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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량부의 타도가 이루어 졌다고 보고 있다.
5. 결론
삼국유사를 통해 알아본 사량과 모량은 신라 역사의 시작에서부터 찬란했던 통일신라 중대까지 서로 대결하며 그 세력을 떨쳤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통일신라의 주역인 김유신 또한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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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에 머물 수 없는 신분들이었다. 전제체제를 굳히려는 왕실의 입장에서 볼 때는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계층에 해당하는 인물일 수밖에 없었다.
죽지랑에 가한 익선의 오만불손한 행위에 대해 후에 중앙정부가 모량리 사람들 전체에까지 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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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량리에/쨍쨍한/햇빛과/향기로운 바람./으뜸 산기슭에/오두막 三間/어머니와 살았다./사립문 옆에는/대추나무,/울밖에는 옹당 벌샘./그때만 해도/어머니는 파랗게 젊으시고/초가지붕에 올린 박은/달덩이만큼 컸다./서리 온 지붕에는/빨간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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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량리 사람으로 벼슬에 종사하는 자는 모두 내쫓아 다시는 관공서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였으며, 검은 옷을 입지 못하게 하고, 만약 중이 된 자는 종고(鐘鼓)가 있는 절에는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원측법사는 해동의 고승이 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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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량리 사람으로 벼슬하는 자는 쫓아 버리고 다시는 공적 기관에 들이지 않았고, 승복도 입지 못하게 하였다. 만일 승려가 된 자가 있어도 큰 절에는 들지 못하게 하였다. 또 사람에게 일러 간진의 자손을 평정호의 자손으로 삼아 특별히 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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