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용예술사] 화장의 기원, 시대별화장_단군신화부터 조선시대까지, 개화기부터 일제시대 이후까지, 현대화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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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미용예술사] 화장의 기원, 시대별화장_단군신화부터 조선시대까지, 개화기부터 일제시대 이후까지, 현대화장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화장의 기원
1) 본능이라는 설
2) 신분표시설
3)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4) 종교설

2. 시대별화장 - 단군신화부터 조선시대 까지
1) 단군신화
2) 삼국시대
(1) 신라
(2) 고구려
(3) 백제
3) 고려시대
(1) 화장경향
(2) 화장용기
4) 조선시대
(1) 흰 피부
(2) 여용국전과 매분구
(3) 매분구
(4) 분전
(5) 화장품 제조기술

3. 시대별화장 - 개화기부터 일제시대 이후까지
1) 개화기의 화장품과 신 화장
2) 개화초기

4. 현대화장

참고문헌

본문내용

한 결과 의외로 거절당했고, 상심한 총각은 그 처녀에게 향한 마음을 돌이키지 못하여 상사병으로 죽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을 규수는 울면서 내가 그를 죽였노라고 한탄하였다. 그리고는 다른 사람과 혼인하지 않으리라고 맹세하였다. 몸은 허락하지 않았지만 마음을 허락한 터에 다른 사람과 혼인한다면 개, 돼지와 다를 바 없지 않느냐고 각오를 다졌다. 각오한 대로 처녀로서 종신 수절하였다. 처녀 과부가 된 그녀는 가가호호 방문하여 화장품을 팔러 다니는 매분구가 되었다. ]
이 일화는 숙종시절에 있었던 이야기인데, 지금으로부터 300여년 전에 화장품의 방문 판매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당시에는 주로 방문 판매에 의하여 화장품과 화장구가 소비자에게 전달 된 듯한데, 이는 여성의 외출이 요즘처럼 자연스럽지 못하고, 여성이 자신의 일상용품을 구매하기 위하여 외출 하기를 꺼렸기 때문에, 매분구가 생활에 필요한 소식을 전해 주기도 했었다고 한다.
(4) 분전
매분구나 일상 생활용품을 파는 행상인 방물장수 말고도 전문상점을 통해 화장품과 화장구를 판매하기도 했었는데 이것을 분전이라고 했다.
(5) 화장품 제조기술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경장과 소장이 있었고, 분장과 향장이 관장으로서 존재하였다. 향장은 국가 행사용 향과, 궁중용 향수나 향료를 제조하였을 것이며, 분장도 역시 궁중의 각 계급의 여인용 분, 외명부용 분과 기생용 분을 제조하였을 것이다. 확실치는 않으나 기능으로 보면 연지와 머릿기름 등도 제조했었을 가능성이 높다.
제조기술 측면에서 보면 조선시대의 화장품은 대부분 가내수공업 규모로 제조되었다. 백분의 경우, 분꽃을 집 주변에 심어 씨앗을 거두어서 그늘에 말리고 맷돌로 빻은 후에 체에 쳐서 만들었다. 연지도 홍화꽃을 직접 재배하여 꽃잎을 말려 빻고 비비고 체에 치는 과정을 반복해서 제조했다.
상품화된 화장품이라고 해도 제조장소나 제조자가 표시되지 않고 상표도 부착되지 않았으며, 포장도 하지 않았다. 가격표가 부착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3. 시대별화장 - 개화기부터 일제시대 이후까지
1) 개화기의 화장품과 신 화장
19세기의 유럽에서는 화장품도 근대화 과정을 거친다. 현대적인 개념의 화장품이 생산되고, 상품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하지만 조선왕조는 건국 이래 중국 및 일본에 치중한 외교 정책을 고수했기 때문에 근대화 과장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근대화의 필요성조차도 느끼지 못했다. 그러던 중에 후진국이라고 경멸했던 일본이 유럽의 새 기술을 도입하여 무장하고, 유럽의 열강들이 문호개방을 요구한 것에 자극을 받아 1876년에 개항을 하게 되었다. 개항 이후 조선왕조는 모든 분야가 혼란스러웠는데 미용분야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때 신식 화장법과 화장품들이 재래 화장품, 화장법과 대치되거나 교체되었다. 궁중에서는 재래식 화장품에 의한 화장법을 고수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 현상은 대한제국 선언 이후에도 계속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궁궐 밖에서는 상황이 달랐었다. 화장품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생활필수품이 상품화 되지 못했기 때문에 갖가지 신상품들이 들어오자 재래 상품들은 시장에서 밀려나는 과정을 겪게 되었다. 재래 상품과 비교가 안될 만큼 포장이 예뻤고 사용법도 간편했기 때문에 큰 환영을 받았다.
2) 개화초기
주로 일본과 중국의 청나라로부터 화장품이 유입되었는데, 1920년대에는 수입선이 유럽 방면으로도 확대되었다. 외국에서 수입된 화장품을 보면 주로 크림, 백분, 비누, 향수 등이었다. 이렇게 수입화장품의 인기는 우리나라 화장품의 산업화를 촉진시키는 자극제 구실을 하였다.
1916년 서울 종로구 연지동에서 가내수공업 규모로 제조되기 시작한 박가분이 1922년에 정식으로 허가를 받았다. 관가에서 허가한 관허 제 1호인 박가분이 성공하자 서가분, 장가분 등 비슷한 상품 외에도 미용백분과 서울분, 설화분 등등이 만들어지고 발매되었고, 배달기름(머릿기름), 연부액(미백로션), 유액(밀크로션), 연향유, 밀기름 등도 이어서 시판 되었다.
위와 같이 신문에 광고된 화장품 이외에도 집에서 가내수공업 규모로 생산된 상표 없는 상품들이 여전히 판매되고 있었다. 크림을 손수레에 싣고 다니면서 북을 둥둥 쳤었는데, 이것을 '동동구리므' 라고 불렀었다.
앞서 말한 신식 화장품과 함께 신식 화장법도 도입되었는데, 신식 화장법은 재래 화장법에 비하여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입술연지의 색깔이 진해지고, 향수의 향기와 비누의 향기가 진해졌다. 원래의 쪽머리에서 파마머리로 바뀌고 치마와 소매의 길이가 짧아졌다. 또 뾰족구두를 신고 양산을 든 차림이 신여성의 옷차림으로 등장했다.
하지만 신여성의 화장과 옷차림이 기생이나 접대부들에게 먼저 유행이 되었기 때문에 일부 여자들에게는 반발과 기피의 대상이 되었다. 바람둥이 혹은 화냥년이라고 불리던 신여성들과 구별하기 위해서는 볼과 입술의 연지가 흐려야하고, 분바른 티가 없어야 했었다.
4. 현대화장
1945년의 8·15 광복을 계기로 한국의 화장품산업은 전환기를 맞이하게 된다. 화장품 판매를 독점하다시피 했던 일본인들을 철수하게 되어 화장품의 생산 활동이 일시적으로 줄어들었다. 물자의 부족이 계속되고, 이어 1950년 6·26 동란으로 또다시 화장품 산업은 위축됐다.
이때부터 우리나라의 화장품 생산 활동은 1960년에 이르러서야 본격화 되었다. 이 변화와 같이 화장법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1920∼1930년대부터 신문, 잡지에 서구식 화장법에 대한 지면들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화장법의 변화보다는 옷, 장신구, 두발형, 신발 등 겉을 꾸미기 위한 변화가 더 많기도 했다.
광복 이후 화장품의 변화는, 화장품의 기능이 세분화되고, 1960년 이후에는 액상색분(파운데이션)의 수요가 급격히 증가했다. 그리고, 연지도 고형(스틱)으로 변하였으며 소비량이 증가하였다.
참고문헌
김희숙 저, 미용 예술사, 한국학술정보 2008
임재해 저, 민속문화의 전통과 외래문화, 집문당 2002
신인섭 저, 광고로 보는 한국 화장의 문화사, 김영사 2002
김금란, 서명희 외 저, 플러스 메이크업, 예림 2007
전완길 저, 한국화장문화사, 열화당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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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4.06.23
  • 저작시기20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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