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 - 이단종파와 한국교회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해당 자료는 3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3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한국교회사 - 이단종파와 한국교회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이단종파와 한국교회
-----------------------------
2. 토착화 운동과 한국 교회
1) 토착화 신학의 배경
2) 토착화 신학의 전개
3) 유동식의 토착화 신학
4) 윤성범의 토착화 신학
5) 토착화 신학의 의의
-----------------------------
3. 민주화 운동과 한국 교회
들어가며
1. 1960년대 민주화 운동
2. 1970년대 민주화 운동
3. 1980년대 민주화 운동
나가며
------------------------------
4. 통일 운동과 한국 교회

본문내용

간 정치적 대화통로와 한반도 평화정착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합니다. 체결 이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통일 및 사회정의 기독교협의회를 창립했습니다. 그리고 김재준을 비롯한 진보적 기독교인들이 참여했던 민주수호국민협회는 “7.4 공동성명”을 맞아 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 이 성명서는 조국의 통일을 위해서는 민족의 실체인 민중의 참여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밝힘으로써 이 시기 통일 논의를 한걸음 진보시켰습니다. 하지만 군사정권에 인권 유린과 민주주의 탄압으로 통일운동보다는 사회운동에 집중되었습니다. 1980년 5월, 광주 민주항쟁 이후부터 통일에 대한 논의와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습니다. 노태우 대통령이 당시 대다수의 국민들에게 지지를 받지 못했던 이유는 광주 민주항쟁의 이유도 있지만 그가 미국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었고 여전히 미국은 한국의 운명에 막대한 영향력을 발위하고 있었습니다. 국가적 화해와 통일에 대한 굳은 의지와 함께 미국으로부터 해방에 대한 열망은 강해집니다. 계속되는 군부독재와 반공산주의를 내세우는 보안법으로의 억압은 분단국가가 가져온 결과라는 생각이 팽배했습니다. 그래서 1980년대 초, 한국에서 정부에 대항하는 정치적 운동은 국가화해와 통일 운동이 됩니다. 통일운동의 물결이 거세지면서 한국교회 또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1981년 한국 기독교회협의회는 제 4차 한국 . 독일 교회협의회에서 분단국가로서 한국과 독일의 위상과 통일 전망을 논의하면서 한국교회는 통일의 주체인 민중이 배제되지 않는 통일 논의를 전담 연구할 것을 제안하여, 1982년 한국기독교회협의회 내에 “통일 문제연구원 운영위원회”를 조직하여 통일 문제를 체계적으로 연구해 가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기독교회협의회의 통일논의는 상당한 정도 반공기독교를 수정하려고 노력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반공의 잔재를 대체로 그대로 지니고 있었고, 통일의 전망 혹은 방향을 명시하지 못한 채 머물렀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서 우리가 많이 들어보았던 묵익환 목사님의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1989년 3월 25일 토요일 문익환 목사는 평양을 방문한다. 그의 방북 이유는 대내적 상황과 대외적 상황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대내적으로 1988년 7월7일 노태우 정권은 대북 유화책으로 7.7선언을 하였다. 그러나, 19989년 초반 세계는 동구 및 미 . 소의 하해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다. 또 한 남한은 북방정책의 일한으로‘대북포위·개방화압력’의 성격을 가지고 북한과 대화하였으며 북한은 남한당국과 정당 및 민간단체와 교류하려는 시도가 있었기에 문익환 목사는 민족의 통일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열망과 기대를 가지고 방북을 결행한 것입니다. 1989년, 그는 실정법을 어기고 방북해 김일성과의 면담을 진행하였고, 그 결과 4.2 공동성명을 발표했습니다. 문익환의 방북 후에 정부는 국가보안법 제 6조 ‘탈출 잠입 죄’를 통해 사법적으로 대응하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방북 이후 전대협의 임수경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문규현의 방북을 필두로 시민 사회의 통일 열기를 고조시키며 무수한 통일 운동가들을 길러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당시 사회적 분위기는 ‘통일은 정부가 주도적으로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문익환 목사의 방북을 계기로 정부 주도의 통일 논의를 확장시켜 민간 차원에서의 통일 논의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문익환의 방북 이후 정부는 민주통일운동의 선봉에 선 재야인사들을 대거 구속하는 등 더욱 탄압하는 일이 발생하는 좋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 또한 존재합니다.
저희는 지금까지 한국교회의 통일운동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남과 북의 긴장이 지속되는 가운데 한국 교회는 평화와 통일의 문제를 공식 의제로 채택하여 토론하는 자리를 가졌습니다. 문익환 목사는 그리스도교를 믿는 신앙인으로서 분단에 안주해 온 과거를 참회하면서, 동족 간의 불화와 갈등으로 남북이 적대적인 불행한 분단사에 종지부를 찍르려는 정치적 결단과 선교적 사명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마치며
통일은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않았고 여전히 땅에는 선을 그어 남긴 상처는 치료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통일된 기미가 보이지 않다고 결코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저는 지금 저희가 이렇게 통일을 말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많은 진보를 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에는 통일에 대한 이야기를 대놓고 할 수 없었지만 지금 저희가 이렇게 통일에 대해서 꺼내놓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것도 많은 발전이 아닐까요? 그러니 포기하지 맙시다.
  • 가격1,600
  • 페이지수9페이지
  • 등록일2019.01.05
  • 저작시기2019.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1076425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