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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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갑신정변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머리말

2본론
1)갑신정변원인
2)갑신정변전개과정
3)갑신정변의영향과실패
4)갑신정변의 자주성

3.결론

*갑신정변주도세력 개화당 인물소개*

본문내용

을 지냈다. 왕가의 외척으로 사대당(事大黨)의 대표적 인물로서 활약하다 1884년 갑신정변 때 민영목(閔永穆)조영하(趙寧夏) 등과 함께 살해되었다. 글씨에 능하여 전서(篆書)예서(隸書)행서(行書)초서(草書)를 모두 잘 썼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민영익
본관 여흥(驪興). 자 우홍(遇鴻). 호 운미(芸楣)죽미(竹楣)원정(園丁)천심죽재(千尋竹齋). 1877년(고종 14) 정시문과에 급제, 군무변정기연사당상(軍務邊情譏沿司堂上)협판통리아문사무(協辨統理衙門事務)를 지냈다. 1882년 임오군란 때는 난군에게 집을 파괴당하고, 난이 수습된 후 사죄사절(謝罪使節)로 일본에 다녀왔다. 1883년 전권대신으로 미국에 다녀온 후 개화당을 탄압하였다. 이듬해 친군우영사(親軍右營使)로서 일본에 망명 중인 김옥균 등에게 자객을 밀파하였다. 1880년 정부의 친로거청정책(親露拒淸政策)에 반대하였다. 통위사(統衛使)의금부판사(義禁府判事)찬정(贊政)을 지냈다. 고종 폐위 음모로 홍콩에 망명하여 그곳에서 죽었다. 행서(行書)를 잘 썼고 묵란(墨蘭)에 능하였다.
민영목
본관 여흥. 자 원경(遠卿). 호 천식(泉食). 시호 문충(文忠). 1881년 이조판서에 이어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을 지내고, 평안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883년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辨交涉通商事務)로서 조 미수호통상조약, 인천일본조계조약(仁川日本租界條約) 등을 체결하였으며, 박문국당상(博文局堂上)으로 《한성순보(漢城旬報)》를 발간하였다. 갑신정변(甲申政變) 때 개화당에게 살해되었다. 영의정이 추증되었다
민종묵
본관 여흥. 자 현경(玄卿). 호 한산(翰山). 1874년(고종 1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이듬해 사은정사(謝恩正使) 한돈원(韓敦源)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임명되었다. 1876년 청(淸)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와, 홍문관부수찬 사복시정(司僕寺正) 등을 역임하였다. 1881년 승지로 있을 때 신사유람단(神士遊覽團)의 일원으로 일본 각계를 시찰하고 돌아와 혁신정책을 수립하였다. 1883년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와 사헌부대사헌을 지냈으며, 1885년 진주사(陳奏使)로서 다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89년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에 취임, 3년간 방곡령사건, 조일통어장정(朝日通漁章程) 체결 등 각국과의 통상사무를 처리하였다.
1896년 친러파가 되어 아관파천을 결행하여 학부대신이 되고, 1898년 중추원일등의관(一等議官) 홍릉제조(洪陵提調)로 임명되었다. 이때 외부대신으로 한아회사(韓俄會社)를 설립, 절영도(絶影島)를 러시아 태평양함대에 조차(租借)시키려다가 독립협회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뒤에 독립협회가 시정개혁을 요구하자, 무력으로 해체하려다가 회원들의 반발로 중지하였다. 군부 내무 법부 궁내부 대신을 지내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1910년 규장각제학이 되었다. 국권피탈 뒤 일본정부로부터 남작작위를 받았다. 편찬서에 《일본문견록》 《일본각국조약》 《일본외무성시찰기》 등이 있다.
윤태준
본관 파평(坡平). 자 치명(稚命). 호 석정(石渟). 시호 충정(忠貞). 1873년(고종 10) 진사시에 합격, 음보로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가 되었다. 1881년 수신사(修信使)의 종사관으로 일본에 다녀왔고, 이어 영선사(領選使)의 종사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82년(고종 19)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어직각(司禦直閣) 등을 지냈고,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명성황후를 보호하여, 여주(驪州)를 거쳐 충주에 피란하였다. 군란이 진압된 뒤 돌아와서 친군영(親軍營)의 감독이 되고, 이듬해 참의군국사무(參議軍國事務) 기기국총판(機器局總辦)을 지냈다.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후영사(後營使)로 사대당(事大黨)을 보호하다가, 독립당(獨立黨)의 장사패 윤경순(尹景純)에게 살해되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편저서에 《형향록(馨香錄)》이 있다.
한규직
본관 청주(淸州). 자 순좌(舜佐). 호 다옥(茶玉). 시호 사숙(思肅). 부사 승렬(承烈)의 아들. 서울 출생. 명성황후의 총애를 받고 사대당(事大黨)의 보수파 중진으로서 총융사(摠戎使) 어영대장을 지내고, 관제개혁(官制改革) 때 혜상국총판(惠商局總辦)이 되었으며, 공조판서 의금부지사(義禁府知事) 등을 역임하였다. 내정(內政) 개혁을 추진하는 독립당(獨立黨)을 탄압하고, 또 친군전영사(親軍前營使)가 되자 박영효(朴泳孝)가 지휘하던 군병까지 흡수하여 독립당의 제거 대상인물에 올랐다. 1884년 독립당이 우정총국(郵征總局)의 낙성연을 이용하여 갑신정변을 일으키자 도망하여 군졸로 변장하고 왕을 뵈려고 창덕궁에 이르렀으나, 김옥균(金玉均)의 방해로 퇴궐하다가 경우궁(景祐宮) 문전에서 독립당원 황용택(黃龍澤) 이규완(李圭完)에게 살해되었다.
이조연
본관 연안(延安). 자 경집(景集). 호 완서(翫西). 시호 충정(忠貞). 용규(用奎)의 아들이다. 1880년(고종 17) 예조참판 김홍집(金弘集)이 수신사(修信使)로 일본의 관청과 공장을 시찰할 때 이를 사헌부감찰로서 반접낭청(伴接郎廳)에 임명되어 수행하였고, 이듬해 다시 수신사 조병호(趙秉鎬)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1882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 해 고선관(考選官)으로 영선사(領選使) 김윤식(金允植)을 따라 청나라에 가서 톈진[天津]의 유학생과 공장의 상황을 조사했다. 이어 다시 사은 겸 진주사(謝恩兼陳奏使) 조영하(趙寧夏)의 종사관으로 청나라에 가서 임오군란 당시 도움을 준 것에 대해 감사하고, 한편으로 흥선대원군의 조속한 귀환을 요청하였다. 그해 청나라를 본떠 군제개혁이 단행되자 친군영좌감독(親軍營左監督)이 되고, 이어 참의교섭통상사무(參議交涉通商事務) 기계국총판(機械局總辦) 이조참의 혜상공국총판 예조참판 함경북도병마절도사를 지냈다.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개화파에 의해 사대당(事大黨)의 거물로 지목되어 한규직(韓圭稷) 윤태준(尹太駿) 등과 함께 독립당(獨立黨) 행동대에 의해 살해되었다. 뒤에 이조참판이 추증되었다.
참고문헌. 초기 개화사상과 갑신정변 연구 . 신용하 저. 지식산업사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김용구 저. 도서출판 원
한국근대사강론. 조병로 저. 경기대학교 한국근대사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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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11.18
  • 저작시기20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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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3215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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