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릉비에서 찾아본 고구려의 천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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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광개토대왕릉비에서 찾아본 고구려의 천하관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들어가는 말
Ⅱ.광개토대왕릉비
1.광개토대왕릉비 원문 및 해석
2.광개토대왕릉비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천하관.
Ⅲ.나가는 말
-참고문헌

본문내용

묘인의 제도를 만들어 지금 이후부터는 서로 전매를 하지 못하게 했다. 비록 부유한 사람이 있어도 역시 마음대로 살 수가 없다. 그 령을 위배하면 판자는 형을 받고 산자는 제도에 따라 수묘케 한다.
Ⅱ.광개토대왕릉비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천하관
광개토대왕릉비(이하 릉비)에서 천하관을 추정 할 수 있게 하여 주는 기록의 유형은 크게 5가지 정도로 나뉘게 된다.
첫 번째, 고구려가 신성한 국가이며 하느님의 자손 국가이기 때문에 천하의 중심이라는 형식의 기록이다. 이러한 기록의 유형은 주로 릉비 원문의 ‘건국’ 부분에서 대표적으로 등장하는 형식이다. 그의 어머니가 물의 신인 하백의 딸이며 추모왕이 알에서 탄생 하였다는(母河伯女郞. 剖卵降世) 기이한 출생에 관한 이야기나 생전에 왕업에 뜻을 두지 않고 황룡을 내리게 하여 그 머리에 타고서 승천 하였다는(遣黃龍來下迎王, 王於忽本東, 履龍頁昇天) 이야기들은 건국시조 추모왕의 그 출생이나 살아서의 기이한 행위들을 부각하여 추모왕이 신성하며 곧 그가 건국한 고구려라는 나라 또한 신성하여 천하의 중심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그들의 천하관을 엿볼 수 있다.
두 번째, 고구려의 주변의 국가들을 초기부터 고구려에게 신속하였던 하위의 국가들이었다는 형식의 기록이다. 이 경우는 릉비 전체를 통틀어 정복부분에 딱 2번 등장 하는데 영락 5년의 백제와 신라가 본래는 오래 전부터 고구려에 신속하여 조공을 바쳐온 나라였다는(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 기록과 영락 20년의 동부여가 추모왕때부터 신속하였던 국가라는 기록이 바로 그것이다.(東夫餘舊是鄒牟王屬民) 그러나 위와 같은 2개의 기록은 진실과는 조금 거리가 있다. 백제의 경우는 고구려와 항시 황해도 지방을 두고 치열한 접전을 버릴 정도의 역량을 가진 나라였고 심지어는 371년 근초고왕의 강력한 백제군은 평양성에서 농성하던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 시킬 정도였기에 오래전부터 고구려에게 신속하여 있었다는 것을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 신라의 경우는 애초에 고구려와 신속 관계를 맺고 그 영향권 하에 놓인 때가 광개토왕이후부터여서 또다시 오류가 생기며 동부여의 경우는 비록 그 정체가 확실 하지 않으나 추모왕 당시에 고구려에 위협적인 세력이었다는 것을 상기할 때 릉비의 기록들은 모두 거짓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러한 거짓을 기록해 놓은 것일까? 이것은 당대의 사람들의 생각에 동부여와 백제 그리고 신라는 그들에게 편입되고 신속 되어야할 존재로 인식 되었기 때문이다. 중원고구려비에서 고구려인들이 신라를 동이(東夷)라고 칭한바가 있듯이 고구려는 주변국들 위에 군림하는 존재였던 것이다.
세 번째, 실제적인 상하관계에 관련된 기록이다. 릉비에서 조공에 관련된 기록은 총 4번 등장한다. 영락6년, 백제를 공략함에 백제왕이 스스로를 노객이라고 칭하며 항복하게 된다.(永爲奴客.) 여기서 주목할 만한 표현은 노객(奴客)이라는 표현인데 이는 동등한 위치인 백제의 왕과 고구려의 왕의 관계에서 한쪽이 어디까지나 의미상 노예의 신분으로 아래로 격하 되는 것을 의미하여 반대로 한쪽이 격상 되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이 노객이라는 표현은 영락9년 신라 내물왕에 의하여 다시금 등장하는데 또 다른 상하 질서가 잡히는 것이오 고구려인들의 천하관을 또 다시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이외에도 실제적인 상하관계에 관련된 기록은 영락 8년에는 백신토곡을 정벌하여 조공을 바치게 하였고 영락 10년에는 신라를 구원하고 조공을 바치게 하였다는 것들이다.
네 번째, 자신들의 천하에서 질서를 유지하였다는 기록이다. 주로 자신들의 천하에 악당인왜(倭)와 이들과 통교하는 백제에게서 질서를 지키는 모습이 나타난다. 예로 영락 5년 왜가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기록 (倭以辛卯年,來渡□破,百殘□□新羅以爲臣民.)과 영락 9년 백제와 왜과 다시금 교류하자 왕이 친히 남쪽 평양으로 순행하였다는 기록(百殘違誓 與倭和通, 王巡下平穰)그리고 영락 10년 왜에 의하여 국가적 위기에 처한 신라를 구하는 기록을(敎遣步騎五萬, 往救新羅. 從男居城, 至新羅城, 倭滿其中. 官軍方至, 倭賊退) 들 수 있다. 비록 영락5년의 기사는 고구려의 질서 유지와 그다지 관계없는 기록으로 보이지만 릉비의 기본적인 문자를 해석하는 단계에서의 오류나 혹은 마모되어 보이지 않는 문자들의 존재로 인하여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는 행위의 주체가 고구려라는 해석도 가능하며 설사 그 주체가 왜 일지라고 왜의 침입을 호태왕의 업적을 각석하는 릉비에 아무 연유 없이 기록할리는 만무하고 자신들의 천하에 왜라는 이물질(?)이 들어갔음을 보여주는 기록으로 이해 한다면 충분히 고구려인들의 천하관을 보여주는 예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섯 번째, 각지에서 끌려온 수묘인들의 존재이다. 첫 번째의 유형을 제외하고 모두 정복의 부분에 있었던 것이 반하여 수묘의 부분에서 등장하는 이 다섯 번째 유형은 호태왕 사후 장수왕이 호태왕의 유언에 따라 정복한 한예(韓穢) 지역민을 이주시켜 수묘인으로 삼았다는(安守墓者, 但取吾躬巡所略來韓穢, 令備酒掃.) 기록에서 천하관을 엿볼 수 있다. 즉 고구려가 새롭게 지배하게 된 지역의 백성들을 수묘인으로 삼음으로써 죽음의 세계에서도 그들보다 우월하다는 원초적인 천하관인 것이다.
Ⅲ. 나가는 말
지금 까지 광개토대왕릉비의 원문을 해석하여 보고 그 속에서 천하관을 찾아보았다. 이러한 행위는 이미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재창조의 작업이다. 당대 사람들이 남겨둔 기록을 보고서 사람들의 생각이라는 어찌 보면 추상적인 모습으로 재탄생시키는 작업인 것이다. 언제나 순수한 과거의 진실을 추구해야 하는 역사에서 이러한 작업은 너무나도 위험한일 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과거를 알아가는 데 과거의 생각과 천하관을 조금이 나마 추측 할 수 있다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며 큰 의미를 가질 것이다.
참고문헌
http://www.koreandb.net/sam/ - 디지털 한국학 삼국사기
노태돈, 「5 세기 금석문에 보이는 고구려인의 천하관」, 한국사론, 1988
권오엽, 「문학 , 일본학 편 : 동아시아의 천하사상 - 광개토왕비문신화와 『 고사기 』 를 중심으로」, 일어일문학연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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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17.10.18
  • 저작시기2017.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10366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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