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발전행정론] 스페인 분석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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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발전행정론] 스페인 분석보고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 서론

Ⅱ. 스페인의 국가 개요
1. 일반적 현황
2. 역사적 기반

Ⅲ. 스페인의 정치적 특성
1. 정치 형태
2. 내각과 의회와의 관계
3. 지방자치제도
4. 대외적 정책

Ⅳ. 스페인의 집중 사례 분석-스페인 내전
1. 내전 이전의 정치
2. 프랑코와 민족 전선
3. 내전 이후의 정치

Ⅴ. 요약 및 결론

※참고 문헌 및 사이트

본문내용

강대국을 설득하여 불간섭 조약에 서명하도록 했다.
대체로 서유럽 국가는 이를 따랐지만, 독일과 이탈리아는 그렇지 않았다.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군사와 장비를 보내 주고 있었다. 한편 ‘파시스트화\'에 위협을 느낀 소련은 불간섭 조약의 서명에 참석했으면서도 공화파쪽에 무기와 장비를 보내주는 유일한 국가가 되었다.
1936년 11월 7일, 몰라 장군의 마드리드의 침공 때에 파시즘의 물결을 막고자하는 국제 여단의 첫 지원이 시작되었다. 약 두달 후에는 미국의 의용병까지 합세하기에 이른다. 마드리드 폭격은 연일 계속되고 있었지만 이때를 시작으로 전쟁은 막다른 길에 이르게 된다.
후에 빌바오의 승리고 바티칸이 스페인에서의 파시스트 운동을 공식적으로 지지하고 나서게 된다. 에이브러햄 링컨 연대(미국 의용군)는 브루네테, 테루엘, 그리고 다른 많은 도시에서 영토를 얻었다. 사실상 대외적 지원이 전쟁의 종결을 짓는 가장 큰 요인이 되었다.
3. 내전 이후의 정치
(1) 독재체제의 형성
내전이 끝난 후 스페인의 유일한 정당은 팔랑헤당이었고 노동조합은 해체되고 민주주의는 파괴되었다. 2차대전이 끝난 후 유럽의 외톨이였던 프랑코 정권은 55년에야 UN에 가입할 수 있었다. 그는 전후 프랑코주의 하에 정치, 경제, 문화 각 분야에서 그의 계보를 만들었으며 헌법도 없이 ‘국가원수계승법\'에 의해 왕이 없는 왕국에서 종신원수로서 취임하여 독재체재를 구축하였고 프랑코의 전위대역할은 준경찰조직인 민병대가 담당하였다. 그들은 내전시의 반대파들의 운동을 철저히 탄압하였다. 또한 그는 학교에서 바스크어, 카탈란어를 못쓰게 하는 등 오로지 스페인의 공식언어인 카스티야어만 인정했으며 모든 지역주의 문화도 탄압하였다. 프랑코는 자신의 권력기반이 되는 친위세력의 충성 하에 민주주의 요구 등 반대파를 억제하고 모든 문화를 발전시켰다. 스페인의 정치는 오로지 그 자신만의 것이었다.
1953년에 체결한 미국-에스파냐 군사협정에 의해서 국내에 미군기지를 건설하였고 낙후된 군장비를 현대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반핵을 부르짖는 여론에 의해 미국의 원자력선을 철수하였고 핵무기의 반입을 금지하였다. 또한 필요이상으로 많은 장교들의 수를 줄이려 애썼으며 군의 효율성을 높이려는 노력을 계속하였고 군의 현대화도 꾸준히 추진되었다.단, 프랑코는 1960년대 마지막 식민지인 서사하라에서 물러나면서 모로코가 강점하는 것을 방치하였다. 모로코와 싸우고 있는 서사하라 반군을 지원 중 1977년 6월 총선거 뒤 국방부가 창설되어 그때까지 융합되어 있던 군사부문과 행정부문이 분리되었으며, 병역의무자는 예편후에도 36세까지 소집대상이었다. 다만 양심적인 병역거부가 용인되고 있으며 원칙은 징병제를 택하고 있다.
1982년 5월에는 NATO에 가입하였으며 1986년 국민투표에서 1.비핵정책의 직속 2.에스파냐주둔 미군의 단계적 감축 등의 조건부로 NATO에 잔류한다는 방침이 통과되었다.
(2) 독제체제의 붕괴
1975년 프랑코의 죽음으로 독재적인 정치체제는 붕괴되고, 부르봉가의 후안 카를로스 1세가 즉위한다. 1976년 12월 국민투표로 정치개혁법이 입법되어 77년 4월에는 공산당의 합법화, 프랑코가 이끌었던 국민운동(프랑코 지지 정파연합)의 해산, 검열제도의 폐지 등이 실현되었고, 6월에는 2차대전후 최초의 총선거가 실시되었으며, 78년 12월 스페인 신헌법이 국민투표로 승인되어 입헌군주제의 민주주의 국가가 된다. 82년에는 신헌법에 의한 선거가 치러져 사회노동당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국회는 상원과 하원으로 구성되는 양원제이고, 하원의원은 1주를 1선거구로 하여 인구에 따른 비례대표제에 의하여 350명이 선출된다. 상원의원은 지역을 대표하며 원칙상 본토의 각주에서 4명씩, 도서부 및 세우타멜리야에서 20명, 합계 208명이 선출된다. 입법권은 국회에 있으며, 내각책임제이다. 삼권분립이 이루어져 있고, 지방행정단위는 본토 47주, 발레아레스 1주, 카나리아 2주 등 총 50주로 이루어져 있다. 78년 지방선거법 시행 후 중앙정부의 지방정부에 대한 간섭이 거의 없어졌다. 신헌법에서는 지방색강한 스페인 고유의 지역에 대한 자치주의를 보장하고 있으며, 자치주는 역사적인 배경에 따라 16개의 지방을 기초로 구성되어 마드리드 포함 17군데이다. 최근 스페인 외교의 주안점은 서유럽으로의 편입이며, 이는 1977년 ECC가입, 1985년 EC 정식가입으로 결실을 맺게 된다.
Ⅲ. 요약 및 결론
스페인의 내전은 에스파냐 역사상 19세기의 카를리스타전쟁에 이은 최대규모의 내전이었다. 또한 사회당이나 아나키스트의 노동운동에서는 러시아혁명의 임무를 다하는 것, 즉 자본주의사회의 타도가 목표였다. 이 두 혁명의 과제가 동시에 제시되었다는 것은 당시 스페인 사회 구조의 복잡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더욱이 파시즘 제국의 대두라는 유럽 정세의 변화가 스페인 국내의 대립을 자극하고, 또 스페인 내부의 움직임이 국제대립을 격화시켰던 것이다. 당시 유럽의 국제대립은 정치 이데올로기상의 대립과도 연관되어, 내전 당시의 스페인은 이데올로기의 싸움터이기도 하였다.
민주전선의 승리로 스페인은 파시즘에서 해방되는 듯 했으나 독재체제라는 또 다른 압박을 받게 된다. 프랑코의 독제체제 경제성장 발전의 모형을 살펴보면, 독제체제 이후 독재자의 사망으로 인한 민주주의 시대의 도래라는 맥락에서 한국의 성장 모형과 비슷한 모형을 갖추고 있다. 또한 스페인 사상 최악의 경제 불안 역시 한국의 IMF 때와 마찬가지로 비슷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과거 IMF를 이겨낸 한국과 마찬가지로 스페인 또한 현재의 경제 불안을 어떤 방법으로 이겨낼지 스페인 정부의 현명한 대처를 기대하며 후의 귀추가 주목된다.
※ 참고 문헌 및 사이트
<참고 문헌>
「스페인포르투갈사 」 (강석영 저)
「인물로 읽는 세계사 : 프랑코 편」
<참고 사이트>
「www.espania.wo.to」
「http://www.globalwindow.org」
「http://ko.wikipedia.org/」
「http://www.chosun.com/」
「http://esp.mofat.go.kr/kor/eu/esp/main/index.j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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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8.03.18
  • 저작시기20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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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1049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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