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리고 그것을 누구보다 잘 말했다고 생각하는 철학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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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미학]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리고 그것을 누구보다 잘 말했다고 생각하는 철학자는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 그래서 두 사유는 불교식으로 말하면 모두 아집과 법집에 빠져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타유는 서양철학이 반쪽만을 크게 말하고, 나머지 반쪽을 감추거나 숨긴 것을 풍자하면서, 이런 사상은 특히 헤겔에게서 완성되었는데 전체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으로서의 철학이라고 일렀습니다. 그는 헤겔의 노동철학이 세상에서 웃음을 배제한 반(反)놀이의 철학이라며 조롱하고, 심각하게 고민하는 철학자가 에로티시즘에 젖어 그 세계에 몰두하는 장면을 연상하면서 웃을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한 세상을 폭로했습니다. 이성의 철학은 동일성의 강요와 같고, 헤겔이 말한 이성과 현실성의 동일화는 동일성의 철학에 대한 본질인 셈입니다. 그래서 신학과 헤겔의 철학은 다르게 생각하는 여유가 없고, 결정적으로 거기에는 놀이하는 인간 즉 웃음이 빠져버렸습니다. 무(無)에서부터 신(神)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다 이성(지성)의 능력으로 에누리없이 파악하는 철학이 헤겔의 사유였건만, 그의 철학이 너무 진지해서 마음의 여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삶과 의미와 노동과 구원만을 생각하는 사상은 늘 어떤 한계와 제한을 강력하게 두고 그 한계를 정돈하며 마음을 다스립니다. 하지만 놀이하는 인간은 그 한계와 제한을 위반합니다. 그 위반에서 바타유는 예술이 탄생된다고 보았습니다. 인간의 무의식에서 질서와 정돈을 지나치게 숭상하고 외설적인 이타학을 증오하는 인간은 성스러움의 표면적인 의미만을 알고 그것의 이면적인 것을 지우려는 어리석은 인간에 비유되기에 모든 성스러움은 벌써 위반요소를 머금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또 성스러움은 더럽혀지기 위하여 존재한다는 역설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반면에 반철학으로서의 외설학은 절대적인 숭고함, 성스러움을 이미 버렸기에 좁은 도덕주의적 집착에서 이미 벗어난 자유로운 존재입니다. 아름다운 꽃이 더러운 거름의 소산이라는 것을, 세상의 모든 부분들이 양면적이고 이중적이라는 것을 알기에 연기하는 차연의 존재이기에 다른 사람과 다른 세계관을 가진 사람에게 관용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타유가 말하는 예술적 창조는 우리가 단순히 좁은 의미의 예술 작품 창조를 통해서 경험할 수 있는 한정된 차원을 초월해서 삶 자체의 지평으로까지 확대된 포괄적 의미의 행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개인적 취향의 만족을 위한 과거의 사상가나 그와 관련된 역사 등을 우리가 다시 재 서술을 통해 자아창조 활동의 결과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적 영역에서 우리는 오직 이 같은 방식의 재서술만으로 그 이전의 사상이나 개념 등에 대해 현재의 비판이나 사고방식이 맺는 관계가 옳고 그름의 관계가 아닌 과거의 우연성의 결과와 지금의 우연성의 결과가 조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술작품은 예술가의 마음에 있는 관념 또는 감정인 동시에 이 관념이 특정한 예술 비평 형식으로 어울려 변형되는 사적인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술적 창조는 과거에 대한 자신의 재서술의 우연성을 기꺼이 인정하는 사람만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니체에게 예술은 진리보다 더 가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진리란 자신의 절대성과 불변성을 고집하는 경향이 있으나 예술은 그렇지 않고 자신의 입장 자체의 허구성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가치 평가를 하는 주체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런 주체의 관점에서만 가치 평가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니체에게 이 같은 주체는 바로 삶(Leben)이었습니다. 모든 것은 삶의 관점에서 판단되고 평가될 수 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 삶이 모든 것을 평가하고 결정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삶이 모든 것을 평가하고 결정합니다. 그래서 예술이 진리보다 가치가 있다고 말할때 그러한 평가의 주체 역시 당연히 삶입니다. 그렇다면 삶의 가치 평가에 있어서 왜 예술이 진리보다 더 가치가 있는가? 그것은 니체에게 삶 자체란 바로 인간이라는 특정한 종이 자신의 유지와 상승을 위해 꾸며낸 일련의 오류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러한 점을 가장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바로 예술적 창조의 시발점이자 그런 활동이야 말로 삶을 위한 것이자 삶 자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비해 니체가 보기에 그러한 사실을 제대로 승인하지 못하고 자기 주장의 절대성만을 고집해왔던 것이 플라톤적인 전통 철학의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전통적인 철학이 보여주는 모습이 로댕이 보여주는 얼굴과 전통철학이 주는 자가성과 자폐성이라면, 미륵반가사유상은 그런 것에 집착하지 않는 환희를 머금고 있는 듯합니다. 미륵을 다시 생각해보겠습니다. 로댕의 어딘가 모르게 고뇌하고 불의에 대한 분노의 정신인 정의감에 어딘지 모르게 화가 나 있는 모습은 정의란 이름으로 나온 불의에 대한 증오가 복수심으로 새로운 불평등을 낳고 새로운 독기를 낳는 것은 아닌지. 불만의 심리는 늘 속으로 불만을 띠고 있어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서로 존재하도록 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아닌지.
존재론적 자유는 인간이 세상에서 택일의 가치관을 버릴 것을 요구합니다. 세상만사는 모두 양면성이 있기에 선을 택해도 선만 오는 것이 아니라 불청객으로 악도 따라 오기에 우리는 선악도 잊고 무심의 초탈한 경지에서 세상을 바라봐야만 비로소 인간은 스스로 자기 자신의 포로로 갇혀 사는 것을 초탈할 수 있는 것을 미륵이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철학사에서도 미륵의 미소와 유사한 베르그송의 웃음은 사회에 적응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 벌을 주는 징벌적 성격을 가집니다. 그 웃음거리는 생명있는 생생한 자에게 덮여 씌워진 징벌이자 형벌입니다. 세상은 각자가 바라보는 세상의 마음의 조각이 나타난 표상이기에 로댕은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것을 대상으로 잘못 실책하며 진지하게 고뇌하는 자를 형상하고, 미륵은 고요히 자신의 내면에 침잠한 채 마음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미래의 철학은 세상을 정신적으로 지배하고자 하는 소유 의식과 그 의지를 포기한 자의 화평을 주요주제로 내세워야 하지 않을까요? 하이데거가 자신의 사상을 \'철학\' 이라고 하지 않고 \'사유\'라고 말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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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1페이지
  • 등록일2018.03.07
  • 저작시기20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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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1047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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