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머 리 말
Ⅱ. 소금과 세금, 시장
Ⅲ. 소금생산 기술의 변화
Ⅳ. 천일염전의 개발과 염업의 민영화
Ⅴ. 소금시장 개방과 어민의 적응
Ⅵ. 맺 음 말
⁃ 참고문헌
Ⅱ. 소금과 세금, 시장
Ⅲ. 소금생산 기술의 변화
Ⅳ. 천일염전의 개발과 염업의 민영화
Ⅴ. 소금시장 개방과 어민의 적응
Ⅵ. 맺 음 말
⁃ 참고문헌
본문내용
해 3~4일간 갯벌을 갈면서 햇볕과 바람으로 수분을 증발시켜 갯벌의 염도를 높이고 이 함토를 한곳에 쌓아 올린 후(이를 섯등이라 하며, 섯등 밑에 구덩이를 파서 목재를 걸치고 그 위에 소나무 가지를 올려 채의 역할을 하게 한다) 여기에 다시 바닷물을 부어 염도를 더욱 높인 함수를 만들어 관을 통해서 한곳(염정)으로 흘러들게 한다. 따라서 조금 때에 비가 오지 않아야 생산이 가능하다. 유제염전식은 둑을 쌓아 바닷물이 염전에 들어오는 것을 사람이 통제할 수 있어 조류에 관계없이 채함작업을 할 수 있다. 함수를 채취한 후 사리에도 물이 차지 않도록 지반을 높인 곳에 가마를 설치해 함수를 가져가 끓여서 소금을 얻는다. 소금을 굽는 가마는 철분과 토분이 있다. 철분은 직자법에서 사용되었고, 염전법에 사용되는 가마는 조개·굴 껍질을 태운 후 물에 불려 빻은 자연석회를 이용해 제조한 토분이었다.
염분은 평저 방형이며 염막 안에 받침목(소나무)과 구철을 이용해서 설치하였다. 염막은 소나무로 기둥을 세운 엉성한 가건물로 천장을 막지 않아 함수를 끓일 때 연기가 빠져나가도록 하였다. 유제염전법은 남해에서 비롯되어 서해안 지역으로 확대되었으며 지형적인 차이로 입빈식 염전법이 불가능한 동해만 지역에서는 양빈법에 의해서 소금을 생산하였다. 조선후기에는 유제염전법, 양빈법이 등장하여 염전이 확대되고 생산이 안정되는 속에서 염전법 내부의 채함과 전오기술 발전을 바탕으로 생산량이 크게 증대되었다.
제염과정에서 제염기술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연료, 찰흙, 패류 등이다. 소금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함수를 가마솥에 넣고 끊여야 하는데 이때 사용되는 연료 중 생산량이 가장 좋은 연료는 소나무이며, 그 외 풀, 잡목 등이 사용되었다. 조선시대에 소나무는 선박제조용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목재였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기록을 보면 금송문제가 빈번하게 논란거리로 등장하고 있다. 특히 \"전라도 좌우수영이 관할하는 여러 섬의 소나무 벌목 폐단은 실로 화전과 자염이 치성한데서 연유한 것\"이라며 소나무 남벌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그 결과 국가에서는 연료가 많이 사용되는 철분의 사용을 금하면서 토분을 장려하였는데, 토분은 굴껍질과 조개껍질을 주원료로 하기 때문에 석화나 굴 등 생산지가 가까운 서해안은 좋은 소금생산지가 될 수 있었다.
4. 천일염전의 개발과 염업의 민영화
1)일제의 소금정책과 천일염전의 개발
천일염전이 조성되기 전에 대표적인 제염방법은 입빈식과 양빈식을 이용한 전오염으로 매우 낙후한 기술이었다. 한말이후 일반인들은 소금을 구입하기가 매우 어려워 매년 막대한 양의 소금을 중국, 일본, 대만 지역에서 수입하였다. 국내에 소금이 처음 들어온 것은 1884년 부산항을 통해 1,624석 정도 들어오면서부터 였다. 그 후 2년 동만 홍수로 염전이 파괴되면서 소금 수입은 본격화되었다. 1896년 중국염은 전체 수입 소금의 1.0%에 불과해 대부분 일본염이 국내에 들어왔지만, 1903년에는 중국염은 66.7%로 증가한 반면에 일본염은 33.3%로 감소하였다. 1910년에는 국내 총 염생산은 20만근으로 소비량 30만근의 66.7%에 불과해 10만근을 중국의 관동주, 청도, 산동성 지역과 일본 등지에서 수입하였다. 이렇게 중국염이 대량 수입될 수 있었던 것은 일찍부터 천일염전이 개발되었을 뿐만 아니라 값싼 노동력으로 생산비용이 매우 낮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중국염의 압박으로 서북해안의 재래염 생산자는 생산비에 못 미치는 가격으로 판매하지 않으면 안되었으며 스스로 생산기반을 조성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일본이 자국염의 판로확장을 목적으로 1906년 실시한 염업조사는 중국염의 수입이 급증하면서 조선염업의 \'개량\'으로 방향을 전환하기에 이르렀다. 즉 전오법의 개량에 의한 생산비 절감, 신식염전의 조성 등 조선염업의 \'개량\'이 제안되었다. 이러한 개량은 일본의 전오제염법과 대만의 천일염전법의 경험을 기초로 한 것이었다.
전매사업이었던 천일염은 국가가 직접 관리하였는데, 1921년과 1939년의 소금생산고를 비교해 보면 18년 동안3.8배 증가하였다. 그리고 전오염은 감소하였지만 천일염은 7.7배 증가하여 수입염의 감소에 큰 역할을 하였다. 당시의 재조염 및 전오염은 민간 자영업에서 생산했기에 그 품질이 우수하여 도회지나 일본의 염장어류용으로 사용되었으며, 재제염은 부산, 진남포, 청진 등의 무역항이나 경성, 평양, 대구, 전주 등 소비도시의 제염공장에서 생산되었다.
일제는 1906년 천일염전 적지로 인
염분은 평저 방형이며 염막 안에 받침목(소나무)과 구철을 이용해서 설치하였다. 염막은 소나무로 기둥을 세운 엉성한 가건물로 천장을 막지 않아 함수를 끓일 때 연기가 빠져나가도록 하였다. 유제염전법은 남해에서 비롯되어 서해안 지역으로 확대되었으며 지형적인 차이로 입빈식 염전법이 불가능한 동해만 지역에서는 양빈법에 의해서 소금을 생산하였다. 조선후기에는 유제염전법, 양빈법이 등장하여 염전이 확대되고 생산이 안정되는 속에서 염전법 내부의 채함과 전오기술 발전을 바탕으로 생산량이 크게 증대되었다.
제염과정에서 제염기술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연료, 찰흙, 패류 등이다. 소금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함수를 가마솥에 넣고 끊여야 하는데 이때 사용되는 연료 중 생산량이 가장 좋은 연료는 소나무이며, 그 외 풀, 잡목 등이 사용되었다. 조선시대에 소나무는 선박제조용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목재였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기록을 보면 금송문제가 빈번하게 논란거리로 등장하고 있다. 특히 \"전라도 좌우수영이 관할하는 여러 섬의 소나무 벌목 폐단은 실로 화전과 자염이 치성한데서 연유한 것\"이라며 소나무 남벌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그 결과 국가에서는 연료가 많이 사용되는 철분의 사용을 금하면서 토분을 장려하였는데, 토분은 굴껍질과 조개껍질을 주원료로 하기 때문에 석화나 굴 등 생산지가 가까운 서해안은 좋은 소금생산지가 될 수 있었다.
4. 천일염전의 개발과 염업의 민영화
1)일제의 소금정책과 천일염전의 개발
천일염전이 조성되기 전에 대표적인 제염방법은 입빈식과 양빈식을 이용한 전오염으로 매우 낙후한 기술이었다. 한말이후 일반인들은 소금을 구입하기가 매우 어려워 매년 막대한 양의 소금을 중국, 일본, 대만 지역에서 수입하였다. 국내에 소금이 처음 들어온 것은 1884년 부산항을 통해 1,624석 정도 들어오면서부터 였다. 그 후 2년 동만 홍수로 염전이 파괴되면서 소금 수입은 본격화되었다. 1896년 중국염은 전체 수입 소금의 1.0%에 불과해 대부분 일본염이 국내에 들어왔지만, 1903년에는 중국염은 66.7%로 증가한 반면에 일본염은 33.3%로 감소하였다. 1910년에는 국내 총 염생산은 20만근으로 소비량 30만근의 66.7%에 불과해 10만근을 중국의 관동주, 청도, 산동성 지역과 일본 등지에서 수입하였다. 이렇게 중국염이 대량 수입될 수 있었던 것은 일찍부터 천일염전이 개발되었을 뿐만 아니라 값싼 노동력으로 생산비용이 매우 낮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중국염의 압박으로 서북해안의 재래염 생산자는 생산비에 못 미치는 가격으로 판매하지 않으면 안되었으며 스스로 생산기반을 조성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일본이 자국염의 판로확장을 목적으로 1906년 실시한 염업조사는 중국염의 수입이 급증하면서 조선염업의 \'개량\'으로 방향을 전환하기에 이르렀다. 즉 전오법의 개량에 의한 생산비 절감, 신식염전의 조성 등 조선염업의 \'개량\'이 제안되었다. 이러한 개량은 일본의 전오제염법과 대만의 천일염전법의 경험을 기초로 한 것이었다.
전매사업이었던 천일염은 국가가 직접 관리하였는데, 1921년과 1939년의 소금생산고를 비교해 보면 18년 동안3.8배 증가하였다. 그리고 전오염은 감소하였지만 천일염은 7.7배 증가하여 수입염의 감소에 큰 역할을 하였다. 당시의 재조염 및 전오염은 민간 자영업에서 생산했기에 그 품질이 우수하여 도회지나 일본의 염장어류용으로 사용되었으며, 재제염은 부산, 진남포, 청진 등의 무역항이나 경성, 평양, 대구, 전주 등 소비도시의 제염공장에서 생산되었다.
일제는 1906년 천일염전 적지로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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