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운동과 한국교회] 31운동과 한국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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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민중운동과 한국교회] 31운동과 한국교회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들어가며

2) 3.1운동의 배경
2-1. 사회적 배경
2-2. 교회적 배경

3) 3.1운동의 발달과 전개
3-1. 준비단계와 발달(기독교를 중심으로)
3-2. 전개과정

4) 3.1운동이 한국교회에 미친 영향
4-1. 긍정적인 영향
4-2. 부정적인 영향

5) 마치며

*부록

본문내용

많은 전도로 마을 주민들의 대다수가 그 교회의 성도가 되어갑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편지 한통이 도착합니다. 편지의 내용은 당신이 속해 있는 교회의 성도들에게 3.1운동에 참여를 유도해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시위에 참여한다면, 여러분의 목숨뿐만 아닌 교회의 성도들의 목숨이자 한마을 주민들의 목숨까지 잃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여러분은 어떠한 결정을 내리실 건가요? 성도들의 목숨을 잃는 것을 감수하면서, 성도들의 참여를 유도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성도들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성도들의 참여를 유도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만약 그것도 아니라면 여러분들은 여러분만의 제 3의 길을 제시하실 수 있으십니까?」
※부록
제암리 학살 사건
1919년 3월 1일에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난 얼마 뒤, 3월 31일 발안 장날에 수원에서 서남쪽으로 약 20km 지점에 위치한 조용한 농촌 제암리에서 또한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제암리 만세운동은 제암리를 비롯한 인근의 주민 천여 명이 발안 장날을 이용해 발안주재소 일결들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전개되었다. 이때 당황한 일경들은 무력으로 진압하며 민중들에게 가혹한 매질을 가했다고 한다. 때문에 당시 시위 중이던 민중들은 창자가 옆구리로 나오기까지 했으며, 시위에 참여한 많은 청년들은 들 것에 실려 오게 되었다. 그리고 이날 이후 주민들이 밤마다 뒷산에 올라 봉화를 올림으로써 만세운동은 계속됐다.
이에 당시 발안주재소장 사사까와 친일파인 제암리 주민 조희창은 예배당으로 와서 지난 4월 5일 발안 장터에서 너무 심한 매질을 사과한다는 명목으로 15세 이상의 남자 신자들을 모두 예배당으로 소집시켰다. 이때 당시 주민들의 명단이 적혀있는 종이를 꺼내 읽으면서 멀리 떨어진 일터에 나가 참석하지 못한 이들도 일경을 통해 불러오기도 하였다.
잠시 후 사사까는 강단에 서 있다가 일경과 눈짓을 주고받은 뒤 밖으로 나갔다. 사사까가 밖으로 나가자마자 헌병들은 예배당 문마다 나무들 대고 못질을 하여 교회를 폐쇄시키고 석유를 뿌리며 예배당에 불을 질렀다. 그리고 헌병대원 30명은 예배당을 포위하여 총을 쏘기 시작했다. 이 시각에 밭에서 일하던 여인 둘이 총소리와 치솟는 불길을 보고 예배당으로 찾아와 울고 있자, 일경들은 한 여인을 목이 잘라 죽이며, 다른 한 여인은 총으로 난사하여 죽이고, 시신들을 볏짚에 불을 붙여 태웠다. 그리고 그렇게 예배당은 완전히 불태워졌다.
그 후 일경들은 예배당 옆집부터 한집 두 집 차례대로 불을 질러 나갔고 결국 조용한 초가 마을에 외딴집 한집만 남겨놓고 모조리 불태웠다. 이때 제암리에서 타는 냄새가 오산에서도 났다고 전해진다.
<참고문헌>
1. 이만열,『한국기독교와 민족의식』(지식산업사, 1991)
2. 민경배,『한국기독교사』(연세대학교 출판부, 2007)
3.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한국 기독교의 역사Ⅱ』(기독교문사, 1990)
4. 김흥수 외1,『한국기독교사 탐구 』(대한기독교서회, 2011)
5. 강신범,『제암교회 3.1운동사』(도서출판공동체,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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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7페이지
  • 등록일2018.11.19
  • 저작시기2018.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1070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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