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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음.
본문내용
과 남인의 연립정권은 양란으로 와해된 조선사회를 재건하기 위해 국가의 기본방향을 도덕국가문화국가로 설정하여 밀고 나간다. - 정옥자, 1998 조선후기 조선중화사상연구, 일지사, 11쪽 참조.
으로 실패하였다. 반정세력은 화이론에 입각해 당시 국제질서의 변화에 대응했지만 결국 병자호란을 초래하였다. 이 전쟁에서의 패배는 조선을 청 중심의 세계질서 속에 편입시켰으나 명 중심의 천하관은 계속 조선지배층의 관념 속에서 작동하고 있었다.
중화인 명이 멸망하자 조선은 명의 연호인 숭정(崇禎)을 사용하고 대보단(大報壇) 조선시대에 명(明)나라 태조(太祖) ·신종(神宗) ·의종(毅宗)을 제사지낸 사당. 임진왜란 때 원군을 보낸 신종의 은의(恩義)를 기리기 위해 1705년(숙종 31) 창덕궁 금원(禁苑) 옆에 설치하였다. 처음에는 신종의 위패만 존치하여 제사지냈으나, 영조 때에 명나라 태조와 명나라 마지막 임금인 의종까지 합사(合祠)하였다.-네이버 백과사전 인용.
을 세우며 자신들만이 명의 적통을 이은 중화문화의 계승자인 동시에 수호자임을 과시하였다. 나아가 명이 없는 동아시아에서 중화문화를 계승하고 있는 곳은 조선뿐이므로 조선이 곧 중화라는 조선중화주의을 제창하였다. 소중화의식이 조선중화의식으로 전환된 것이다. 정옥자, 1998 조선후기 조선중화사상연구, 일지사., 9-25쪽 참조.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문화대국으로 성장한 청에게 다시 중화의 자리를 양보하고 그 중화의 문화를 배워야만 했으며 그 과정에서 종족 중심의 화이론은 문화 중심의 화이론으로 바뀌어 갔다. 유봉학, 1995 燕巖一派 北學思想 硏究, 일지사, 124-143쪽 참조.
이처럼 전근대 한국 민족의 세계와 자기 인식 과정은 자국 중심의 천하관에서 화이론에 입각한 중국 중심의 천하관으로 변해가며 스스로를 천자의 국가에서 제후의 국가로 인식해 가는 과정 중국의 개념처럼 주 천자가 거주했던 경사(京師)에서 주 천자가 직접 통치하는 주왕조의 봉건적 영역으로, 또 마침내 춘추전국시대에는 제하세계 전체를 의미하게 되었다. 여기서 제하는 중국을 뜻하며 동시에 문화가 발달된 선진지역의 중국을 의미한다. - 李春植『中華思想의 理解』, 도서출판 신서원, 2002년, 127쪽 참조.
이라고 할 수 있다.
화이론적 천하관은 근대사회에 들어와서도 위정척사 조선 후기 유교적인 질서를 보존하고 외국세력 및 문물의 침투를 배척한 논리 및 운동. - 네이버 백과 사전 인용.
운동 등에서 일정한 기능을 하였으나 청일전쟁에서 청이 일본에 패한 뒤 한국과 중국 사이의 조공-책봉관계가 무너지면서 더 이상 주도권을 발휘할 수 없었다. 이제 중국은 더 이상 천하의 중심이 아니었고 더욱이 천하도 하나가 아니었다. 만국(萬國)의 세계가 도래한 것이다. 김기정, 1993 19세기 후반기 제국주의와 동아시아 1894년 농민전쟁연구(3), 역사비평사 재인용.
5. 나오는 말
상고시대부터 아편 전쟁 이전까지는 한족과 이족을 구분하여 한족 문화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화이사상이 중화사상의 본질로서 중국인을 지배했다. 하지만 아편 전쟁을 계기로 하여 중화사상은 그 의미가 새롭게 확대되어 중체서용론, 현대신유학, 중국식 사회주의 등에 사상적 기반으로 나타났다. 즉, 이전의 한족 문화의 우월성을 나타냈던 중화사상이 한족을 포함한 중국 곳곳에 퍼져있는 소수 민족까지 중화 민족이라는 더 큰 범주에 포함시킴으로써 외세에 대항하고 중화인과 서양인을 구별하는 의미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중화사상은 중국과 지리적으로 밀접해 있는 우리나라에 영향을 끼친다. 삼국 시대부터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은 시대에 따라 중화사상의 영향을 끊임없이 받지만 그 속에서 우리만의 민족 주체의식을 형성해 갔다.
21세기는 국가의 장벽이 허무어진 시대다. 그 속에서 나라와 나라, 민족과 민족의 경계는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중국은 이러한 세계 정세 속에서도 중국이라는 커다란 대륙과 민족이 가장 우월하다고 보는 민족 주체의식을 확고히 가지고 있다. 중화사상이라는 것이 중국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걸림돌이 될 수도 있지만 그들의 주체 의식을 갖는다는 것은 다른 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는 우리 나라로서는 본받을 점이 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알아본 이러한 중화사상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겨 보고, 현대의 중국인중국을 올바르게 파악하고 그에 맞게 대처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고구려 역사를 왜곡시키고 있는 중국에 대해서도 역사적 사실과 우리의 뚜렷한 주체의식으로 강경하게 대응해야 한다.
으로 실패하였다. 반정세력은 화이론에 입각해 당시 국제질서의 변화에 대응했지만 결국 병자호란을 초래하였다. 이 전쟁에서의 패배는 조선을 청 중심의 세계질서 속에 편입시켰으나 명 중심의 천하관은 계속 조선지배층의 관념 속에서 작동하고 있었다.
중화인 명이 멸망하자 조선은 명의 연호인 숭정(崇禎)을 사용하고 대보단(大報壇) 조선시대에 명(明)나라 태조(太祖) ·신종(神宗) ·의종(毅宗)을 제사지낸 사당. 임진왜란 때 원군을 보낸 신종의 은의(恩義)를 기리기 위해 1705년(숙종 31) 창덕궁 금원(禁苑) 옆에 설치하였다. 처음에는 신종의 위패만 존치하여 제사지냈으나, 영조 때에 명나라 태조와 명나라 마지막 임금인 의종까지 합사(合祠)하였다.-네이버 백과사전 인용.
을 세우며 자신들만이 명의 적통을 이은 중화문화의 계승자인 동시에 수호자임을 과시하였다. 나아가 명이 없는 동아시아에서 중화문화를 계승하고 있는 곳은 조선뿐이므로 조선이 곧 중화라는 조선중화주의을 제창하였다. 소중화의식이 조선중화의식으로 전환된 것이다. 정옥자, 1998 조선후기 조선중화사상연구, 일지사., 9-25쪽 참조.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문화대국으로 성장한 청에게 다시 중화의 자리를 양보하고 그 중화의 문화를 배워야만 했으며 그 과정에서 종족 중심의 화이론은 문화 중심의 화이론으로 바뀌어 갔다. 유봉학, 1995 燕巖一派 北學思想 硏究, 일지사, 124-143쪽 참조.
이처럼 전근대 한국 민족의 세계와 자기 인식 과정은 자국 중심의 천하관에서 화이론에 입각한 중국 중심의 천하관으로 변해가며 스스로를 천자의 국가에서 제후의 국가로 인식해 가는 과정 중국의 개념처럼 주 천자가 거주했던 경사(京師)에서 주 천자가 직접 통치하는 주왕조의 봉건적 영역으로, 또 마침내 춘추전국시대에는 제하세계 전체를 의미하게 되었다. 여기서 제하는 중국을 뜻하며 동시에 문화가 발달된 선진지역의 중국을 의미한다. - 李春植『中華思想의 理解』, 도서출판 신서원, 2002년, 127쪽 참조.
이라고 할 수 있다.
화이론적 천하관은 근대사회에 들어와서도 위정척사 조선 후기 유교적인 질서를 보존하고 외국세력 및 문물의 침투를 배척한 논리 및 운동. - 네이버 백과 사전 인용.
운동 등에서 일정한 기능을 하였으나 청일전쟁에서 청이 일본에 패한 뒤 한국과 중국 사이의 조공-책봉관계가 무너지면서 더 이상 주도권을 발휘할 수 없었다. 이제 중국은 더 이상 천하의 중심이 아니었고 더욱이 천하도 하나가 아니었다. 만국(萬國)의 세계가 도래한 것이다. 김기정, 1993 19세기 후반기 제국주의와 동아시아 1894년 농민전쟁연구(3), 역사비평사 재인용.
5. 나오는 말
상고시대부터 아편 전쟁 이전까지는 한족과 이족을 구분하여 한족 문화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화이사상이 중화사상의 본질로서 중국인을 지배했다. 하지만 아편 전쟁을 계기로 하여 중화사상은 그 의미가 새롭게 확대되어 중체서용론, 현대신유학, 중국식 사회주의 등에 사상적 기반으로 나타났다. 즉, 이전의 한족 문화의 우월성을 나타냈던 중화사상이 한족을 포함한 중국 곳곳에 퍼져있는 소수 민족까지 중화 민족이라는 더 큰 범주에 포함시킴으로써 외세에 대항하고 중화인과 서양인을 구별하는 의미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중화사상은 중국과 지리적으로 밀접해 있는 우리나라에 영향을 끼친다. 삼국 시대부터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은 시대에 따라 중화사상의 영향을 끊임없이 받지만 그 속에서 우리만의 민족 주체의식을 형성해 갔다.
21세기는 국가의 장벽이 허무어진 시대다. 그 속에서 나라와 나라, 민족과 민족의 경계는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중국은 이러한 세계 정세 속에서도 중국이라는 커다란 대륙과 민족이 가장 우월하다고 보는 민족 주체의식을 확고히 가지고 있다. 중화사상이라는 것이 중국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걸림돌이 될 수도 있지만 그들의 주체 의식을 갖는다는 것은 다른 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는 우리 나라로서는 본받을 점이 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알아본 이러한 중화사상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겨 보고, 현대의 중국인중국을 올바르게 파악하고 그에 맞게 대처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고구려 역사를 왜곡시키고 있는 중국에 대해서도 역사적 사실과 우리의 뚜렷한 주체의식으로 강경하게 대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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