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친일행각]친일파의 형성과 특징 및 대표적 친일파들의 친일행각 분석(친일파의 형성, 친일파의 계층적 특징, 이완용, 송병준, 이광수, 최남선, 천주교회의 친일활동, 친일파의 최후와 그 후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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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친일파][친일행각]친일파의 형성과 특징 및 대표적 친일파들의 친일행각 분석(친일파의 형성, 친일파의 계층적 특징, 이완용, 송병준, 이광수, 최남선, 천주교회의 친일활동, 친일파의 최후와 그 후손들)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친일파의 형성

Ⅲ. 친일파의 계층적 특징

Ⅳ. 친일파의 대명사 이완용

Ⅴ. 변신의 귀재 송병준의 친일행각

Ⅵ. 이광수와 최남선

Ⅶ. 일제시대 천주교회의 친일활동
1. 한국천주교회의 일제정책-정교분리론
2. 경술국치 이후의 한국천주교회
1) 안중근 의사와 한국천주교회
2) 일제초기의 교회
3) 천주교신자의 3․1운동 참여와 교회의 입장
3. 일제와 교회 유착의 심화
1) 일제와 교황청의 협약
2) 일제말기 전시동원체제와 한국교회
3) 신사참배와 교회의 태도

Ⅷ. 친일파의 최후와 그 후손들

Ⅸ. 결론

본문내용

는 \"경신의 본의에 철저히 한다는 것은 곧 신사참배이고 이것은 국가제신, 국민의 체이기 때문에 종교행위가 아니며 따라서 어떠한 신앙에도 배치되지 않는다\"고 하여 이를 정당화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신사참배는 일제의 조선침략을 위한 한국식민화 이데올로기였으며, 명백히 종교적인 내용과 형식을 가진 종교였다. 이러한 명백한 종교행위인 신사참배를 그리스도교와 같이 창조주를 절대적인 지위에 두고 일체의 다른 신을 믿지 않는 종교에서 마음에 없이 따른 것은 잘못이었다. 교황청과 일제간의 관계가 이러한 민족자존심보다 앞선다는 것이니 이해하기 어려운 조치일 수밖에 없다. 교황청은 1932년 9월 일본천주교회에 \"신사참배는 학생들에게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한 교육목적으로 실시되는 것이므로 신자들의 신사참배는 정당하다\"는 해석을 내렸다. 게다가 그리스도교회의 목적은 현세적, 정치적이지 않으므로 종교 이외의 문제에는 상관치 말라고 하
는 한편, 국가문제와 종교는 전연 별개의 문제라 하면서 신자들은 이 두 가지를 혼용해서는 안된다고 덧붙이기까지 하였다(\'경향잡지\' 1937. 2). 이 결정을 기초로 교황청은 1936년 5월 18일 천주교 신자들이 신사에 참배하여도 좋다는 훈령을 내렸다. 교황청은 이 사실을 주일 로마교황청 사절에 통고하였고, 교황대사는 까렐라 주교는 이 통고 외에도 적극적으로 신사참배를 권장하였다(\'경향잡지\' 1937년합본, 97-101쪽; 1936년합본, 218쪽). 신사참배는 의문의 여지없이 일제의 악랄한 강제와 압박 아래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교회와 일반민중은 거세어지는 탄압에 견디지 못하고 결국 거기에 굴복하였다. 게다가 교황청의 신사참배 인준이라는 명목은 천주교회가 이것을 받아들이는 일을 더욱 용이하게 했다. 그러나 신사참배는 결코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송건호가 말하듯이 신사참배는 종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첫째는 신앙의 양심문제이고, 둘째는 신사참배 그 자체에 문제라기보다 행위 자체가 일제에 대한 투항, 친일을 약속하는 상징적 행위라는 점에 문제가 있다.\" 사실 신사참배 이후 천주교회는 일제에 대해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Ⅷ. 친일파의 최후와 그 후손들
이완용은 일제시기에 관료출신으로서,세금을 제일 많이 내는 대지주였는데,그는 아주 재산관리를 잘 했다. 이완용은 친미파, 친러파,친일파로 계속 변신하는데 그의 예견대로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일본놈은 다 죽고 미국세력이 등장하였다.역시 이완용은 시대파악을 아주 잘 하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많은 재산과 작위를 갖고 영광을 누렸지만 사후에 그에게 별의별 소문이 다 씌워졌다.그중 한가지가 며느리를 첩처럼 데리고 살았다는 것인데 그건 믿을수가 없지만, 얼마나 미웠으면 이런 말이 떠돌았을까?이완용은 전라감사로 있을 때 자기 묘자리를 익산군 낭산면에다 잡아두었다.그가 죽은 후 명정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이완용지묘”라고만 썼다고 한다. 이것이 철저한 힌일파의 모습이다.그의 묘는 명정을 쓴 비단마저 썩지 않을 명당이었는데 미국에 사는 증손자 이석형씨가 묘를 파서 시체를 화장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명정은 가까운 일가가 박물관에서 사와 자기집에서 태웠다고 한다.이완용일가는 전부 친일파로 그당시는 잘살았지만 오늘날 그 자손들은 이름도 내지 못하고 살고 있다. 송병준의 손자들은 아마 이완용의 후손들 보다 더 비참하게 숨어 살 것이고, 결코 드러내놓고 살 수는 없을 것이다.
Ⅸ. 결론
그 옛날 일본의 지배하에 36년간을 피박 받은 걸 실제시점에서 볼 때 사실상 얼마 되지않는다. 하지만 우리의 반일 감정은가히 국민적이다. 왜 우리는 지나간 아픈 역사를 가슴에 담고 일본이라고 말만 들어도 치를 떠는가? 이 문제를 간단한 답으로 말할 수는 없다. 정신대 문제, 대일 무역 적자 문제, 일본 문화 전면 개방문제에 우리 정부가 보이는 자세를 보면서 더욱 그러하다. 온 백성이 일제 식민지 압박에 떨고 있을 때 일본에 빌붙어 호의호식하던 친일파는 해방이후에도 지도층 인사로 남아 우리나라를 좀 먹었고 아직도 그들의 후손이 지도층에서 칼을 휘두른다는 모순이 우리의 반일 감정의 골을 더더욱 깊이 하는 것이다. 이 책에 쓰여진 4편의 글에서 친일파의 행적일본의조선침략의 야욕,일본의 우리나라 역사왜곡 문제들을 알아 볼수있었고앞으로우리의 자세를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윤대원의 글은 총론격이라고 할 수있는데 일제 때 친일파의 잘못된 논리, 해방 후 그들이 처벌받기는 커녕오히려 보호받고 사회각계에서 자리잡아 나갔으며 신판 친일파가 형성되현실을 비판하고,온전한 민족사의 정기를 바로 세우고 통일과민주화나아가려면 부정을 통한 긍정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강조하였다. 물론 해방 후 친일 문제는 식민지적 구조의 재생산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그 위에 덧칠된 친미 반공의 논리 등 온갖 반민주적이고 민중적인 의식과 문화적 이데올로기의 잔재까지도 포함하고 있음을 빠뜨리지않강창일의 글에서는 일본 근대 사상의 흐름과 그 속에서 나타나는 그들의 조선 침략론을 정리하였다. 근대 일본 안에서는 수많은 사상의 흐름이 있었는데 그들사이에 갈등은 있었으나 대부분 조선 침략을 긍정하였다. 곧 조선 문제를 통해 이본의 위기 극복이나 발전의 밑거름으로 삼은 것이다. 오늘날에도 한국에 대한 일본의 태도는 강경이든 온건이든 , 무단적이든 회유적이든 모두 자기 나라의 이익을 기반으로 하는 점은 같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가로놓인 과제는 복잡하고 심각하다. 더군다나 일본사회의 보수화 분위기에 편승한 신군국주의 부활 조짐은 문제의 심각성을 더하게 한다. 이러 할때 싫든 좋든 한국과 일본이 걸어 온 지난날의 관계에 대한 역사적 재조명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속에서 현재 일본이 추진하고 있는 전후 정치의 총 결산의 진정한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김재웅의 글은 현재 일본의 움직임, 해외 자위대 파견이나 경제적으로 아시아 지역을 지배해 들어가는 등 신대동아 공영권이 형성되어 가는 모습을 그리면서 경개심을 불어넣고 있다. 침략의 이데올로기는 총칼보다 더 무섭다고 하겠다. 그러한 이데올로기로서 아직까지도 우리 사회에 끈질기게 남아 있는 것은 바로 식민사관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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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6.25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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