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예종 초기의 정치세력과 정치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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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숙종~예종 초기의 정치세력과 정치운영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숙종대 정치세력들의 구성과 왕위 계승의 전개 과정
1. 이자의 세력과 계림공 세력의 구성
2. 이자의의 난
3. 숙종~예종대의 정치운영
4. 당시 정치세력의 성격에 대한 재규정
Ⅲ 숙종대 정치개혁
1. 남경(南京) 설치
2. 숙종의 전폐정책(錢幣政策)
Ⅳ 고려중기 대외관계와 여진정벌
1. 대외관계의 변화
2. 숙종대 2차 여진전쟁
3. 예종대 3차 여진전쟁
4. 여진정벌의 의의와 결과
Ⅴ 맺음말
Ⅵ 참고문현

본문내용

) 고려시대에 흑수여진(黑水女眞)이 거주하던 지역을 일컫는 말
일대의 여진족 귀속 문제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는 갈라전에 거주하는 여러 부족들이 완안부로 귀부하려는 것을 막으려 했다고 한다. 갈라전에는 고려의 기미주현이 설치되어 고려의 통치권에 들어온 여진 부족들이 많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임간(林幹)이 지휘하는 고려군은 정주관문 밖에서 완안부 여진과 싸웠으나 대패하였다. 뒤이어 윤관(尹瓘)을 동북면행영병마도통으로 파견하였으나 역시 패배하였다. 이에 따라 고려는 완안부 여진에게 강화를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황제국체제하의 여진지배 체제가 무너지는 것과 여진세력의 위협이 강대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따라 숙종은 여진정벌 준비와 별무반(別武班) 창설을 실시하였다.
3. 예종대 3차 여진전쟁
제2차 전쟁 후 고려는 별무반을 설치하여 기병(騎兵)을 양성하는 등 본격적으로 전쟁을 준비하였다. 이 과정에서 숙종이 사망하고 예종이 즉위하였지만 여진정벌에 대한 준비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1107년 12월 14일 17만 명의 대군을 동원하여 전쟁을 개시하였다. 윤관을 원수로 오연총을 부원수로 삼아 시작된 여진정벌은 성주, 영주, 웅주, 복주, 길주, 공험전의 6성을 쌓고, 대략 135개의 여진 촌락을 함락하고 5,000명가량을 살상하였으며 같은 수의 여진족을 포로로 획득하는 승리를 이루었다. 전쟁을 시작한지 3개월이 되지 않은 기간에 17만 명의 대군으로 길주, 공험전까지 점령할 수 있었으며, 300리에 달하는 점령지에 이주시킨 고려민이 정착할 수 있도록 성곽과 사찰 추조 등 제반 조치를 병행하였다.『高麗史』卷96, 尹瓘傳.
하지만 완안부를 중심으로 한 여진족의 완강한 저항으로 영주, 웅주, 길주 등 새로 축성한 모든 지역에서 다시금 전투가 벌어졌으며, 이와 함께 고려와 여진 모두에게 큰 부담을 안게 하였다. 이 시기 즉 예종 초기에는 전국적으로 유민이 발생하여 국가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었으며, 한랭한 기후와 자연재해가 연이어 발생해 지속적인 군사 활동을 벌일 수가 없었다. 더불어 17만 명이란 대군은 고려시대에 동원할 수 있던 최대의 병사수로 그들을 유지하는 것도 힘든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 완안부 여진 측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협상을 제안하였고, 조공관계와 평화관계의 유지라는 안을 제시하였다. 고려는 9성 지역에서의 철수와 고려내 여진인들을 환수한다는 조건하에 협상에 동의하였다. 고려의 여진에 대한 3차 정벌은 문벌귀족 세력이 정치적으로 성장하고 국왕권의 권위가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서,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서 작용하였다. 하지만 결국 정벌에 실패함으로써 예종대 초반 정치세력이 몰락하였고, 전쟁으로 인한 국력소비 등으로 인하여 초기의 개혁의도는 실패했고, 이는 예종대 중반 이후 정치세력과 개혁을 재편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강은정, 2001,「12세기 초 고려의 여진정벌과 대외관계의 변화」, p21
4. 여진정벌의 의의와 결과
3차에 걸친 여진과의 전쟁은 대외관계의 변화 뿐 아닌 숙종 즉위 이후의 내부적 변화에 그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숙종은 즉위 이후로 문벌귀족의 발호를 막고 미약해진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여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는 것을 일차적인 목표로 삼았다. 이를 위해 숙종의 측근세력을 중심으로 남경건설, 전폐유통, 별무반의 설치 등의 개혁이 시행되었는데 이들 대부분은 여진에 대한 2차 정벌이 단행되었던 예종대 초반까지 계속되었다. 고려의 여진정벌은 문종대 이후로 송·요·여진과의 관계를 재설정하면서 동북아시아에서 외교적 우위를 획득하기 위해 영토실리를 추구하려 했던 고려의 의지를 적극적으로 반영한 것이었다. 또한 숙종의 집권과정에 있었던 불안요소의 제거를 위해 대외적인 진출이 필요하기도 했다. 숙종측근세력의 정치적 성향은 고려 독자영역내의 명실상부한 황제국체제 수립이었으며, 이를 위해 국왕주도의 권력구조를 형성하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여진정벌이 실패로 끝남에 따라 숙종·예종대 개혁과 측근세력들은 정국의 주도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Ⅴ 맺음말
11세기 말 이후 고려의 사회변동은 대외관계의 변화, 내부의 모순이 원인이 되어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숙종이 이자의로 대표되는 외척세력을 제거하고 왕위를 계승한 것은 단순한 정변이 아닌 보수 세력과 개혁세력과의 대립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결과 숙종을 중심으로 한 측근세력들이 펼친 일련의 개혁안들은 왕권과 국가차원의 공리주의적 개혁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여진과의 화친과 9성 반환의 이유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여진과의 전쟁은 대외관계의 변화와 왕권의 강화와 안정을 꾀하는 측면에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우선 송과 요가 약화된 시기에 적극적인 전쟁을 수행한 것은 영토 확장에 대한 적극적인 의지를 볼 수 있는 것이다. 거란의 침입이후 선제공격을 통한 전쟁을 벌인 적이 없는 고려의 모습을 통해보면 여진에 대한 선제공격은 대외정세의 변화에 따른 적극적인 대응이기도 했다. 비록 여진과의 전쟁에서의 패배는 숙종~예종초기의 정치세력과 이를 기반으로 한 정치개혁의 동력이 소진된 결과를 초래하였지만 이 시기의 정치운영은 기존 고려내부의 모순과 대외관계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Ⅵ 참고문헌
- 채웅석, 1999「고려사회의 변화와 고려중기론」『역사와 현실』32
- 서성호, 1993「숙종대 정국의 추이와 정치세력」『역사와 현실』9
- 남인국, 1983「고려 숙종의 즉위과정과 왕권강화」『역사교육논집』5
- 최혜숙, 1999「고려시대 남경 설치배경에 대한 재검토」『사학연구』58·59합집
- 추명엽, 2001「11세기후반-12세기초 여진정벌문제와 정국동향」『한국사론』45
- 채웅석, 2001「12세기 초 고려의 개혁 추진과 정치적 갈등」『한국사연구』112
- 김순자, 2012「고려중기 국제질서의 변화와 고려-여진 전쟁」『한국중세사연구』32
- 강은정, 2001「12세기 초 고려의 여진정벌과 대외관계의 변화」『국민대학교 대학원』
- 박용운, 2008『고려시대사』, 일지사
- 이상각, 2010 『고려사 : 열정과 자존의 오백년 』, 들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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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8.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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