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저널리즘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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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전쟁 저널리즘의 역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1. 들어가며
2. 종군기자의 어원

Ⅱ. 본론
1. 세계 최초의 종군기자
2. 현대 전쟁 저널리즘의 시발점
3. 역사 속의 종군기자들
4. 한국의 종군기자들

Ⅲ. 결론 – 마무리 하며

본문내용

선판‘, ’서북판으로 발행하여 국방부를 출입하던 박성환을 우리나라 종군기자 1호로 배출하였다.
서울 탈환 당시 해병대 제6중대 제1소대는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하기 위해 대대의 통제를 벗어나 계속 조선일보사와 동아일보사 앞까지 전진하였는데, 이때 부대를 취재하던 종군기자 박성환이 당시 부대의 소위에게 중앙청을 탈환을 제안하기도 했다. 대통령이 중앙청에는 우리 국군이 태극기를 올려주기를 바라고 있고 상금도 3,000만원이나 걸려있다고 말한 것이다. 박정모 소위의 상관인 김종기 소령이 중앙청 공격 명령을 내렸고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했던 박 소위는 3명의 소대원과 함께 열이틀 만인 9월 27일 숨어있는 적의 저격 위험에도 굴하지 않고 중앙청 옥상에 걸려있던 적의 인공기를 걷어내고 태극기를 게양하는데 성공하였다. 마침내 중앙청에는 적의 방화로 화염에 휩싸인 채 90일 만에 다시 태극기가 휘날리게 되었다.
● 이혜복, 한국 전쟁 당시 평양에 가장 먼저 도착, 기사를 보내다
이혜복은 대한민국 종군기자 1기로, 보성전문 상과를 졸업한 그는 여순 반란사건 취재를 시작으로 국군 1사단이 평양을 탈환하는 순간을 한국 언론사 최초로 보도했으며, 전쟁 발발부터 휴전까지 전장을 누비며 전쟁 상황을 생생하게 보도하는 종군기자로서 활동했다. 이후 동아일보 사회부종으로 60년대 동아일보의 명망을 높이는데 큰 역할을 했다.
1943년에 이혜복은 보성전문 2년 때 학도병으로 징병돼 중국 허베이성에 주둔한 고로모 부대에 배치되어 팔로군과 공방전을 벌였다. 1945년 8월 9일, 하얼빈으로 이동한 고로모 부대를 찾아 복귀하던 중 광복을 맞은 그는 고로모 부대 잔류부대를 찾아 가던 도중 소련군의 포로가 되고 말았으나 야반도주하여 38선을 넘어 창신동 집으로 돌아왔다. 이후 1946년 5월 민주일보가 창간하며 기자를 모집하는 공고문을 보고 100명이 응시한 5명을 뽑는 시험에서 합격한다. 이후 이혜복은 사회부 기자로서 ‘조선정판사 사건’을 취재하기도 했다.
625전쟁 직전 경향신문 사회부로 옮긴 그는 1949년 9월 하순에서 10월 초순에 걸친 10여 일간 훈련을 거쳐 ‘종군기자 1기생’이 되어 625남침 이전 1949년부터 38선 전역에 걸쳐 산발적으로 일어난 북한군의 도발사건 등에 종군했다.
이후 고향인 양평에서 석 달 동안 공산치하에 묶여있었던 그는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19연대 수색대가 양평마을에 들어서고 난 며칠 후 군 차량에 편승하여 서울로 돌아와 경향신문에 복귀하였으며, 1사단 정훈부장 안중식 소령의 제안으로 평양으로 향하게 된다. 마침내 평양 탈환이라는 역사적 순간을 맞은 그는 국군의 평양 탈환을 특종 보도했고, 그가 쓴 기사는 그날자 석간 1면 톱에서부터 2면, 3면 전체를 장식했다. 이후 동아일보 편집부국장 등을 지냈다. 대한언론인회 7~11대 회장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 당시 주요 전황기사는 작전권을 가진 미군에 종군한 세계 각국 통신사 기자들이 타전한 기사를 우리나라 신문들이 번역해 전재하던 때이다. 그런데 그런 시기에 우리 국국이 성공한 평양 탈환 작전을 우리나라 종군기자가 우리나라 신문에 특종한 사실은 우리나라 종군기자 사상 새로운 기원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 또 다른 카파이즘의 실현, 이요섭
이요섭은 세계 여러 전장을 누빈 한국인 종군 기자로서 유명하다. 그는 미국 ABC 방송국 방콕지사의 기자 베트남 전쟁에 카메라기자로 종군한 그는 전장에서 세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 1970년 캄보디아 전투를 취재 중 북베트남 정규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14일 만에 탈출하기도 하고, 이듬해 다시 베트남전에 종군하던 중 왼쪽 손등 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기도 했다. 이요섭은 이후 1977년 태국군의 공산게릴라소탕작전을 뒤쫓다가 지뢰를 밟아 왼쪽 무릎 아래가 절단된 순간에도 자신의 다리를 주워들고 사진을 찍어 전쟁을 잔인함을 담아 또 다른 ‘카파이즘’을 실현했다.
Ⅲ. 결론 - 마무리하며..
‘종군기자’ 또는 ‘전쟁기자’, ‘전선기자’ 들의 역사를 조사해보았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 한 가지는 역시나 ‘카파이즘’이다. 현대적 개념의 언론과 전쟁보도란 국가라는 이름으로 정부가 저지르는 가장 극단적인 정치행위인 전쟁을 시민의 이름으로 감시할 임무를 가진 자가 마땅히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된다. ‘보도노예’라는 뜻에 걸맞은 ‘종군기자’의 이름을 충실히 해왔던 초기의 모습과는 달리, 이러한 언론의 자유를 지켜 온 자들은 ‘카파이즘’을 내세워 자신의 직업적 명예를 추구했던 사람들이다. 군대가 벌이는 전쟁으로부터 언론이 독립적인 영역을 확보하고 효과적인 감시기능을 다 하며, 전선에 오른 순간부터 기자 스스로가 속해 있는 나라나 종교, 민족, 정파 같은 건 물론이고 필요하다면 정작 자신을 파견한 언론사에조차 대항하여 시민 편에 서야한다고 믿는 자들 말이다.
사람들은 미래에는 전쟁이 없어질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람 대신 로봇이 주인공 되는 미래 전쟁터라고 할지라도, 전쟁의 맨 앞자리에서는 사람이 로봇으로 대체될 뿐 그것은 사람으로 이루어진 한 단체나 국가간의 싸움인 것이다. 전쟁이 대부분 사라졌다고 말하는 지금도 보이지 않은 곳에서는 종교나 이념 등으로 인한 크고 작은 내전들이 발생하고 있다. 인간이라는 종이 존재하는 한 어떤 형태로든 전쟁은 계속 발발할 것이며, ‘종군기자’든 ‘국제 분쟁 전문 기자’든 전쟁과 관련된 보도를 하는 기자는 계속 존재할 것으로 보인다. 기자 또한 로봇으로 대체될 것이라는 설도 있지만, ‘인간’의 일을 ‘인간’의 눈으로 보고, ‘인간’의 관점에서 풀어쓰는 일은 진실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종군기자는 종종 전장의 비극을 알려 전쟁을 없애려는 직업이라고 오해받곤 한다. 그러나 그러한 큰 뜻보다는 대부분의 종군기자는 참상을 알리는 것에 포커스를 둔다. 이것이 바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투철한 기자정신으로 포착해 낸 전쟁의 실상과 그 이면의 휴머니즘, '카파이즘'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이라는 종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한, 전쟁을 끊이지 않을 것이지만, 또한 인간이기 때문에 ‘카파이즘’의 정신은 계속해서 전승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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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8.07.10
  • 저작시기20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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