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세기 고구려전쟁
본 자료는 5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해당 자료는 5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5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5세기 고구려전쟁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들어가는 말

1. 고구려의 대외관계

2. 고구려의 영토확장

3. 5세기 고구려 주도의 전쟁

4. 고구려 성곽

나오는 말

본문내용

나타났다. 고구려는 소수림왕고국양왕대에 선왕의 복수를 위하여 백제공략을 집중적으로 전개하였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오히려 고국양왕이 요동지방의 정세변화를 활용하여 요동지방으로 진출하게 되자 백제는 이를 틈타 맹렬한 반격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삼국사기와 광개토왕릉비에 비록 약간씩의 기록상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고는 하지만 고구려의 군사적 우세가 지속되었음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평양으로의 천도를 단행한 장수왕은 중국과의 관계가 안정되자 백제공략에 나서 마침내 백제수도 한성을 점령하고 개로왕을 살해하는 등 한강유역을 점령하였다. 이 일로 백제는 웅진으로 천도하게 되었다. 이후 고구려는 충청도 내륙지방으로까지 영토를 넓히게 되었다.
ex)중원고구려비
한편 고구려는 신라 지역에 대하여도 세력확장을 전개하였다. 양국관계는 광개토왕대에 본격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이는 양국간의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 광개토왕은 백제를 견제하기 위하여 신라와의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는데 이러한 관계속에서 신라지역에 침입한 백제 및 왜군을 격퇴시켜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양국관계는 480년(장수왕 68) 말갈(靺鞨)의 군사와 함께 신라 북부를 공략하여 고명성(孤鳴城) 등 7성을 함락시켜 남으로는 아산만(牙山灣)에서 동쪽의 죽령(竹嶺)에 이르렀고, 북서쪽으로는 랴오허강[遼河] 이동(以東)의 만주지방 대부분을 차지하여, 한국 역사상 최대의 제국(帝國)을 건설하였다. 내정개혁에도 힘을 기울여 부족제도를 지방행정제도로 고쳐 5부를 신설하는 등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룩하였다.
신라주둔병이 살해당하는 장수왕대에 이르러 대립관계로 전환되었다. 장수왕은 신라를 공격하여 울진, 영덕에 이르는 선까지 영토를 넓히게되었다.
고구려의 이지역에 대한 영역지배는 백제신라의 강력한 반발에 의해 상실하게 되는 6세기 경가지 지속되었다.
4) 동부여(東夫餘)지역에 대한 영역확장
당시의 동부여는 고구려의 동쪽 즉 한반도 동해안지역에서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집단이었다. 이 지역에는 일찍부터 예족집단(穢-더러울 예族集團)이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왕 또는 태조왕대 고구려에 복속된바 있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이들 예족집단에 대한 기록이 의도적으로 배제되고 대신에 말갈(靺鞨)이라는 명칭으로 기록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따라서 삼국사기에 기록을 통하여 4세기대 고구려의 동쪽에 예족집단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광개토왕릉비에 기록된 대외정벌기록(永樂 20)에 나타나고 있는 예족과 동부여는 동일한 대상에 대한 각기 다른 표현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결국 동부여는 광개토왕릉비의 표현처럼 64성, 1,400촌이라는 넓은 지역에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집단으로서 광개토왕에 의해 점령되었던 것이다. 이로서 고구려는 한 때 고구려의 세력권이었던 동부여지역에 대하여 재차 지배권을 확립할 수가 있었다.
고구려의 동부여 지역에 대한 영역지배는 고구려의 멸망시까지 지속되었다.
5)기타지역에 대한 영역확장
먼저 북부여(北夫餘)의 건국
종실(宗室)의 해모수(解慕漱)는
그의 선조가 고리국(藁離國) 사람으로 47대 고열가 단군임술 57년(B.C. 239)에 웅심산(熊心山)에서 군사를 일으켜 몰래 수유(須臾)와 약속하고 수유후(須臾候) 기비(箕丕)를 번조선의 왕으로 삼도록 하여 상하운장(上下雲障)을 지키게 했다.
옛 서울인 백악산을 습격하여 점령하고는 스스로 천왕랑(天王郞)이라 하고 연호를 고구려라 하고 북부여를 세우니 고열가 단군이 계해 58년(B.C. 238)에 제위를 버리고 아사달(阿斯達)로 들어갔다.
이에 진조선은 오가(五加)가 6년 동안 공화정치를 하다가 해모수가 번조선의 왕인 기비(箕丕)와 결탁하여 오가(五加)들을 회유하여 기사년(B.C. 232)에 단군으로 추대된다.
고구려인들은 북부여, 졸본부여, 고구려를 합하여 고구려의 건국연대로 보았다.
왜냐하면 고주몽(高朱蒙)은 해모수(解慕漱)의 4대 손으로
해모수(解慕漱)→고진(高辰 : 해모수의 둘째아들)→고모수(高慕漱 : 고진의 손자로 본명은 불리지(弗離支)이다)→고주몽으로 이어지는 혈통을 가졌으며, 동부여(가섭원부여 : 해모수계)에서 탈출하여 졸본부여(동명계)로와 6세 단군 고무서(5세 단군 고두막(동명)의 태자)의 부마가 되어 그 대통을 이어받아 고구려를 창건하였기 때문이다.
북부여지역에 대한 영역확장이다. 고구려는 길림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세력을 떨치고 있던 북부여를 압박하여 서쪽의 중국 지린성(길림성) 창춘시 북부 쑹화강[松花江]의 지류 이퉁강[伊通河] 유역에 위치한다.
농안방면으로 몰아내고는 이 지역을 영역화하였다. 농안방면의 북부여는 이후 전연 및 고구려의 압박에 시달려 계속 위축되었다. 만주족
14)랴호허강 중국 둥베이[東北] 지방 남부 평원을 관류하는 강.
15)흑룡강성에 위치
물길(勿吉)의 세력확장에 위협을 느낀 북부여는 마침내 494년 고구려에 항복해 옴에 따라서 고구려
안방면의 북부여마저도 영역화하였다.
고구려는 서북쪽으로도 진출하였다. 고구려는 서
요하부근에 세력을 가지고 있던 거란을 공격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시켰다. 나아가 그 서북방에 있던 실위에 까지 철을 공급해주는 등 내몽고 동북부지역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한편 숙신은
녕안현 일대에 있던 종족으로서 일찍이 고구려에 복속된 바 있다.고구려는 동북쪽의 숙신지역에 대한 보다 확고한 지배를 위하여 군대를 파견 정벌하였다.
4.정리
4세기 후반부터 5세기 전반에 걸쳐 고구려는 북방을 향해 대규모의 정복 활동을 벌였다. 그 결과, 고구려의 전성기인 5세기 후반부터 100년에 걸쳐 고구려의 영토는 서쪽으로 요하(遼河) 유역, 북쪽으로는 농안(農安) 또는 그 이북, 동쪽으로는 두만강 하구 유역과 연해주 일부, 남쪽으로는 경기만~소백산맥 이남~삼척을 잇는 지역으로 팽창했다.
고구려는 5세기 중반에서 후반에 이르기까지 동, 북으로는 북부여 및 동부여지역을 정복하고 서쪽으로는 요동지역을 영토화하였고 남으로는 신라와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유역 및 충청도내륙의 북부지역과 소맥산맥이남의 영일만에 이르는 지역에까지 이르는 넓은 영토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 가격2,000
  • 페이지수15페이지
  • 등록일2017.07.15
  • 저작시기2017.7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1029700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