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들어가는 말
2. 칭의 교리에 관한 중세 후기의 논의
3. 루터의 성서 강의를 중심으로 칭의 교리 변천 과정
4. 루터의 칭의론
5. 루터에 있어서 믿음과 행위의 관계
6. 루터의 “하나님의 의”에 대한 새로운 이해 시기
7.하나님의 주권과 예정
7. 나가는 글
2. 칭의 교리에 관한 중세 후기의 논의
3. 루터의 성서 강의를 중심으로 칭의 교리 변천 과정
4. 루터의 칭의론
5. 루터에 있어서 믿음과 행위의 관계
6. 루터의 “하나님의 의”에 대한 새로운 이해 시기
7.하나님의 주권과 예정
7. 나가는 글
본문내용
것으로 간주한다. 이때 이미 루터는 공로적인 업적은 거부했으나, 구원의 확실성과 전적인 은혜의 수단으로서 ‘겸비의 신학’을 옹호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비쪄는 1518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은혜의 유일한 수단은 ‘믿음으로만’이라고 말한 때를 개혁의 시기로 보았다. 하인리히 보른캄(Heinrich Bornkamm)은 루터가 로마서 강의시 복음에 나타난 믿음에 의한 칭의에 기초하고 있다고 결론을 내리고, 그 시기를 1518년 2월 15일과 3월 28일 사이의 연대를 선호한다. 오토 헤르만 페쉬(Otto Herman Pesch)는 어떠한 결정적인 대답은 주고 있지 않지만, 시편에 관한 구술시기 내에서 일어났다고 본다. W.뢰베니히, 박호용 역, 마르틴 루터 그 인간과 그의 업적, 130-131쪽.
7.하나님의 주권과 예정
7-1.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개념은 하나님이 좁게는 칭의와 구원의 문제에서 하나님이 전적 주권을 가지고 행하시고 넓게는 하나님이 모든 일들에 대해서 주권을 가지고 행하신다는 것이다. 일단 구원의 문제에서 칼뱅은 “하나님과의 관련”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지 알기 위해서는 오직 하나님이 먼저 그 분 자신을 계시하시기로 선택하셨기에 알 수 있다고 칼뱅은 이야기한다. 모든 인간은 종교적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관련을 맺는 일에서 제외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칼뱅은 이 의식을 “종교의 씨앗” ,“신성의 감각”, “양심의 가책”이라 불렀다. 하지만 인간은 “미로 속에서 길은 잃은 존재”라는 의미로 인간자체로는 하나님의 올바른 이해가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인간의 마음은 거짓 신에 이어서 다른 거짓 신을 만들어내는 우상의 공장이라 하였다. 또한 자연적인 이성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할 수 없다라고 확언을 한다. 위의 책, 227-229쪽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 적응된 계시”란 표현으로 하나님에 관한 모든 참된 계시는 한 가지 사실로부터 기원하게 된다. 하나님이 그의 위대하신 자비로 자신을 계시하시기로 결정하신 것이다. 그의 주권 적인 선으로부터 그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내려오기 위하여 “우리와 하늘의 영광 사이에 있는 엄청난 다리를 놓기로 결정하셨다.” 위의 책, 229-230쪽
7-2. 예정
칼뱅의 예정론에는 다음의 세단어, “절대적”, “특수한”, “이중적”이라는 의미가 부여된다. 예정론은 어떤 유한한 우연들을 조건으로 승낙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뜻에 의존한다는 의미에서 “절대적”이다.
둘째로는 예정은 사람들의 집단에 속하는 것이 아니고 개인들에 속한다는 점에서 “특수한” 것이다. 칼뱅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계약백성으로 선택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민족의 모든 개별적인 구성원들이 바울이 로마서에서 지적했듯이 구원을 선택한 것이다. 은혜의 언약은 각자에게 개별적으로 적용된다.
세 번째로 예정론은 이중적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자비를 찬양하도록 몇몇 개인들에게 영생으로 정하셨고, 그의 공의를 찬양하도록 다른 사람들을 영원한 정죄로 정하셨기에 이중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예정론은 모든 사람에 대하여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 것에 대한 변명으로 이용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하나님만이 누가 구원으로 선택되고 되지 않았는지를 알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께서 복음을 창세 전에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된 모든 사람들에 대한 효과적인 소명의 외적인 수단으로 사용할 것을 신뢰하면서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위의 책, 275-277쪽
7. 나가는 글
지금까지 루터의 “하나님의 의”와 칼뱅의 주권과 예정을 중심으로 은총의 교리를 살펴보았다. 루터는 기본적으로 개인의 구원의 확신에 관하여 깊은 몰두와 관심을 보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또한 종교개혁당시 중심 문제이기도 했다. 즉, 인간은 어떻게 구원을 얻는가의 문제 말이다. 중세 당시에는 이러한 구원의 문제를 인간의 행위를 주체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보는 인간론을 강조하고 있지만, 루터는 그의 성서강의를 잘 살피면 알겠지만, 철저한 그리스도 중심의 구원을 이야기하고 있다.
또한 칼뱅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은총이며 그 은총은 예정되어져 있다라고 이야기한다. 즉 기독론 중심의 구원론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루터에게 있어서 선행의 의미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단지 하나님의 의에 대한 선물이었다. 하지만 개신교는 실천 행위에 대한 또 하나의 중요한 것을 놓쳐 버렸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은 당연히 그 속에서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루터의 은총의 교리를 중심으로 한국 교회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한국 교회는 이신칭의 교리 자체를 목표인양, 행위의 열매는 거의 전적으로 무시되고 있으며, 설령 믿음의 결과를 의식하여 행동을 한다 하더라도 그 변화가 교회 중심의 생활에 국한되어 있지 않나 싶다.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사항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이신칭의 그 자체가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거기서 더나아가 그로 인한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에 중요성을 깨달아야한다.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맺게되면 이로 말미암아 신자들의 마음과 생활에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을 루터는 확신하고있었다. 복음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이신칭의로 인한 변화는 필연적으로 \'행위\'의 열매를 맺음을 강조하는 신학이 요청된다.
믿음으로 인한 변화의 실제적인 장(場)이 결국 교회를 넘어서 모든 관계 즉, 세상과 사회를 변화시키기에 이르는 것은 종교개혁의 역사가 증명하는 바이다. 루터 자신의 삶(예: 결혼)과 사상에 있어서도 이는 역력히 나타난다. \"이것은 (주: 빌립보서2장5절을 적용하면서)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향하여 행하신 것을 여러분이 안 것만큼 서로를 향해 관심을 기울이고 행해야함을 의미합니다.\"(두 종류의 의(1519)에서) 그리고 소위 \'본성적인 의\'를 3가지 의미로 해석하면서 그 둘째 의미로 이 의는 이웃을 사랑하는 데 있다\'고 말하고있다. 이형기 저, 루터의 저작선, 137쪽.
오늘의 한국교회에는 이것이 강조되어야한다.
7.하나님의 주권과 예정
7-1.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개념은 하나님이 좁게는 칭의와 구원의 문제에서 하나님이 전적 주권을 가지고 행하시고 넓게는 하나님이 모든 일들에 대해서 주권을 가지고 행하신다는 것이다. 일단 구원의 문제에서 칼뱅은 “하나님과의 관련”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지 알기 위해서는 오직 하나님이 먼저 그 분 자신을 계시하시기로 선택하셨기에 알 수 있다고 칼뱅은 이야기한다. 모든 인간은 종교적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관련을 맺는 일에서 제외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칼뱅은 이 의식을 “종교의 씨앗” ,“신성의 감각”, “양심의 가책”이라 불렀다. 하지만 인간은 “미로 속에서 길은 잃은 존재”라는 의미로 인간자체로는 하나님의 올바른 이해가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인간의 마음은 거짓 신에 이어서 다른 거짓 신을 만들어내는 우상의 공장이라 하였다. 또한 자연적인 이성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할 수 없다라고 확언을 한다. 위의 책, 227-229쪽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 적응된 계시”란 표현으로 하나님에 관한 모든 참된 계시는 한 가지 사실로부터 기원하게 된다. 하나님이 그의 위대하신 자비로 자신을 계시하시기로 결정하신 것이다. 그의 주권 적인 선으로부터 그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내려오기 위하여 “우리와 하늘의 영광 사이에 있는 엄청난 다리를 놓기로 결정하셨다.” 위의 책, 229-230쪽
7-2. 예정
칼뱅의 예정론에는 다음의 세단어, “절대적”, “특수한”, “이중적”이라는 의미가 부여된다. 예정론은 어떤 유한한 우연들을 조건으로 승낙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뜻에 의존한다는 의미에서 “절대적”이다.
둘째로는 예정은 사람들의 집단에 속하는 것이 아니고 개인들에 속한다는 점에서 “특수한” 것이다. 칼뱅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계약백성으로 선택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민족의 모든 개별적인 구성원들이 바울이 로마서에서 지적했듯이 구원을 선택한 것이다. 은혜의 언약은 각자에게 개별적으로 적용된다.
세 번째로 예정론은 이중적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자비를 찬양하도록 몇몇 개인들에게 영생으로 정하셨고, 그의 공의를 찬양하도록 다른 사람들을 영원한 정죄로 정하셨기에 이중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예정론은 모든 사람에 대하여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 것에 대한 변명으로 이용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하나님만이 누가 구원으로 선택되고 되지 않았는지를 알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께서 복음을 창세 전에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된 모든 사람들에 대한 효과적인 소명의 외적인 수단으로 사용할 것을 신뢰하면서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위의 책, 275-277쪽
7. 나가는 글
지금까지 루터의 “하나님의 의”와 칼뱅의 주권과 예정을 중심으로 은총의 교리를 살펴보았다. 루터는 기본적으로 개인의 구원의 확신에 관하여 깊은 몰두와 관심을 보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또한 종교개혁당시 중심 문제이기도 했다. 즉, 인간은 어떻게 구원을 얻는가의 문제 말이다. 중세 당시에는 이러한 구원의 문제를 인간의 행위를 주체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보는 인간론을 강조하고 있지만, 루터는 그의 성서강의를 잘 살피면 알겠지만, 철저한 그리스도 중심의 구원을 이야기하고 있다.
또한 칼뱅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은총이며 그 은총은 예정되어져 있다라고 이야기한다. 즉 기독론 중심의 구원론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루터에게 있어서 선행의 의미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단지 하나님의 의에 대한 선물이었다. 하지만 개신교는 실천 행위에 대한 또 하나의 중요한 것을 놓쳐 버렸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은 당연히 그 속에서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루터의 은총의 교리를 중심으로 한국 교회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한국 교회는 이신칭의 교리 자체를 목표인양, 행위의 열매는 거의 전적으로 무시되고 있으며, 설령 믿음의 결과를 의식하여 행동을 한다 하더라도 그 변화가 교회 중심의 생활에 국한되어 있지 않나 싶다.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사항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이신칭의 그 자체가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거기서 더나아가 그로 인한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에 중요성을 깨달아야한다.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맺게되면 이로 말미암아 신자들의 마음과 생활에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을 루터는 확신하고있었다. 복음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이신칭의로 인한 변화는 필연적으로 \'행위\'의 열매를 맺음을 강조하는 신학이 요청된다.
믿음으로 인한 변화의 실제적인 장(場)이 결국 교회를 넘어서 모든 관계 즉, 세상과 사회를 변화시키기에 이르는 것은 종교개혁의 역사가 증명하는 바이다. 루터 자신의 삶(예: 결혼)과 사상에 있어서도 이는 역력히 나타난다. \"이것은 (주: 빌립보서2장5절을 적용하면서)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향하여 행하신 것을 여러분이 안 것만큼 서로를 향해 관심을 기울이고 행해야함을 의미합니다.\"(두 종류의 의(1519)에서) 그리고 소위 \'본성적인 의\'를 3가지 의미로 해석하면서 그 둘째 의미로 이 의는 이웃을 사랑하는 데 있다\'고 말하고있다. 이형기 저, 루터의 저작선, 137쪽.
오늘의 한국교회에는 이것이 강조되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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