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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경력의 문예봉이 친일파척결을 외치던 북한에서, 항일 빨치산이 등장하고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를 다뤘던 영화 <<내 고향>>에 출연한 사실이다. 일제시기 식민지 동원체제의 표상이 되었던 그녀는 북한에서도 김일성 체제를 확고히 하는 선전의 상징이 되었다. 한국 전쟁이후 윤봉춘은 안정적으로 남한 영화계의 행정 조직을 책임지며 영화계 발전에 기여했다. 문예봉은 김정일 이후에 과거만큼의 큰 영향력을 누리지는 못했지만 오랫동안 북한 영화계에서 명성을 유지했다.
자신의 신념 혹은 사회적 생존을 위해 각각 남과 북을 선택한 윤봉춘과 문예봉은 분단이라는 정치 현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분야에서 최선을 다했으나 의도치 않게 경쟁 구도로 각 체제를 대표하는 영화인이 되었다. 윤봉춘과 문예봉은 남북한 영화계의 토대를 닦은 중요한 인물들로 여겨지는 동시에 이데올로기적 모순을 안고 있는 셈이다.
한반도에서 현대 춤예술의 초석을 닦고 한국 춤을 세계적으로 알린 남북의 대표적 무용가에는 조택원과 최승희가 있다. 이들은 일본에서 현대무용을 전파했던 이시이 바쿠에게 춤을 배웠다. 조택원과 최승희는 근대적 춤예술이 전무하던 식민지 조선에서 한국적 특성의 춤을 알렸던 대표적인 신문화 무용가였다. 우수한 학업성적과 전통적 보수관의 반대를 뒤로하고 최승희는 15살의 나이에 춤에 입문했다. 그녀는 일본으로 가 이시이 바쿠 문하에서 수련하는 동시에 단원으로 활동하였고 이내 큰 인기를 얻었다. 조택원도 이시이 바쿠의 연출과 최승희의 춤에 매료되어 현대 춤 예술에 입문한다. 조택원과 최승희는 조선의 현실을 춤에 녹여내려고 노력했다.
일제시대 남편의 내조와 성공적인 국내외 공연으로 한류스타로 부상한 최승희는 매력적인 외모와 무용, 조선춤이라는 민족적 특성까지 겸비해 탄탄대로를 달렸다. 조택원도 무용연구소를 열고 무용발표회를 가지며 조선뿐만 아니라 일본, 파리 등에서 활발한 활동을 했다. 그러나 일제 말기로 가면서 여타의 예술인과 마찬가지로 최승희와 조택원도 자신의 예술활동을 지속하기 위해 일제에 협력하고 말았다.
해방 직후 친일 경력으로 인해 최승희는 어쩔 수 없이 남편 안막이 있는 북한으로 갔고 조택원은 보다 풍부하고 깊은 예술적 자양분을 얻기 위해 미국행을 결정함으로써 실제로 남한에 남게 되었다. 최승희가 김일성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북한과 중국에서 현대 무용의 기반을 마련하였고 중국과 북한 무용계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에 반해 조택원은 남한에서보다는 일본,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한국춤을 알리고 전수하는 활동을 벌였다. 1960년대 귀국한 조원택은 남한의 춤 행정에 깊이 관여하며 무용계의 기반을 닦았다.
분단 구조 속에서 한국춤은 외면받아왔다. 한국춤의 현재를 알고 끊임없는 발전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일제시대 최승희와 조택원으로부터 시작되었던 근대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더욱더 서양화되는 21세기의 문화 · 예술분야에서 진정 한국적인 특성을 살리고 선구자들의 업적을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실로 남과 북이 협력해야 할 때다.
자신의 신념 혹은 사회적 생존을 위해 각각 남과 북을 선택한 윤봉춘과 문예봉은 분단이라는 정치 현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분야에서 최선을 다했으나 의도치 않게 경쟁 구도로 각 체제를 대표하는 영화인이 되었다. 윤봉춘과 문예봉은 남북한 영화계의 토대를 닦은 중요한 인물들로 여겨지는 동시에 이데올로기적 모순을 안고 있는 셈이다.
한반도에서 현대 춤예술의 초석을 닦고 한국 춤을 세계적으로 알린 남북의 대표적 무용가에는 조택원과 최승희가 있다. 이들은 일본에서 현대무용을 전파했던 이시이 바쿠에게 춤을 배웠다. 조택원과 최승희는 근대적 춤예술이 전무하던 식민지 조선에서 한국적 특성의 춤을 알렸던 대표적인 신문화 무용가였다. 우수한 학업성적과 전통적 보수관의 반대를 뒤로하고 최승희는 15살의 나이에 춤에 입문했다. 그녀는 일본으로 가 이시이 바쿠 문하에서 수련하는 동시에 단원으로 활동하였고 이내 큰 인기를 얻었다. 조택원도 이시이 바쿠의 연출과 최승희의 춤에 매료되어 현대 춤 예술에 입문한다. 조택원과 최승희는 조선의 현실을 춤에 녹여내려고 노력했다.
일제시대 남편의 내조와 성공적인 국내외 공연으로 한류스타로 부상한 최승희는 매력적인 외모와 무용, 조선춤이라는 민족적 특성까지 겸비해 탄탄대로를 달렸다. 조택원도 무용연구소를 열고 무용발표회를 가지며 조선뿐만 아니라 일본, 파리 등에서 활발한 활동을 했다. 그러나 일제 말기로 가면서 여타의 예술인과 마찬가지로 최승희와 조택원도 자신의 예술활동을 지속하기 위해 일제에 협력하고 말았다.
해방 직후 친일 경력으로 인해 최승희는 어쩔 수 없이 남편 안막이 있는 북한으로 갔고 조택원은 보다 풍부하고 깊은 예술적 자양분을 얻기 위해 미국행을 결정함으로써 실제로 남한에 남게 되었다. 최승희가 김일성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북한과 중국에서 현대 무용의 기반을 마련하였고 중국과 북한 무용계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에 반해 조택원은 남한에서보다는 일본,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한국춤을 알리고 전수하는 활동을 벌였다. 1960년대 귀국한 조원택은 남한의 춤 행정에 깊이 관여하며 무용계의 기반을 닦았다.
분단 구조 속에서 한국춤은 외면받아왔다. 한국춤의 현재를 알고 끊임없는 발전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일제시대 최승희와 조택원으로부터 시작되었던 근대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더욱더 서양화되는 21세기의 문화 · 예술분야에서 진정 한국적인 특성을 살리고 선구자들의 업적을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실로 남과 북이 협력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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