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방
북간도 서간도 지방 이외에 1910년대 만주지역에서 독립운동기지 건설이 추진된 곳은 북만주 소만국경의 밀산부 지방을 들 수 있다. 북만주 밀산의 독립운동기지 건설은 헤이그 밀사 사건 이후 블라디보스토크로 간 이상설과 그 곳 한민
|
- 페이지 8페이지
- 가격 2,000원
- 등록일 2007.12.29
- 파일종류 한글(hwp)
- 참고문헌 있음
- 최근 2주 판매 이력 없음
|
|
서간도지방에서의 통합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통합 후 얼마만에 주도세력 내부에 분열이 생겨 일부세력이 의군부를 만들어 부립해 나갔고, 다시 대한통의부 의용군이 중심이 되어 상해임시정부와 연결하여 참의부를 결성하였다. 이후 대한
|
- 페이지 10페이지
- 가격 1,300원
- 등록일 2002.09.29
- 파일종류 한글(hwp)
- 참고문헌 없음
- 최근 2주 판매 이력 없음
|
|
서간도 지방에서는 한족회에서 편성한 서로군정서를 비롯하여 백삼규·조맹선 등의 대한독립단, 오동진의 광복군총영, 최시흥의 천마대, 현익철·이시열 등의 광한단, 편강열의 의성단도 각기 몇백명의 독립군을 편성하여 일제와의 항전을
|
- 페이지 12페이지
- 가격 5,000원
- 등록일 2008.11.25
- 파일종류 한글(hwp)
- 참고문헌 있음
- 최근 2주 판매 이력 없음
|
|
서간도 대한광복군사령부와 대한광복군총영에 대한 재검토, 한국사연구회
윤석수(1989), 조선공산당과 6.10 항일시위운동, 한국역사연구회
황적희(1996), 6·10만세운동의 민족사적 위상, 한국민족운동사학회 Ⅰ. 독립운동과 6 10만세운동
1. 6?
|
- 페이지 15페이지
- 가격 6,500원
- 등록일 2013.07.24
- 파일종류 한글(hwp)
- 참고문헌 있음
- 최근 2주 판매 이력 없음
|
|
지방에서 일본군에 의해 학살 | 된 한국인은 훈춘현에서 242명, 연길현에서 1,124명, 화룡 | 현에서 572명, 왕청현에서 347명, 영안현에서 17명이었으 | 며, 서간도 지방에서는 804명이었다.
+- 자유시 참변 (1921) 대한 독립군단이 자유시에서 적색군(
|
- 페이지 64페이지
- 가격 500원
- 등록일 2003.01.20
- 파일종류 한글(hwp)
- 참고문헌 없음
- 최근 2주 판매 이력 없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