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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대학설립 초기의 학생활동과 학생운동
1) 자치기구의 변모과정
① 학도호국단의 발족과 해체
② 총학생자치회의 결성
③ 재건학생회와 총학생회 발족
2) 4월 혁명기 동아대 학생의 활약
3) 학원사찰. 한 ․ 일 회담 반대시위
4) 학생운동의 변질과 학도호국단의 부활
2. 대학 자율화와 민주화 운동의 전개
1) 학도호국단과 총학생회
① 학도호국단의 조직과 운영
② 총학생회의 부활
2) 부마항쟁과 대학자율화 운동
3) 유화국면의 자율화 운동
4) 6월 항쟁과 대학민주화 운동
3. 대학의 민주화와 개혁
1) 학생자치활동의 확대
① 학생자치활동과 기구의 개혁
② 1993 범동아인 한마당
2) 학원자주화 운동
3) 사회민주화 운동
4. 결말: 대중과 학생운동
1) 대중성을 잃은 학생운동
2) 대중성 회복을 위한 학생운동 조직의 노력
1) 자치기구의 변모과정
① 학도호국단의 발족과 해체
② 총학생자치회의 결성
③ 재건학생회와 총학생회 발족
2) 4월 혁명기 동아대 학생의 활약
3) 학원사찰. 한 ․ 일 회담 반대시위
4) 학생운동의 변질과 학도호국단의 부활
2. 대학 자율화와 민주화 운동의 전개
1) 학도호국단과 총학생회
① 학도호국단의 조직과 운영
② 총학생회의 부활
2) 부마항쟁과 대학자율화 운동
3) 유화국면의 자율화 운동
4) 6월 항쟁과 대학민주화 운동
3. 대학의 민주화와 개혁
1) 학생자치활동의 확대
① 학생자치활동과 기구의 개혁
② 1993 범동아인 한마당
2) 학원자주화 운동
3) 사회민주화 운동
4. 결말: 대중과 학생운동
1) 대중성을 잃은 학생운동
2) 대중성 회복을 위한 학생운동 조직의 노력
본문내용
어난 학내 문제로 제적된 학우들의 복교를 위해 전 동아인과 함께 노력할 것을 결의한다. 우리는 면학분위기를 저해하는 어떤 요소도 배격한다”는 등의 행동강력을 밝혔다. 또한 “전 동아인이 참여한 가운데 직접선거를 통해 우리의 의사를 진정으로 대변할 수 있는 총학생회를 결성”하고, “현재 총학생회준비위원회에서는 총학생회가 발족됨과 동시에 일괄 사퇴”하며, “총학생회준비위원회는 홍보물에 밝힌 행사 일정대로 추진할 예정이었으나 작금의 사태가 전체학생을 대표하고 신뢰하는 대표기구를 구성함이 급선무라 생각하기에 이선거를 실시한다”고 하였다. 이날 발표된 선거 일정은 다음과 같다.
일 정
내 용
3월 23일~26일
3월 28일
3월 29일~30일
4월 1일~2일
4월 3일
4월 4일~6일
4월 8일~ 13일
4월 15일
4월 16일
각 학과 학회장 후보 등록
각 학과 학회장 선거
각 단과대학 학생회장 후보등록
각 단과대학 학생회장 후보 1,2차 합동유세
각 단과대학 학생회장 선거
총(부)학생회장 후보등록
총(부)학생회장 후보 1,2,3,4차 합동유세
총(부)학생회장 선거
당선 확정 공고
총학생회장준비위원회에서 확정 발표한 총학생회 간부 선거시행세척에 따르면, 선거방법은 총(부)학생회장은 직접 선거에 의하여 선출하되, 총(부)학생회장은 런닝메이트제로 하였다. 단과대 학생회장 및 학과 학생장도 직접선거로 선출하고, 임기는 총(부)학생회장 및 간부 모두 선거 당선 직후 4월 16일부터 약 2월 말까지로 명시하였다.
이리하여 각 단과대학 학생회장은 선거일정에 따라 4월 3일 선거가 완료되었으며 총학생회 정(부)학생회장은 총 6개 조의 입후보자가 등록을 마치고 합동유세를 거쳐 4월 15일 선거에 임하였다. 직접선거 방식의 채택과 대학의 민주화를 향한 높은 관심과 열기로 진행된 이 날 선거는 예년에 볼 수 없었던 71.3%의 높은 투표참여를 나타내기도 하였다. 그 결과 총(부)학생회장에는 이대희(법학3), 이성계(환경3)조가 당선되어 새로이 부활되는 총학생회의 막을 올렸다.
4월 19일, 1985학년도 총학생회 출범식이 419 기념식과 더불어 구덕캠퍼스 운동장에서 진행되었는데, 1980년 이후 5년만에 영남지구에서 처음으로 직선제에 의해 출범한 학생회는 학생들로부터 많은 관심과 기대를 모았다. 이날 모든 공식적인 행사가 끝난 뒤 3백여명의 학생들은 ‘학원 민주화’구호를 외치며 정문으로 진출, 출동한 경찰과 대치하여 연좌시위를 벌인 후 해산하였다. 한편 총학생회에서는 4월 29일 각 부서장들을 확정발표하고 집행부를 기획, 총무, 사회, 학술문화, 홍보조사, 체육, 성야, 여학생부 등 8개 부서로 구성하였다. 이후 역대 총(부)학생회장은 다음과 같다.
연도
총학생회장
부학생회장
연도
총학생회장
부학생회장
1980년
신해주(철3)
1987년
이동규(기계3)
윤중호(정외3)
1985년
이대희(법3)
이성계(환경3)
1988년
김영종(정외3)
김철원(토목3)
1986년
이성우(철3)
윤창근(기계3)
2) 부마항쟁과 대학자율화 운동 (1979~1982)
한국적 민주주의의 실현과 경제부흥을 표방하면서 장기 집권체제를 유지해 왔던 유신정권은 70년대 말로 접어들자 체제의 한계성이 드러나고 국민의 저항이 거세지면서 위기에 봉착하고 있었다. 유신체제의 억압성과 반민중성에 대한 민중들의 불만은 극한 상황에 이르고 있었는데, 이는 1978년 12월에 실시된 국회의원선거에서 야당인 신민당이 공화당보다 1.12% 더 많은 득표율을 획득한 데서도 나타났다.
제2차 석유파동에 따른 경제위기는 경기침체, 기업도산, 물가폭등, 수출격감 등 경제의 모든 부문에서 파국적인 양상으로 나타났으며, 민중의 생활고와 빈부격차를 더욱 악화시킴으로써 YH무역 여성도동자들의 투쟁을 출발점으로 각계 각층에서의 투쟁이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박정권은 이에 체제유지를 위한 강압정치를 강화하여 YH무역회사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을 진압하기 위하여 야당당사를 습격하는가 하면, 야당 총재의 의원직을 박탈 제명하는데 까지 이르고 만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들이 부마항쟁의 발생배경이 되었다.
부마항쟁은 1979년 10월 15일, 부산대학교에서 민주선언문과 민주투쟁선언문이 배포되면서 시작되어 16일에는 7천여명이 ‘독재타도’ ‘유신헌법철폐’ ‘야당탄압중지’ ‘빈부격차해소’ 등의 구호를 외치며 가두시위를 전개하여 17일까지 부산 전역에서 계속되었다. 학생들의 시위에는 노동자, 농민을 비롯한 일반시민과 중고생까지 합류하여 조직적인 항쟁으로 발전되었다.
박정권은 18일 오전 0시를 기해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였으나 이 날 저녁까지 투쟁은 계속되었으며, 곧 마산으로 확산되어 20일까지 마산지역 각계 민중들은 공화당사 파괴, 경찰서 방화 등 격렬한 반유신시위투쟁이 전개되었다. 20일에는 마산, 창원에 위수령이 내려지면서 군이 투입되었으나, 항쟁은 대구를 거쳐 전국으로 퍼지면서 전국적 대규모 투쟁으로 발전할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부마항쟁 기간 동안 우리 대학교 학생들은 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항쟁이 성과를 거두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1979년 10월 18일 당시 치안본부의 발표에 따르면, “지난 16일과 17일 부산대학교와 동아대학교 학생 3천여명이 교내에서 정권타도를 주장하며 시위를 벌이다 경찰의 제지로 오후 5시경 해산되었다가 부산시내 중심지 번화가 일원에 다시 결집, 2백~5명씩 6개 방면으로 진출해 해산을 종용하는 경찰과 대치하던 중 날이 어두원진 것을 틈타 합세한 일부 불순분자들과 경찰관서에 투석, 경찰차량을 불태우고 도청 세무서와 방송국 신문사 등에 침입했다” 라고 하고 있다.(동아일보 1979년 10월 18일자).
당시 기자의 취재 자료에 의하면, 10월 16일 자정 5분전까지 동아대생 4000~4500명과 부산대생 3000~3500명, 그리고 일부 시민이 학교 주변과 시내 남포,광복,창선동 등 중심가에서 시위를 벌였고, 이날 밤 10시 30분부터 1시간동안 동아대생 300여명이 도청에 진입키위해 투석전을 전개하다 이의 진압을 위해 출동한 경찰과 유혈 난투극이 벌어졌다. 17일 밤에도 시위는 계속되어 부산시경국장 승용차 등 다수의 차량과 시내 23개 파
일 정
내 용
3월 23일~26일
3월 28일
3월 29일~30일
4월 1일~2일
4월 3일
4월 4일~6일
4월 8일~ 13일
4월 15일
4월 16일
각 학과 학회장 후보 등록
각 학과 학회장 선거
각 단과대학 학생회장 후보등록
각 단과대학 학생회장 후보 1,2차 합동유세
각 단과대학 학생회장 선거
총(부)학생회장 후보등록
총(부)학생회장 후보 1,2,3,4차 합동유세
총(부)학생회장 선거
당선 확정 공고
총학생회장준비위원회에서 확정 발표한 총학생회 간부 선거시행세척에 따르면, 선거방법은 총(부)학생회장은 직접 선거에 의하여 선출하되, 총(부)학생회장은 런닝메이트제로 하였다. 단과대 학생회장 및 학과 학생장도 직접선거로 선출하고, 임기는 총(부)학생회장 및 간부 모두 선거 당선 직후 4월 16일부터 약 2월 말까지로 명시하였다.
이리하여 각 단과대학 학생회장은 선거일정에 따라 4월 3일 선거가 완료되었으며 총학생회 정(부)학생회장은 총 6개 조의 입후보자가 등록을 마치고 합동유세를 거쳐 4월 15일 선거에 임하였다. 직접선거 방식의 채택과 대학의 민주화를 향한 높은 관심과 열기로 진행된 이 날 선거는 예년에 볼 수 없었던 71.3%의 높은 투표참여를 나타내기도 하였다. 그 결과 총(부)학생회장에는 이대희(법학3), 이성계(환경3)조가 당선되어 새로이 부활되는 총학생회의 막을 올렸다.
4월 19일, 1985학년도 총학생회 출범식이 419 기념식과 더불어 구덕캠퍼스 운동장에서 진행되었는데, 1980년 이후 5년만에 영남지구에서 처음으로 직선제에 의해 출범한 학생회는 학생들로부터 많은 관심과 기대를 모았다. 이날 모든 공식적인 행사가 끝난 뒤 3백여명의 학생들은 ‘학원 민주화’구호를 외치며 정문으로 진출, 출동한 경찰과 대치하여 연좌시위를 벌인 후 해산하였다. 한편 총학생회에서는 4월 29일 각 부서장들을 확정발표하고 집행부를 기획, 총무, 사회, 학술문화, 홍보조사, 체육, 성야, 여학생부 등 8개 부서로 구성하였다. 이후 역대 총(부)학생회장은 다음과 같다.
연도
총학생회장
부학생회장
연도
총학생회장
부학생회장
1980년
신해주(철3)
1987년
이동규(기계3)
윤중호(정외3)
1985년
이대희(법3)
이성계(환경3)
1988년
김영종(정외3)
김철원(토목3)
1986년
이성우(철3)
윤창근(기계3)
2) 부마항쟁과 대학자율화 운동 (1979~1982)
한국적 민주주의의 실현과 경제부흥을 표방하면서 장기 집권체제를 유지해 왔던 유신정권은 70년대 말로 접어들자 체제의 한계성이 드러나고 국민의 저항이 거세지면서 위기에 봉착하고 있었다. 유신체제의 억압성과 반민중성에 대한 민중들의 불만은 극한 상황에 이르고 있었는데, 이는 1978년 12월에 실시된 국회의원선거에서 야당인 신민당이 공화당보다 1.12% 더 많은 득표율을 획득한 데서도 나타났다.
제2차 석유파동에 따른 경제위기는 경기침체, 기업도산, 물가폭등, 수출격감 등 경제의 모든 부문에서 파국적인 양상으로 나타났으며, 민중의 생활고와 빈부격차를 더욱 악화시킴으로써 YH무역 여성도동자들의 투쟁을 출발점으로 각계 각층에서의 투쟁이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박정권은 이에 체제유지를 위한 강압정치를 강화하여 YH무역회사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을 진압하기 위하여 야당당사를 습격하는가 하면, 야당 총재의 의원직을 박탈 제명하는데 까지 이르고 만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들이 부마항쟁의 발생배경이 되었다.
부마항쟁은 1979년 10월 15일, 부산대학교에서 민주선언문과 민주투쟁선언문이 배포되면서 시작되어 16일에는 7천여명이 ‘독재타도’ ‘유신헌법철폐’ ‘야당탄압중지’ ‘빈부격차해소’ 등의 구호를 외치며 가두시위를 전개하여 17일까지 부산 전역에서 계속되었다. 학생들의 시위에는 노동자, 농민을 비롯한 일반시민과 중고생까지 합류하여 조직적인 항쟁으로 발전되었다.
박정권은 18일 오전 0시를 기해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였으나 이 날 저녁까지 투쟁은 계속되었으며, 곧 마산으로 확산되어 20일까지 마산지역 각계 민중들은 공화당사 파괴, 경찰서 방화 등 격렬한 반유신시위투쟁이 전개되었다. 20일에는 마산, 창원에 위수령이 내려지면서 군이 투입되었으나, 항쟁은 대구를 거쳐 전국으로 퍼지면서 전국적 대규모 투쟁으로 발전할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부마항쟁 기간 동안 우리 대학교 학생들은 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항쟁이 성과를 거두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1979년 10월 18일 당시 치안본부의 발표에 따르면, “지난 16일과 17일 부산대학교와 동아대학교 학생 3천여명이 교내에서 정권타도를 주장하며 시위를 벌이다 경찰의 제지로 오후 5시경 해산되었다가 부산시내 중심지 번화가 일원에 다시 결집, 2백~5명씩 6개 방면으로 진출해 해산을 종용하는 경찰과 대치하던 중 날이 어두원진 것을 틈타 합세한 일부 불순분자들과 경찰관서에 투석, 경찰차량을 불태우고 도청 세무서와 방송국 신문사 등에 침입했다” 라고 하고 있다.(동아일보 1979년 10월 18일자).
당시 기자의 취재 자료에 의하면, 10월 16일 자정 5분전까지 동아대생 4000~4500명과 부산대생 3000~3500명, 그리고 일부 시민이 학교 주변과 시내 남포,광복,창선동 등 중심가에서 시위를 벌였고, 이날 밤 10시 30분부터 1시간동안 동아대생 300여명이 도청에 진입키위해 투석전을 전개하다 이의 진압을 위해 출동한 경찰과 유혈 난투극이 벌어졌다. 17일 밤에도 시위는 계속되어 부산시경국장 승용차 등 다수의 차량과 시내 23개 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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