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사회와 문화 - 조선후기의 경제적 변화와 농민항쟁
본 자료는 4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해당 자료는 4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4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조선시대의 사회와 문화 - 조선후기의 경제적 변화와 농민항쟁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목 차-

Ⅰ. 머리말

Ⅱ. 조선 후기 경제 구조의 변동
1. 농업 생산력의 발전과 농민층의 분화
2. 수공업과 광업의 발달
3. 상품화폐 경제의 발달

Ⅲ. 조선후기 반봉건 농민항쟁
1. 조선후기 민란 발생의 배경
2. 서북민의 항쟁
3. 1862년 임술농민항쟁
4. 동학농민운동

Ⅳ. 맺음말

- 참고문헌

본문내용

림과 양반의 무리를 징벌한다.
5.노비 문서를 소각한다.
6.7종의 천인 차별을 개선하고, 백정이 쓰는 평량갓은 없앤다.
7.청상과부의 개가를 허용한다.
8.무명의 잡세는 일체 폐지한다.
9.관리 채용에는 지벌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한다.
10.왜와 통하는 자는 엄징한다.
11.공사채를 막론하고 기왕의 것을 무효로 한다.
12.토지는 평균하여 분작한다.
집강소가 설치된 이후 농민군의 세력은 더욱 확대되었다. 대세가 기울자 지방의 양반유생과 이서층이 재산을 유지하기 위해 농민군에 가담하는 일이 많았다. 그리고 영세상인영세수공업자실업자들도 농민군 대열에 들어왔다. 이들은 급진적이고 과격한 행동으로 폐정개혁 사업을 추진시켰지만, 대지주층 뿐만 아니라 중소지주부농층까지 약탈함으로써 부민층의 이탈을 초래하여 농민전쟁의 지지기반을 좁히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개혁사업은 봉건적 사회체제를 완전히 무너뜨리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했지만, 봉건체제 전반에 걸친 변혁의지와 외국자본주의의 침략에 대한 강력한 저항의식을 담은 것이었다.
9월경부터 청일 전쟁에 승리한 일본이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을 강화하자 농민군은 또다시 봉기를 준비하였다. 삼례에 본부를 둔 농민군 지도부는 동도창의소의 이름으로 반침략 항일투쟁에 충의지사(忠義之士)들이 거병할 것을 촉구하는 한편, 전라도 각지의 집강소를 통해 10여만 명의 농민군을 동원하였다. 전봉준은 10월 일본군정부군과의 전투를 앞두고 최시형 등의 북접에게 전쟁에 참가할 것을 요청하였고 처음에는 이를 거부당하였으나, 마침내 후에 남접과의 연합부대를 결성하기로 하였다.
남접 농민군은 김개남손화중이 이끄는 부대를 전라도 남단에 남겨두고 북상하여 논산에서 북접군과 합류하였다. 논산에 집결한 20여만 명의 농민군은 북상을 계속하여 공주에서 정부군일본군의 연합부대와 대치하였다. 공주는 농민군 진압에 동원된 일본군과 정부군의 거점이었다. 농민군은 공주 외곽의 이인효포우금치 등지에서 10월 중순부터 약 20일간 일본군과 정부군에 맞서 피비린내나는 공방전을 벌였으나,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을 견디지 못하고 논산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어 논산전투에서도 농민군은 다시 패배하였고 금구태인에서 마지막 저항을 했으나 실패하였다.
농민군은 패색이 짙어지자 농민군에 가담했던 양반유생이서층은 재빨리 농민군 대열에서 이탈, 농민전쟁 초기부터 농민군에 대항하던 민보군(民堡軍)에 가담하였다. 민보군은 도주한 농민군의 집에 방화하고, 농민들까지 체포, 살해하거나 재산을 약탈하였다.
전봉준도 태인전투에서 패배한 후 체포, 처형되었고 전라도 남단을 지키고 있던 김개남손화중 부대는 계속 남하한 일본군과 부산으로 파견된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붕괴했으며 그 외 지역에서도 일본군의 화력에 밀려 패배하였다. 이로써 1년 간 걸친 농민전쟁은 엄청난 희생 속에 좌절되고 말았다.
3) 동학 농민운동의 역사적 의의
1894년 농민전쟁은 조선 후기 농민항쟁을 통해 성장한 농민대중이 동학의 조직을 이용하여 봉건사회를 변혁하고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을 물리치려 한 대규모의 반봉건반침략투쟁이었다. 농민전쟁에 참여한 농민군은 경제적으로 농민층에 대한 봉건적 수탈을 제거하여 농민경제를 자립안정시키고 봉건지배세력 및 외국자본주의세력의 침탈로부터 소상인과 다수 빈농층을 보호하려고 하였다. 또 사회적으로는 봉건적 신분질서를 해체하고 근대적 평등사회를 실현코자 하였다.
이처럼 농민전쟁은 대체로 소농빈농소상인빈민층의 지향과 요구를 추진력으로 하여 전개되었다. 농민전쟁이 좌절된 것은 무엇보다도 일본군의 압도적인 무력 대문이었다. 더불어 봉건체제 자체를 타도하려고 생각하지 못한 지도부의 정치사상적 한계, 각지 농민군 사이의 통일적 연계의 부족 등도 좌절의 중요한 원인이었다.
농민전쟁에서 제기된 농민군의 요구는 개화파관료들에 의해 부분적으로 수용되어 갑오개혁에 반영되었다. 그러나 갑오개혁은 지주제를 유지강화하는 방향으로 추진되었기 때문에 농민군의 지향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더구나 농민전쟁 이후에는 외국자본주의의 침략이 더욱 강화되어 갔다. 따라서 농민군의 반봉건반침략 지향은 다시 대한제국기의 민중운동, 1905년 이후의 의병전쟁으로 계승되었다.
Ⅳ. 맺음말
조선후기는 변동의 시기였으며 많은 사회경제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농업경영의 변화와 발전에 따른 소득의 증가와 농업생산력의 증가는 사회전체의 생산력 수준을 향상시켰다. 이로써 조선후기는 근대사회로의 과도기적 시점을 겪으며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가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근대적인 계약관계로의 과도적인 형태였지만 중세 신분제에 의해 차별화된 질서가 아닌 평등한 사회로의 변화가 가능해지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사회상의 역동적 변화를 이끌어냈다
따라서, 조선 후기의 사회는 분명히 이전과는 다른 모습의 형태를 띠며 변해가고 있었다.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문화 예술적으로나 이전의 변화에 비해서 급진적으로 변화가 일어난 시기인데, 우리나라가 현대적인 모습으로 변해가는 근세의 시기라고도 할 수 있다.
조선 후기는 중세 봉건 질서의 붕괴기로서, 이 시기의 사회 성격을 크게 나누어보자면,
첫째, 양 난으로 인한 사회 경제적 기반의 동요, 둘째, 중앙 집권층과 지배층의 분열, 셋째, 구질서 자체의 변질, 넷째, 농업 생산력의 증대와 이에 따른 화폐 경제의 발달로 특징지어져 왔다. 한편, 이러한 변화는 과거 성장을 차단당했던 중·하층민의 성장 계기를 마련하였고, 이들 신세력들이 신분 상승을 시도하면서 신분 체제까지 동요되기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농민들의 의식이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것은 농민항쟁의 형태까지 발전하게 된다. 이것은 하층민들의 의식변화와 함께 항쟁으로써 바꾸어보려던 사회적 질서에 대한 불만의 표출 면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 참고문헌
- 한국역사연구회 「한국역사」, 역사비평사, 1992.
- 김종수, 「뿌리깊은 한국사 샘이 깊은 이야기 5」, 솔출판사, 2002.
- 김대길, 「시장을 열지 못하게 하라」, 가람기획, 2000.
- 역사문제연구소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의 역사」, 웅진닷컴, 2002.
  • 가격2,000
  • 페이지수14페이지
  • 등록일2015.04.27
  • 저작시기2015.4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965356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