이다.
기존의 대중국 무역이 사신의 왕래를 통한 이른바 사행무역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늘어나는 민간인들의 수요를 충족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였기에, 개시무역이 그 해결책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중강개시가 처음 열렸던 것은 임란 중에 유성룡의 건의로 군량과 말을 조달할 목적으로 명나라에 요청하여 개설되었다. 그 후 조선은 중국 측 관리와 상인의 수세과정상 비리를 이유로 임란이 끝난 직후인 1601년 폐지됐다. 그러나 이번에는 명나라의 반발과 요청으로 이듬해 다시 개시되었다가 1609년 또다시 혁파되었다. 그런 가운데 후금이 국호를 청으로 개칭하고 중원을 지배하게 되면서, 중강개시는 1646년(인조 24)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여 연 2회 전례에 따라 중강에서 시행하게 되었다. 강만길,『조선후기사 연구의 현황과 과제』, 창작과비평사, 2000, p270
그러나 이 후 17세기 대청무역의 경우 병자호란을 기점으로 그 성향이 다르게 나타나고 있으며, 병자호란 이후 청국과의 외교적 안정에 따라 무역의 경제적 측면이 점차 부각 강만길,『조선후기사 연구의 현황과 과제』, 창작과비평사, 2000, p270~271
되었기에 임란의 영향으로 인해 발생했다고 하기에는 어렵다고 본다. 다만, 개시 치폐에 대한 구체적인 인과관계적 분석과 개시에 참여한 상인에 대한 분석 및 병자호란 이후 개시의 실상 등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가 구체적으로 분석되지 않은 현 시점에서, 명 청과의 무역에 임란이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고 섣불리 단정 지을 수는 없다.
4. 맺음말
임진왜란사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일제의 한반도 식민지화와 때를 같이한 1910년대의 일이다. 주로 일본 관학자들에 의해 주도된 이 분야의 연구는 이께우찌 히로시가 『문록경장의 역』목차에서 사용한 '경성진격', '평양점령', '황해도경략' 등의 용어가 말해주듯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을 당당하게 서술하고 이를 학술적으로 뒷받침하여 과시하려는 의도까지 풍기고 있다.
이와 같이 일제강점기에 정복전쟁사의 시작으로 연구되기 시작한 임진왜란사는 해방 후 국내학자들에 의해 지난날과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새로운 연구가 진행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1960년대부터 조선시대의 임란 이후의 후기 시대를 자본주의 맹아론, 내재적 발전론이 새로운 역사해석의 방식으로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러한 해석 방법에 대해 옭고 그름을 현재에는 정확하게 판별할 수는 없다. 국내의 임란에 관한 연구는 아직 많지 않은 것이 사실이고, 조선시대의 사회상에 대해 역사적 사료를 통해 분석하기에는 그 사료 또한 부족한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17세기 이후의 조선시대를 명확히 확인하기 위해서는 임진왜란이 조선시대의 경제적, 사회적 구조에 어떠한 영향을 주게 되었는지 다시 한번 확인해볼 필요성이 있다.
5. 초록
임진왜란이 조선사에 어떤 영향을 이끌었는지에 대해, 일제시기의 일본인 학자들은 조선사회는 임란을 겪으면서 사회체제가 급격하게 붕괴, 해체되었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그렇지만 1960년대 이후 자본주의 맹아론, 내재적 발전론이 역사해석의 새로운 조류로 부상하게 됨에 따라 전란 이후 시기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 인식은 불식되기 시작했다. 전란 이후의 변화상은 자본주의 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사회현상을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세를 이루게 된 것이다. 이러한 주장들을 다시 한 번 돌아보고 확인하기 위해서는 임란이 조선사회에 미친 영향을 더욱 면밀히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임란으로 인한 신분제의 변화나 사족층의 득세, 정치 군사제도의 개편 등의 사회적 변화와 부세정책의 변화, 농업생산력과 농촌사회의 변화 대외 무역의 변화 등의 경제적 변화를 여러 서적을 통해 확인하여, 임란으로 인한 17세기 이후의 조선후기를 고찰하였다.
6. 참고문헌
- 강만길,『조선후기사 연구의 현황과 과제』, 창작과비평사, 2000
- 김대길,『시장을 열지 못하게 하라』, 가람기획, 2000
- 국사편찬위원회,『한국사』, 1997
- 김성우,『조선중기 국가와 사족』, 역사비평사, 2001
- 한일관계사연구논집 편찬위원회,『임진왜란과 한일관계』, 경인문화사, 2005
- 한국역사연구회,『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사회, 경제생활 이야기』, 청년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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