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생애와 저작
2. 로크 철학 비판 : 제1성질과 물질적 실체 비판
3. 인식론 : ‘존재는 지각이다’ , 주관적 관념론
3‐1. 존재는 지각되는 것이다 3‐2. 존재는 지각하는 것이다
4. 형이상학 : 정신과 신의 문제
5. 버클리 비판
2. 로크 철학 비판 : 제1성질과 물질적 실체 비판
3. 인식론 : ‘존재는 지각이다’ , 주관적 관념론
3‐1. 존재는 지각되는 것이다 3‐2. 존재는 지각하는 것이다
4. 형이상학 : 정신과 신의 문제
5. 버클리 비판
본문내용
논증은 신의 본질적 특성에 대한 기술을 포함하는 인과논증의 일종이다.
첫째, 우리는 관념들을 갖거나 지각한다.
둘째, 우리는 우리가 가진 관념들의 원인이 아니다. 우리 경험의 내용은 우리가 의지를 행사한 결과가 아니다.
셋째, 발생하는 모든 것은 원인을 갖고 있으며, 관념들의 원인은 정신적인 것임에 틀림없다.
넷째, 사건들이 독자적으로 존속한다는 것은 모순이므로 그것들을 야기하는 어떤 다른 정신이 있음에 틀림없다.
다섯째, 우리 경험의 규칙성과 질서는 그것의 원인이 무한히 지적임을, 경험의 규모는 그 원인이 전능함을, 경험에서 발견되는 대상들의 아름다움과 완전함은 그 원인 자체의 완전함을 함축한다.
버클리의 논증에는, 원인에는 적어도 결과만큼의 실재성이 있어야 한다는 데카르트적이고 스콜라 철학적인 전제가 작용하고 있다. 버클리는 다른 사람들의 존재보다 신의 존재가 훨씬 명백하게 지각된다고 주장한다. 다른 사람들과 신의 존재는 둘 다 경험에 관한 사실들로부터 이루어지는 추론이다.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것은 단지 다른 사람들의 신체뿐인데 어떻게 그들이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 즉 우리 자신처럼 심리적인 내부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가? 우리가 지각하는 모든 것은 우주인데 우리는 어떻게 물리적 우주의 정신적 원인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가?
신은 무한하고 현명하며, 자비롭고 전지전능한 정신이다. 인격은 본질적으로 정신이며, 정신은 지각할 수 있지만 지각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단지 관념들을 지각하므로 직접적으로는 정신을 보지 못한다. 우리는 결코 인격을 인격으로 보지 못한다. 그러나 관념은 한편으로 우리로 하여금 다른 인격들이 존재한다고 상정하게 하는 표시 내지 기호이다. 우리가 신을 보거나 지각한다고 말하는 것이 의미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단지 한 가지 차이점은 우리 경험의 부분은 어떤 때 다른 마음의 존재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우리 경험의 전체는 언제나 신의 존재의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의 존재의 증거는 압도적이다. 버클리의 입장은 만약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마음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신한다면,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훨씬 더 확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은 매순간 신의 존재를 확증하며, 어느 것도 그것을 반박하지 못한다. 감관에 의해 우리가 지각하는 모든 것은 신의 능력의 기호나 결과이다. 그러므로 버클리의 우주는 마음과 그것의 관념을 포함한다. 마음은 유한하면서 무한하다. 유일하게 무한한 마음이 신이다. 유한한 마음들은 상호작용하지 않으며, 신은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물질적 우주를 공유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관념들을 가지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만 신은 물질적 우주를 창조했다.
5. 버클리 비판
버클리는 인간의 마음이 전적으로 감각 능력이기 때문에 우리가 어떠한 추상 관념도 가질 수 없다고 주장하는 점에서는 로크보다 더 일관되고 철저한 경험주의자의 모습을 보여 준다. 그의 주장은 로크의 경험주의를 철저하게 밀고 나가면 도달하게 되는 결론이다. 하지만 그는 여러 곳에서 자신의 주장의 일관성을 벗어나 있는 면을 보여주며 또한 비판을 받고 있다.
우선, 우리의 인식 능력을 감각 능력으로 축소시켜 보았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버클리는 물질 비판의 주요 근거를 인식론적인 측면에서 구하고 있다. 다시 말해 물질이 인식론적으로 지각될 수 없는 것이므로, 존재론적으로 있을 수 없는 것이라는 결론을 이끌어 내고 있는 것이다. 버클리에게는, 인식론적으로 인식 불가능한 것은 존재론적으로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버클리의 주장은 존재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라는 존재론적인 질문과 맞물리게 마련이다. 즉, 존재하는 것의 조건이 인식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주장에는 나름대로의 정당화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당화는 존재론적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물론 존재론에 대해서 버클리는 정신적 실체와 관념만이 존재하는 것의 모두라는 관념론을 제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정신적 실체, 즉 마음과 관념 사이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그리고 인식될 수 있는 것만이 존재한다면 정신적 실체는 어떻게 인식될 수 있는가 등의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이런 관념론의 입장을 따라가다 보면 아무래도 주관주의적인 면을 벗어나기 어렵게 된다.
마지막으로, 버클리는 로크의 추상 작용 이론이 데카르트처럼 순수한 지적 개념을 인정한 것이므로 경험주의에서 벗어난다고 비판하지만, 그 자신도 만족스럽게 해결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어느덧 추상작용을 인정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정신이 ‘개념’을 갖는 인식에서는 능동적이다. ‘개념’을 갖는 인식은 다른 말로 한다면 반성 또는 추상적 고려(abstract considering)이다. 버클리가 우리가 정신의 행위를 반성할 때 갖는 것을 관념이 아니라 ‘개념’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우리가 정신에 관하여 사고할 때 사고 행위와의 직접적인 접촉이 없이는 사고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것은 “모든 사고는 사고 과정의 인식을 동시에 수반한다.”는 것을 표현하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견해는 로크와 데카르트를 따르고 있는데, 단지 그들과 표현에서 차이가 날 뿐이다. 즉 버클리는 우리가 우리 정신의 행위를 인식할 때 갖는 것을 관념이 아니라 ‘개념’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이미 로크도 자아에 대한 인식을 직관적인 것이라고 표현했지만, 데카르트와 로크의 물질적 실체 개념을 감각 관념으로 환원시킨 버클리도 정신적 실체에 대한 인식을 ‘개념’이라고 표현한다. 이 점에서 버클리의 철학이 ‘자아 의식의 우위’라는 데카르트 철학의 전통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나아가 ‘개념’을 갖는 인식을 추상적 고려라고 한다면 이것은 그가 앞에서 부정했던 추상 작용을 결국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순수한 지성을 부인하면서 동시에 추상 관념을 부인하는 견해의 결과는 유명론의 일종이 될 수 밖에 없으며, 버클리의 이론은 이러한 면모를 잘 나타내 준다. 이것은 지식의 기본 단위를 관념으로 보고, 존재에 관한 논의를 관념에 관한 논의로 환원하는 그들의 경험주의적 입장의 당연한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 우리는 관념들을 갖거나 지각한다.
둘째, 우리는 우리가 가진 관념들의 원인이 아니다. 우리 경험의 내용은 우리가 의지를 행사한 결과가 아니다.
셋째, 발생하는 모든 것은 원인을 갖고 있으며, 관념들의 원인은 정신적인 것임에 틀림없다.
넷째, 사건들이 독자적으로 존속한다는 것은 모순이므로 그것들을 야기하는 어떤 다른 정신이 있음에 틀림없다.
다섯째, 우리 경험의 규칙성과 질서는 그것의 원인이 무한히 지적임을, 경험의 규모는 그 원인이 전능함을, 경험에서 발견되는 대상들의 아름다움과 완전함은 그 원인 자체의 완전함을 함축한다.
버클리의 논증에는, 원인에는 적어도 결과만큼의 실재성이 있어야 한다는 데카르트적이고 스콜라 철학적인 전제가 작용하고 있다. 버클리는 다른 사람들의 존재보다 신의 존재가 훨씬 명백하게 지각된다고 주장한다. 다른 사람들과 신의 존재는 둘 다 경험에 관한 사실들로부터 이루어지는 추론이다.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것은 단지 다른 사람들의 신체뿐인데 어떻게 그들이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 즉 우리 자신처럼 심리적인 내부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가? 우리가 지각하는 모든 것은 우주인데 우리는 어떻게 물리적 우주의 정신적 원인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가?
신은 무한하고 현명하며, 자비롭고 전지전능한 정신이다. 인격은 본질적으로 정신이며, 정신은 지각할 수 있지만 지각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단지 관념들을 지각하므로 직접적으로는 정신을 보지 못한다. 우리는 결코 인격을 인격으로 보지 못한다. 그러나 관념은 한편으로 우리로 하여금 다른 인격들이 존재한다고 상정하게 하는 표시 내지 기호이다. 우리가 신을 보거나 지각한다고 말하는 것이 의미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단지 한 가지 차이점은 우리 경험의 부분은 어떤 때 다른 마음의 존재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우리 경험의 전체는 언제나 신의 존재의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의 존재의 증거는 압도적이다. 버클리의 입장은 만약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마음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신한다면,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훨씬 더 확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은 매순간 신의 존재를 확증하며, 어느 것도 그것을 반박하지 못한다. 감관에 의해 우리가 지각하는 모든 것은 신의 능력의 기호나 결과이다. 그러므로 버클리의 우주는 마음과 그것의 관념을 포함한다. 마음은 유한하면서 무한하다. 유일하게 무한한 마음이 신이다. 유한한 마음들은 상호작용하지 않으며, 신은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물질적 우주를 공유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관념들을 가지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만 신은 물질적 우주를 창조했다.
5. 버클리 비판
버클리는 인간의 마음이 전적으로 감각 능력이기 때문에 우리가 어떠한 추상 관념도 가질 수 없다고 주장하는 점에서는 로크보다 더 일관되고 철저한 경험주의자의 모습을 보여 준다. 그의 주장은 로크의 경험주의를 철저하게 밀고 나가면 도달하게 되는 결론이다. 하지만 그는 여러 곳에서 자신의 주장의 일관성을 벗어나 있는 면을 보여주며 또한 비판을 받고 있다.
우선, 우리의 인식 능력을 감각 능력으로 축소시켜 보았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버클리는 물질 비판의 주요 근거를 인식론적인 측면에서 구하고 있다. 다시 말해 물질이 인식론적으로 지각될 수 없는 것이므로, 존재론적으로 있을 수 없는 것이라는 결론을 이끌어 내고 있는 것이다. 버클리에게는, 인식론적으로 인식 불가능한 것은 존재론적으로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버클리의 주장은 존재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라는 존재론적인 질문과 맞물리게 마련이다. 즉, 존재하는 것의 조건이 인식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주장에는 나름대로의 정당화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당화는 존재론적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물론 존재론에 대해서 버클리는 정신적 실체와 관념만이 존재하는 것의 모두라는 관념론을 제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정신적 실체, 즉 마음과 관념 사이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그리고 인식될 수 있는 것만이 존재한다면 정신적 실체는 어떻게 인식될 수 있는가 등의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이런 관념론의 입장을 따라가다 보면 아무래도 주관주의적인 면을 벗어나기 어렵게 된다.
마지막으로, 버클리는 로크의 추상 작용 이론이 데카르트처럼 순수한 지적 개념을 인정한 것이므로 경험주의에서 벗어난다고 비판하지만, 그 자신도 만족스럽게 해결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어느덧 추상작용을 인정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정신이 ‘개념’을 갖는 인식에서는 능동적이다. ‘개념’을 갖는 인식은 다른 말로 한다면 반성 또는 추상적 고려(abstract considering)이다. 버클리가 우리가 정신의 행위를 반성할 때 갖는 것을 관념이 아니라 ‘개념’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우리가 정신에 관하여 사고할 때 사고 행위와의 직접적인 접촉이 없이는 사고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것은 “모든 사고는 사고 과정의 인식을 동시에 수반한다.”는 것을 표현하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견해는 로크와 데카르트를 따르고 있는데, 단지 그들과 표현에서 차이가 날 뿐이다. 즉 버클리는 우리가 우리 정신의 행위를 인식할 때 갖는 것을 관념이 아니라 ‘개념’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이미 로크도 자아에 대한 인식을 직관적인 것이라고 표현했지만, 데카르트와 로크의 물질적 실체 개념을 감각 관념으로 환원시킨 버클리도 정신적 실체에 대한 인식을 ‘개념’이라고 표현한다. 이 점에서 버클리의 철학이 ‘자아 의식의 우위’라는 데카르트 철학의 전통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나아가 ‘개념’을 갖는 인식을 추상적 고려라고 한다면 이것은 그가 앞에서 부정했던 추상 작용을 결국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순수한 지성을 부인하면서 동시에 추상 관념을 부인하는 견해의 결과는 유명론의 일종이 될 수 밖에 없으며, 버클리의 이론은 이러한 면모를 잘 나타내 준다. 이것은 지식의 기본 단위를 관념으로 보고, 존재에 관한 논의를 관념에 관한 논의로 환원하는 그들의 경험주의적 입장의 당연한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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