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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이승만정부(제1공화국)의 출범, 정당, 이승만정부(제1공화국)의 민족주의, 통치조직, 이승만정부(제1공화국)의 불법계엄령(제주 4 3계엄령), 이승만정부(제1공화국)의 통일정책, 이승만정부(제1공화국)의 종교정책 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이승만정부(제1공화국)의 출범

Ⅲ. 이승만정부(제1공화국)의 정당

Ⅳ. 이승만정부(제1공화국)의 민족주의

Ⅴ. 이승만정부(제1공화국)의 통치조직

Ⅵ. 이승만정부(제1공화국)의 불법계엄령(제주 4 3계엄령)

Ⅶ. 이승만정부(제1공화국)의 통일정책
1. 정부수립 후 동란, 휴전까지
2. 제네바 회담이후 4․19 까지

Ⅷ. 이승만정부(제1공화국)의 종교정책

Ⅸ.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유니테리안봉사위원회(USC), 전재구호봉사회천주교국민후생협의회(WRSINCWC), 기독교청년회(YMCA), 기독교여자청년회(YWCA) 등 7개 단체가 있었다. 그리고 이 밖에도 아동구호연맹(SCFED) 등 종교와 간접적으로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이 되는 단체도 많이 있었다. 이들의 원조는 6.25동란 이후 파괴된 교회의 복구와 새로운 교회의 신축에 적절히 이용될 수 있었다. 그리고 1954년 12월 25일 창설된 기독교방송국도 선교국의 지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하였다. 따라서 기독교는 6.25동란으로 인해 오히려 성장할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와 같이 기독교를 통한 미국의 구호물자의 유입과 함께 미군정에서 시작된 기독교의 공인교 정책에 힘입어 미군정 당시 전체 인구의 2% 정도에 불과하였던 기독교(천주교 포함) 신자 비율이 1960년에는 전체 인구의 7.5%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Ⅸ. 결론
일본의 패전과 더불어 이승만은 그가 용공적이라고 생각한 임시정부요인들이 자기보다 먼저 귀국하여 공산주의자들과의 합작으로 주도권을 장악하게 될 것을 염려하여 귀국을 서둘렀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승인을 얻기 위해 끈덕지게 노력해온 그를 국무성이 그다지 달갑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귀국은 일본이 항복한지 2개월이 지나고 하지중장과 그의 예하부대가 인천에 상륙한지 5주일이 지나서였다.
이승만의 정치적 태도는 그의 첫 기자회견에서부터 나타났다. 군정의 고위 당국자들을 대단치 않게 짚어 넘기면서 그들과 의견일치를 보았다고 말하고 자신의 개인자격을 강조하면서도 임시정부와 외교부를 별도의 것인 것처럼 이야기하는가 하면 38선의 책임이 소련에 있는 듯이 비치고 미국정부내의 사정까지도 자세히 아는 듯이 말하는 등 면밀히 배려된 정치적 발언이었다.
이승만의 군임적이고 초연한 제스추어와 단호한 정견표명은 그가 미국정부나 점령군당국의 전폭적인 협조를 보장받고 귀국했다는 추측을 낳게 했다.
이승만이 귀국하자 기성 정치세력들에서는 저마다 그를 영웅으로 추대하려했다. 우익진영은 물론 이른바 ‘인민공화국’에서도 이승만의 환영준비위원을 선출하는 등 수선을 떨었으며, 공산당의 박헌영까지도 그를 찾아와 당수가 되어줄 것을 청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특정 정당의 제약을 받음이 없이 범정파적인 리더쉽을 발휘하고자 했기 때문에 특정한 정당이나 단체와 선뜻 제휴하려 하지 않았다.
정치적 대립과 혼란 속에서 이승만이 착수한 정치활동은 범정치단체협의기구형식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운동이었다. 이승만이 귀국한지 1주일만인 10월 23일에는 각 정당 및 단체의 2명씩의 대표 2백여 명이 모여 독립촉성중앙협의회라는 통일기구를 설치하기로 결의하고 이승만을 회장으로 선출했는데, 이 자리에서 이승만은 김구를 극력 내세우면서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강조하고 새로 정부를 조직하자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동협의회가 단순한 정치단체가 아니라 ‘한국의 뜻’을 물어볼 만한 ‘책임 있는 기관’이 될 것을 주장한 것은 범정치세력의 대동단결이 자기를 중심으로 이루어질 것을 요구한 대중강요자적 지도자로서의 정치적 포석이었다.
이렇게 하여 11월 2일 독립촉성중앙협의회결성대회가 개최되고, 이승만은 자신이 미리 작성해온 ‘사연합국과 아메리카민중에게 보내는’ 결의문을 통해 연합국에 대한 ‘인식사항’으로 다음 세 가지를 지적했다.
(一)우리는 자주할진대 일년 이내에 국내를 안돈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외국의 물질적 기술적 후원으로서 비교적 단시일 내에 평화로운 정상생활을 회복할 수 있다. 이 사실을 부인하는 자는 아직도 일본인의 선전술에 마비되어 있는 자들이다.
(二)우리는 연합국과 우호관계에서 협력할 것이며 극동평화유지에 응분의 노력을 경주할 것이다.
(三)재중경의 우리 임시정부가 연합국의 승인 하에 환도하면 1년 이내에 국민선거를 단행할 것이요, 1919년에 선포된 독립선언서와 동년에 한성에 건설된 임시정부의 취지에 의하여 천명된 민주주의의 정부원칙을 어디든지 존중할 것이다.
이처럼 이승만은 이 인식사항의 3항에도 자신을 집정관총재로 선출했던 한성정부의 정통론을 강조할 것을 잊지 않았다.
결의서에 대한 수정위원으로 여운형, 안재홍, 박헌영, 이갑성 네 사람이 선출되었고, 집행위원총본부구성에 들어가 집행위원 7명의 인선을 이승만에게 일임하고 폐회했다. 후일 좌익계가 떨어져 나간대로 이 독립촉성중앙협의회는 이승만의 정치적 기반이 된다.
공산당은 이튿날로 2일의 회의가 한민당에 의해 주재되었다고 비방하고 결의문의 문귀수정 뿐아니라 내용전반에 대한 수정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고, 박헌영은 수정위원회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승만의 정치행태를 알고 있는 공산당으로서는 이승만에게 협력할 의도가 처음부터 없었으며 중앙협의회에 참가한 것은 정파통일이라는 절대적인 명분을 거부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고 이승만이 귀국하자 그에게 당수가 되어주기를 요청한 것도 물론 정치적 제스추어에 지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독립촉성중앙협의회가 이승만과 한민당을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세력의 통일기구로 결성되자 좌익계에서는 곧 이에 반발하고 나섰다. 6일에는 26개 좌익청년단체들이 이른바 전국청년대표자회를 열고 이승만이 ‘인민공화국’주석에 취임하여 ‘진정한 민족통일전선’을 완성해 줄 것을 결의하고, 조선노조전국평의회에서도 ‘인공’지지를 결의하고 이승만에게 면담을 요청해 오기도 했으나, 이튿날인 7일 아침 이승만은 ‘인민공화국’의 주석에 취임할 것을 공식으로 거부하고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이른바 중대방송을 한다.
좌익계에서는 이 방송이 그들이 이탈해 나가는 구실이 되었고 이때부터 태도를 표변하여 이승만을 비판하고 정파통합운동의 실패의 책임을 그에게 돌렸다.
참고문헌
남정옥, 이승만 대통령과 6 25 전쟁, 이담북스, 2010
로버트 올리버 저, 황정일 역, 이승만, 건국대학교출판부, 2002
서중석, 이승만의 정치 이데올로기, 역사비평사, 2005
유영익, 반병률 외 3명, 이승만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연세대학교출판부, 2009
유영익, 이승만 대통령 재평가, 연세대학교출판부, 2006
이한우, 우남 이승만 대한민국을 세우다, 해냄출판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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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7.30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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