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의 조직
본 자료는 5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해당 자료는 5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5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차

Ⅰ. 일제의 친일파 육성과 조선民내에서의 자발적 형성

Ⅱ. 조선민이 설립한 친일단체
1. 일진회 [一進會]
2. 조선언론보국회 [朝鮮言論報國會]
3. 시중회
4. 조선음악협회 [朝鮮音樂協會]
5. 상애회 [相愛會]
6. 대동동지회 [大東同志會]
7. 동민회 [同民會]
8. 조선부인문제연구회 [朝鮮婦人問題硏究會]
9. 국민의용대 [國民義勇隊]
10. 조선미술가협회 [朝鮮美術家協會]
11. 동아찬영회 [東亞讚英會]
12. 국민협회 [國民協會]
13. 애국금차회 [愛國金釵會]
14. 조선문인보국회 [朝鮮文人報國會]
15. 조선문인협회 [朝鮮文人協會]
16.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國民精神總動員朝鮮聯盟]

Ⅲ. 친일파의 조직과 활동
1. 황도유학파 친일행각
2. 기독교 각 종파의 친일행위와 그 조직

본문내용

는 일을 병행해 나갔다. 따라서 경학원과 그 소속의 향교와 부설기관은 황국신민의 교화와 조선총독부 통치에 순응하는 사상선도에 앞장섰다.
경학원은 세포조직으로 조선유도연합회를 조직했다. 1935년 평양에서 전선유림대회를 개최하고 1939년 경학원 주최로 전조선유림대회를 열고 중앙에 조선유도연합회, 도에 유도연합회, 부군도(府郡島)에 유도회를 두었다. 전시체제의 시기였던 1939년에는 총독부 정무총감을 총재에 추대했다. 조선유도연합회와 그 산하 조직은 완전한 유림의 통합조직이면서 친일조직이 되었다.
그밖에 친일유교단체가 총독부의 지원에 힘입어 경쟁적으로 결성되었다. 그 주요 단체는 공자교, 대동사문회, 유도진흥회, 조선유교회, 대동유림회, 대성학회, 명륜회, 모성회, 유림단, 태극교회, 황도회(皇道會) 등 손으로 뽑을 수 없을 정도로 난립했다. 모두 사문(斯文유교의 글)이니, 명륜(明倫인륜을 밝힘)이니, 대성(大成공자를 뜻함)이니 따위의 그럴 듯한 이름을 내걸었다.
이들 단체가 벌이는 천장절(天長節일본 천황의 생일)의 축하식 따위에 조선총독이나 정무총감이 참석하여 축사나 격려사를 했다. 식장에는 순사들이 파견되어 경비를 맡아주었다. 이런 친일행각의 대가로 총독부에서 일정한 보조금을 지원 받았으며 여러 가지 부역의 면제 등 특혜를 받았다.
그러면 여기에 참여한 군상을 보자. 경학원의 대제학에는 박제순김윤식정만조윤덕영 등, 부제학에는 이용직박기양 등, 사성으로는 이인직안인식 등, 강사로는 성낙현여규형송병순 등이었다. 명륜학원 평의원으로는 어윤적(경성)신창휴(충북)성낙현(충남)이강원(전북) 등이었다.
공자교의 발기인은 여규형김학진정만조윤덕영이인직정병조 등이요, 회장에는 이용직김학진전우 등이 역임했다. 대동사문회의 발기인은 어윤적정만조현채홍희 등, 회장에는 윤용구, 부회장에는 어윤적이 역임했다. 조선유교회의 대표자로는 김경중민건식안익식 등, 조직을 이끄는 종도정에는 윤용구, 이론을 밝히는 명리원에는 지석영정병조 등이었다. 지방의 의정으로는 송복헌(충북)김철수(충남)현준호(전남)성낙문(경남) 등이었다. 조선유림연합회의 고문으로는 박영효민병석윤덕영이윤용어담한상룡박중양현준호김갑순김성수김연수 등이며 회장은 현영운, 부회장에는 민건식이 추대되었다.
이들은 새삼스레 신분을 설명한 것도 없이 당색으로는 조선시대 지배권력을 잡았던 노론계열, 관료로는 구한말 고위의 벼슬을 지낸 인물, 그리고 나라를 팔아먹는 데에 앞장섰던 매국노들, 문벌로는 여흥 민씨와 동래 정씨, 해평 윤씨, 전주 이씨, 반남 박씨, 정치적 계보로는 개화파들이었다. 더욱이 지방의 유력 지주인 김갑순김경중현준호 등과 명망가인 성낙현성낙문 등도 끼어 있었다.
게다가 반일에 누구보다 철저했던 흥선대원군의 손자들, 일제의 손에 죽은 민비의 친정붙이들, 순종의 왕비 일가들, 부패한 나라를 바로 세우려 질타했던 박지원의 손자들이 대거 등장하고 있음에 역사의 아이러니를 연출하고 있었다. 이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든, 뱃심이 두둑치 못해 강요를 거절할 수 없었든 치졸한 친일행각을 벌였던 것이다.
2. 기독교 각 종파의 친일행위와 그 조직
▲ 1936년 1월29일 감 리교 총리사 양주삼 목사는 총독부 에서 신사 참배 순응의 뜻을, 6인에는 신사참배에 응할 것이라고 밝혔다.
▲ 성결교 구세군 성공회 등이 신사참배 결의했다.
▲ 1938년 9월 장로교 제27차 총회(총회장:홍택기 목사) 에서 평양노회장 박응월 목사가 제안하고 평서노회장 박임현 목사의 동의, 안주노회장 길인섭 목사의 재청으로 신사참배 가결. 총회 서기 곽진근 목사는 다음과 같은 신사참배 결의 성명을 발표했다. 『신사가 종교가 아니요 …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하며 이 에 신사참배를 솔선 여행(勵行)하고 추히 국민정신 동원에 참가하여 비상 시국하에서 총후(銃後) 황국신민으로서 적성(赤 誠 )을 다하기로 함』
2) 기독교지도자들의 친일행각
▲ 유형기 윤치호 박희도 차재명 목사 등이 1937년 각도 순회시국강 연에 나서서, 황국신민으로 부일협력 할 것을 주장하였다.
▲ 박희도 목사는 3.1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중 한 명으로, 친일잡 지 <동양지광(東洋之光)>을 발간했다. 부일협력을 촉구하는 논설 등을 실었다.
▲ 신흥우 목사는 당시 YMCA 총무로 재직 중이었다. 신목사는「천황 폐하의 충성스런 적자로 오직 일본을 사랑하라. 이것이 조선기독교도에게 주어진 신의 명령」 이라고 주장했다
▲김활란(이화여대 초대총장) 모윤숙(시인) 유각경(YMCA 초대 회장) 장정심(기독교여자절제 회 총무) 고황경 서은숙(배화여고 교장) 등 여성지도자 들은 신사참배 내선 일체를 강조하는 강연회 강사로 나섰고 정신대 참여를 호소하기까지 했다.
3) 성결교회 교단 해체 선언
▲ 1943년 12월29일 성결교회는 『중생 신유 성결 재림의 4중 복음교 리가 국민사상을 혼미에 빠뜨리며, 이와같은 불온 포교를 해온 책임을 통감한다. 이를 맹서하여 결정하 황국신민의 자격을 실추치 않을 것을 기한다』 며 교단의 해체를 선언했다.
조선기독교연합회
친일 종교단체. 경성기독교연합회와 지방기독교연합회의 상위 중앙조직으로 1938년 7월 결성되어 위원장 니와[丹羽淸次郎], 부위원장 김종우(金鍾宇)아키쓰키[秋月致] 등의 간부진을 구성하였다. 1935년 이후 신사참배 강요 등의 문제로 조선의 기독교가 서양 선교본부로부터 단절되자 일본은 조선기독교단의 종속화를 꾀하여 조선의 기독교를 일본식으로 흡수, 개편하는 작업을 펴기 시작하였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38년 2월 평양경찰서 주최의 교역자시국간담회가 개최되었고, 4월 서대문경찰서에서 열린 교역자간담회에서는 시국인식황도선양의 내선일체 완수를 선언하였으며, 일왕생일에는 조일교역자와 신도 1만여 명이 합동경축식전행사를 열었다. 이어 5월에는 조일교역자 20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일본계 기독교단과 조선기독교단의 최초 통합조직인 경성기독교연합회가 결성되었다. 이러한 통합조직은 곧 13도의 대소도시로 확산되었고 38년 7월 7일 서울에서 32개 지방기독교연합회 대표 71명과 경성기독교연합회가 참가한 가운데 조선기독교연합회를 발족하기에 이르렀다.
  • 가격2,000
  • 페이지수16페이지
  • 등록일2004.12.28
  • 저작시기2004.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80526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