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 과전법의 성립에 대한 배경과 그 성격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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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고려 시기의 토지제도

2)과전제의 성립

3)과전법의 내용

4. 맺음말

본문내용

나 과전법은 사전경기의 원칙에 따라 수조권의 분급을 크게 축소시키게 되었는데 이는 법제적인 부분을 크게 제한하는 것이었다.
과전법이 분급수조지를 축소해 간 것은 명목상은 사전을 억제한다는 원칙에서 취해진 것이었으나 그 이면에는 생산력의 발전에 따른 토지소유권의 성장이 이루어지고 이에 토지의 소유권자가 법제상으로 규정된 수조권을 배제하면서 국가를 직접 상대하는 존재로 성장하고 있었다는 사실 위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과전법은 토지지배관계의 현상을 반영하고서 성립되고 운용되었던 것이었다. 가령 과전법이 사전에서와 같은 약탈적인 수취를 금함으로써 농민의 토지경영을 보호하는 반면 고려시기에는 인정을 기준으로 부과된 각종의 직역을 이제는 토지 기준으로 이행시켜 부과하였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리고 각 국가기관에 분속시켜 운영하던 국가수조지도 세종 때의 국용전제(國用田制)의 시행에 따라 보편적인 국고수조지로 통일적으로 파악하였다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고려 말의 사전은 기사양전을 통해 또한 공·사전조의 공수조처에 따라 혁파되었다. 그러나 토지의 국유를 실현한다는 것이 전제개혁의 원래의 뜻이었으나 그 뜻은 실현되지 못하고 토지의 소유는 불균등한 관계 그대로 남게 되었다. <태종실록>에 의하면 사전의 혁파 후에도 토지를 광점(廣占)하고서 조업전(祖業田)이라 칭하는 지주의 존재가 확인된다. 즉 소유권에 입각한 토지지배관계는 엄연히 존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전이 혁파되면서 토지지배관계는 특히 대농장 사전일수록 혁파되어 원래의 소유권자에게 반환된다. <태조실록>에서 사전을 혁파하고 법제를 정하여 전권(田券)을 분급하여 겸병이 두절되었음을 기억해야한다. 이는 개별 토지의 소유권자에게 전권을 새로 작성해 주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사전 속에 토지를 탈점 당하던 다수의 농민이 과전법체제하에 자영농의 존재로 되돌아가게 되는데 이 자영농의 확보야말로 과전법이 성취해 낸 가장 큰 의의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과전법의 성립과정을 통해 과전법이 등장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과 그 성격에 대해 알아보았다. 생각보다 심오하고 이해되지 않은 부분도 상당부분 있었으나 과전법은 조선왕조 설립에 있어서 필수불가분한 제도이며 가장 핵심적인 체제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자영농을 확보하라!” 조선왕조의 임무의 시작은 성공적이었고 이는 500년 왕조를 유지할 수 있는 주춧돌이 되었던 것이다.

키워드

고려,   과전법,   조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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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6페이지
  • 등록일2013.08.05
  • 저작시기2013.8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869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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