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해석의 해석학적 의의와 방법론적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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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 언

Ⅱ. 경서 구결의 배경

Ⅲ. 언해본과 논어

Ⅳ. 논어해석과 구결의 문제
1. 현토( 〓 구결)
1) '인저'와 '아'(서술과 의문)
2) ‘아’와 ‘인저’
2. 구두와 현토
3. 구두와 착간 현상

Ⅴ. 경전해석의 해석학적 의의

Ⅵ. 결 론

본문내용

命先生評定四書五經諺解 先生已有所定 大學吐釋 及承命 論孟中庸 以次讀成 而於經卽未及 是以 雖其不果進御 然四書 卽釐正舛訛 以發歸趣 更無餘疑 夫然後 朱子之旨 燦然復明……惜乎 論孟圈評 失於兵 只有庸學傳於世 而諺解竟亦不行 謄本凡例 又不無抵齬 或有釋而無吐 然一吐一釋之間 旨義精確 其開發後學 類非今官吐之所可及也 其後 朴南溪 李陶菴 修整而刊行之 噫 書之顯晦 亦有數存焉也
이 사서석의는 경서구결과 해석에 대하여 이미 퇴계가 경서석의를 저술하여 많은 문제점을 바로잡기는 하였지만 小註까지 완비하였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에 다시 짓게 된 것이라고 宋秉璿은 『四書釋義』序文에서 밝히고 있다. 율곡의 사서석의가 관토본이나 퇴계의 경서석의와 크게 다른 점을 든다면 다음과 같다.
① 주격조사 '이'를 없앴다. 예 : '子ㅣ曰'을 '子曰'로
② '故'·'是故'·'是以' 밑에는 吐를 달지 않았다.
③ '後'·'然後' 밑에는 吐를 달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그 구절이 길 경우엔 간혹 기도 하였다.
④ '則'·'以'는 바로 그 앞에서 구두를 떼고 아래로 잇지 않았다.
오늘날까지 남겨진 경서 구절은 결코 한 두 사람의 노력이나 한 두 차례의 작업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조선 왕조의 유학 진흥정책은 그 어느 왕조보다 활발하였다. 경서는 곧 經世之學으로 인식되었다. 때문에 우리의 조상들은 정치·경제·문학·역사·예술·철학 등 모든 학문의 바탕이 이 경서 속에 갖추어져 있다고 확신하였던 것이다. 벼슬하기 이전은 말할 것도 없고 과거를 거쳐 등용된 뒤나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도 경서공부는 중단되지 않았다. 심지어 왕과 중신들인 모여 국가의 중대사를 논의하고 주요 정책을 결정하는 經筵席에서도 이 경서 공부만은 예외없이 활발하게 시행되었던 것이다.
) 경연석에서의 경서강론은 朝講 晝講 夕講이란 이름으로 매일 3차례 이루어지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 사실은 『조선왕조실록』을 펼쳐 보면 어느 책 어느 페이지든 나올 정도이므로 논증은 생략한다.
Ⅵ. 결 론
우리나라의 경학은 중국의 한학처럼 금문학파나 고문학파 중 한 학파에 소속되어 발전한 역사는 없다. 우리나라 경학은 사장학과의 대립과 조화 속에서 나름대로 꾸준히 발전하여 왔다. 특히 조선조에 들어와서 국가정책이 유학을 숭상하였으므로 오랜 세월동안 축적된 경서 지식을 바탕으로 구결과 훈석을 통한 경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국초인 태종·세종 때부터 학자들을 모아 관토 연해본을 마련한 것도 여러 학자들의 설을 하나로 통일할 필요가 절실하게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서연구를 일생의 업으로 삼고 끊임없이 공부하는 학자들의 안목을 이 관토본 언해가 계속 만족시킬 수는 없었다. 이런 연유로 퇴계는 經書釋義를 만들어 관토본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교정하였고
) 『經書釋義』 跋. 聚諸家訓釋而證訂之 又因門人所嘗問辨者而硏究之 皆先生手自淨錄自也
율곡 역시 관토본과 퇴계의 經書釋義의 토대 위에서 그 미비점을 보완하고 그 문제점을 지적하기 위하여 四書釋義를 썼다. 이렇듯 경서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지만 거기엔 뛰어넘을 수 없는 한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과 같은 송병선의 말은 이 점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先聖의 교훈이 四書보다 상세한 것이 없고, 사서의 뜻을 잘 해석하기는 주자주보다 더 갖춘 것이 없다. 주자의 도는 곧 先聖의 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자가 밝힌 것은 극히 精緻하여 물셀 틈없이 완벽하게 先聖의 교훈에 부합한다. 우리나라엔 諺解가 있어 先聖의 교훈을 우리말로써 풀었지만 諸家의 학설이 서로 다른 것이 문제였다. 퇴계선생이 여러 학설을 모아서 그 단점은 버리고 장점은 취하되 한결같이 주자의 해석을 따라서 그 구두를 떼고 뜻을 해석한 덕에 경서를 쉽고도 분명하게 배울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 경서석의가 完備하다고 할 수는 없으며 잔주(小註)에까지는 힘이 미치지 못한 점이 있다. 이 점이 바로 율곡선생이 『四書釋義』를 지은 까닭이다.
) 宋秉璿 『四書釋義』 序文. "先聖之訓 莫詳以四書 四書之旨 莫悉乎朱子之註 朱子之道 卽先聖之道也 是以 其所發明 極爲精緻 盛水不漏 吻合聖訓 諸家互有異同 至退溪先生 聚衆說 而絶短取長 一從朱子之解 以釋其句讀 解其旨意 其爲學之便捷 不翅指掌 然猶未克大備 而至於小註 有不暇及矣 此栗谷先生 釋義之所以作也"
이것은 우리나라의 경서연구가 朱子集註의 범위를 결코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것을 보여준 일례로 생각된다. 경서에 대한 구결 훈석 등 모든 경서연구가 朱子註의 범위에서 이루어졌으며 그 연구에 대한 비판적 연구나 평가의 기준마저도 역시 朱子註가 될 수 밖에 없었다는 역사적 한계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논어의 구결을 재검토하여 그 문제점을 논의해보고 다른 주석서를 참고하여 새로운 구결을 제시해 보았다. 문제의 지적이나 대안의 타당성을 논증함에 있어 논리 전개 방법상의 문제점은 없지 않겠지만 지금까지 오직 국어학적 측면에만 치우쳤던 구결 연구를 구결의 본래 기능인 경전 해석의 보조수단으로서의 구결에 대한 연구쪽으로 되돌린 의의는 있다고 본다. 본 논문에서 필자가 제시한 口訣의 타당성 여부는 앞으로 여러 학자들에 의하여 비판되고 검증되겠지만 본 연구가 국어학 논문이 아니라 經典解釋 방법론적 측면에서 논의된 첫 번째 논문이라는 점은 오랫동안 중단되었던 구결연구의 전통(위에서 고찰한 대로 특히 유학을 국교로 했던 조선조에서 관토본 구결 제정을 초기부터 서두른 동기가 여러 학자들에 의해서 잡다하게 이루어진 경서 구결을 하나로 통일하려는 데에 주목적이 있었으며 관토본이 제정된 이후에도 구결의 재검토와 수정연구는 중단되지 않았으나 근대 서양 학문이 들어온 이후에 이러한 전통이 논문으로 이어지지 못하였다.)을 잇게 하는 촉매재는 된다고 본다. 이번 연구가 비록 論語 하나에 국한되었지만 경전 해석과 구결 관계의 중요성을 생각할 때, 經典 註釋 자료의 다양화 대량화로 말미암아 經典 해석의 폭이 훨씬 넓어진 지금 이 論語 口訣 연구는 다른 官本 經書口訣에 대해서도 전반적인 연구와 검토가 필요하겠다는 점을 우리에게 일깨워 준 계기는 되었다고 생각한다. 또 구결의 현대화 문제도 그 필요성 여부부터 연구 검토되어야 할 우리들의 과제가 아닌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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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3.14
  • 저작시기200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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