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부흥운동의 원인과 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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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백제 부흥운동의 원인과 발단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들어가는 말
Ⅱ. 백제의 멸망과 당의 지배
Ⅲ. 백제 부흥운동의 원인
1. 백제인들의 패망 부정
2. 당나라의 약탈과 지배
3. 신라의 차별
4. 흥망계절의 사상
5. 세력 보존의 필요성
Ⅳ. 나가는 말
-참고문헌

본문내용

록대부(金紫光祿大夫) 위위경(衛尉卿)으로 추증하는 『삼국사기』의 기록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백제의 유민들은 승자의 입장에서의 흥망계절이 아닌 실제로 백제를 부흥시키겠다는 사상 하에 이러한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즉 본래 유교적인 추상적 개념의 사상이 나라의 멸망이라는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부흥군적인 형태로 변화해서 사용되었던 것이다. 이런 것들을 비추어 보면 멸망 당시의 백제는 유교적 관념이 지배층을 중심으로 널리 퍼져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의 역사에서 보면 박사 제도를 두어 시박사(詩博士), 경박사(經博士) 등 박사제도를 실시하였고, 성왕 19년(541)에 남조인 양에 유학자를 요청한 것으로 보아 유학에 대한 욕구가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일본에 왕인과 아직기를 파견해 유학과 한문을 전파해 준 이야기는 유명하다. 의자왕의 실정 후 목숨을 걸고라도 국가에 충성하겠다는 마음으로 간언을 한 성충과 흥수에게서도 유학의 충(忠)사상을 엿볼 수 있다. 이렇듯 백제는 사회 전반적으로 유교적인 관념이 뿌리 깊게 박힌 사회였다. 이러한 사상적 배경으로 부흥군의 지도자들은 부흥의 기취를 걸고 봉기할 수 있었고, 유민들도 별 어려움 없이 부흥군에 자연스럽게 동조할 수 있었던 것이다.
5. 세력 보존의 필요성
소정방이 백제를 평정하니, 흑치상지는 휘하의 무리를 이끌고 항복하였는데, 소정방은 늙은 왕을 가두고 병사를 풀어 크게 약탈하였다. 흑치상지는 이를 두려워하여 주위의 추장(酋長) 10여 인과 함께 달아났고, 도망친 이들을 불러 모아 임존산(任存山)에 의거하여 스스로 굳게 지켰다. 열흘이 되지 않아 (도망쳐)돌아온 자가 3만이 되었다. 소정방은 병사를 이끌고 흑치상지를 공격하였지만, 이기지 못하니 마침내 200여성이 회복되었다. 『삼국사기』권제44 열전 흑치상지중
蘇定方平百濟常之以所部降而定方囚老王縱兵大掠常之懼與左右酋長十餘人遯去嘯合逋亡依任存山自固不旬日歸者三萬定方勒兵攻之不克遂復二百餘城
위의 사료를 살펴보면 처음 당군에 투항하였고 소정방이 의자왕을 핍박하는 모습에 참지 못하고 좌우 추장(酋長) 『백제부흥운동연구 』저자는 이것을 군장(君將)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함.
10여인과 함께 임존산으로 가서 조직적으로 부흥운동군을 이끌었다고 한다. 흑치상지는 자신의 세력지에서 3만명이나 되는 적지 않은 유민들을 모을 수 있었고 조직적인 부흥운동을 전개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점이 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해 봤을 때 황산벌에서 계백의 5천 결사대가 패배하고 난 후, 사비성의 군사들이 항전하다가 의자왕이 항복함으로써 백제가 멸망했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흑치상지가 3만 명이나 되는 군대를 동원할 수 있었다면 왜 백제 멸망 전에 소집하여 항전하지 않은 것일까? 이것에 대한 답변으로 나당연합군의 침공에 따른 위기상황에서 지도층이 분열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나당연합군이 사비성으로 진격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백제의 조정에서는 대책마련을 두고 의견이 분분하였을 것이다. 이로 인해 조정에 처사에 불만을 가진 자들도 생겼을 것이고, 그 이후로 백제 조정에 비협조적인 자들도 생겨났을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흑치상지이다. 의자왕이 항복함에 따라 모든 관리가 함께 항복했지만, 흑치상지를 비롯한 지방에 세력을 둔 군장들은 백제의 존망과는 관계없이 자신들의 세력을 지키고자 했을 것이고 당이라는 큰 세력과 전투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세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백제부흥이라는 명분을 들고 일어난 것이다.
흑치상지와 비슷한 시기에 봉기한 부흥군 지도자의 지위와 봉기지역을 연결시켜 본다면 그 사례는 더 다양해진다. 두시원악(豆尸原嶽) 충청남도 청양군 정산면 소재
에서 봉기한 좌평 정무(正武), 서부에 은솔(恩率)인 복신, 중부에 구마노리성(久麻怒利成)의 달솔인(達率) 여자진(餘自進), 우술성(雨述城)의 달솔(達率)인 조복(助服), 별부장(別部長), 사타상여(沙相如)등 거의 지방군장들을 중심으로 부흥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사례를 통하여 지방군장들이 지방에서의 본래 자신의 기득권을 나당연합군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봉기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김영관『백제부흥운동연구 』 서경출판사 2005년 p89
Ⅳ. 나가는 말
660년 백제가 멸망하고 663년 백강구에서 일본의 지원군이 크게 패하기까지 약 3년의 기간 동안 백제 부흥군은 무력항쟁을 벌였고 이는 소기의 성과를 이루기도 하였다. 이러한 부흥군의 격렬한 저항속에는 반발할 수밖에 없었던 피정복민의 많은 동기들이 존재하였다. 그것은 애초에 조국의 멸망이라는 사건에 대한 마음으로 부터의 부정에서 시작해서 지배자인 당의 약탈 행위와 문화적인 차이 그리고 신라인들의 차별대우, 마지막으로 백제인들의 흥망계절의 유교적인 태도는 백제인들이 부흥군으로 격렬하게 백제의 부흥을 위하여 싸우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으며 중요한 동기가 되었던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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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태,「신라 문무왕대의 대복속민 정책-백제유민에 대한 관등수여를 중심으로-」,
『신라문화』, 신라문화연구소, 1999.
김수태,「연기지방의 백제부흥운동」, 『선사와 고대』19, 한국고대학회, 2003.
김영관,『백제 부흥운동연구』, 서경출판사, 2005.
김원심, 『역주한국고대금석문』, 한국고대사회연구회, 1992.
김종복, 「백제와 고구려 고지에 대한 당의 지배 양상」,『역사와 현실』78,
한국역사연구회, 2010, p,75.
노중국, 「백제멸망 후 부흥군의 부흥전쟁연구」, 『역사의 재조명』, 소화, 1995.
이용빈,「백제 5방체제의 통치조직과 지방관의 성격」, 『명지사론』13, 명지사학회, 2002.
황인덕,「백제패망 전설들로 본 백제사, 백제사의식」, 『百濟硏究』24 , 백제연구소, 1994.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삼국사기』.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당유인원기공비』.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대당평백제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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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7.10.18
  • 저작시기20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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