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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을 직접 목격했다는 사람을 찾는데는 실패했다.
대신 수백여명의 낚시꾼과 관광객이 바다를 향해 낚시를 드리우고 있었다. 9명의 보도연맹원이 떠내려 왔다는 심리 해안과 역시 수많은 유골이 묻힌 옥계리 큰골에도 온통 낚시꾼이 들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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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 마산지구 합동위령제를 거행하여 동 노현섭은 원혼이 된 영령들이여 운운 요지의 추도사를 낭독하고…(후략) 1. [양민학살을 입증한 자료]
2. [국회 진상조사 자료]
3. [유족회사건 판결기록]
4. [내무·법무차관의 국회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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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과 경찰이 자행한 이 미증유의 비극은 어떻게 해야 하나.
부끄러우니 그냥 덮어버리자 할 것인가. 이거야 말로 정말 부끄러워 해야 할 일이 아닌가. 1.[최초의 학살사건 기록]
2.[아쉬웠던 국회 진상조사]
3.[독재도 무너졌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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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을 보도할 땐 거들떠 보지도 않던 한국 언론들이었다.
이후 마산 곡안리를 시작으로 전국 곳곳에서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사건이 불거져 나왔으나 대부분의 한국 언론은 이를 노근리에 끼워 파는 일회성 상품정도로만 취급했다.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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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 돌면서 총질을 했는데, 상황이 끝난 후 군인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헤엄쳐 설진리 해안에 닿았다. 그리곤 밤새도록 걸어서 진동의 집에 도착했고, 다시 잡히지 않기 위해 부산으로 도망쳤다고 했다.
그는 윤씨보다 일곱 살이 많았는데, 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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