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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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제1장 복음의 전래

제2장 한국 교회의 기초 작업

제3장 한국 교회의 발전

제4장 한국 교회의 조직과 부흥

제5장 민족의 비문과 교회의 성장

제6장 종파 운동과 이단 운동

제7장 사회의 위기와 신사참배

제8장 한국 교회의 재건과 분열

제9장 한국 교회의 확장과 정립

제10장 뻗어 가는 한국 교회

본문내용

에 미국 세인트루이스에서 복음 동지 협회(N.A.E.)를 조직하였는데, 이것은 어느 종족이나 국가에 국한되지 아니하고 성경에 기초한 신앙을 고백하는 모든 성도들이 참예 하도록 하였다. 이 운동이 국제적으로 확창되어 1951년에는 화란 우드쇼튼에서 24개국 대표들이 모여 국제적 조직을 이루게 되었다.. 한국 NAE는 1948년 6O여 명의 신학생들로 출발하였고, 1952년 7월에 정식으로 한국 NAE를 조직하여 복음주의 연합운동을 펴게 되었다. NAE는 신앙에서의 이탈에 대하여 자기들의 입장을 알리기에 주저하지 않으나 WCC에 대하여 공격적인 투쟁을 하지 않고 온건한 정책을 사용하고 있다. 한국 교회에서의 NAE 운동은 초창기부터 합동측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추진되어 왔기에 합동측을 NAE측이라고 부르는 이들도 간혹 있다. 장로교 총회가 한국 교회의 화평을 위하여 소속 목사들은 NAE에서 탈퇴하라고 결의한 후 이 단체의 영향력은 미미하여졌다. ④RES와 한국 교회이다. RES (Reformed Ecumenical Synod-개혁주의 에큐메니칼 대회)는 1946년 미국 그랜드래피드에서 발기하여 구성된 단체로서 범세계적인 칼빈주의 자들의 모임이며, 개혁주의 신앙 노선에 찬동하는 교파들이 참가토록 되어 있다. RES는 예장 합동측과 고신측과 관계를 맺었고, 이것이 교단 내의 정치적 문제와 신학 사상에 대한 이해 문제 등 많은 논란을 빚었다. 1968년 9월 부산에서 모인 제53회 총회(예장 합동측)에서는 RES 보고를 받고, 1970년에 한국에서 RES 태평양 지역회의를 개최키로 결의하며 연구위원 5인을 선정하였다. 이때에 신복음주의 논쟁이 일어났고, 1CCC계 선교사였던 라보도(Robert S. Rapp)가 RES를 비평하는 책자를 제작하여 전국교회에 뿌리는 등 맹렬한 반대 운동을 일으켰다. 그 결과 1969년 서울에서 모인 제54회 총회에서는 1970년에 모일 RES 태평양 지역 대회를 중지하기로 결의하고, 그후 RES 탈퇴 결의를 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과정 속에서 RES는 한국 교회에 그 뿌리를 내려보지 못하고 극단적 보수주의자들의 비판으로 말미암아 중단되었으며, 그 결과 한국의 개혁주의 교단들의 세계적 유대가 단절되게 되었다.
Ⅱ. 한국 교회의 세계 선교
한국 교회는 설립 초창기부터 선교하는 교회로서 임무를 다하였다. 1907년 장로교 독노회 조직 시에 7명의 첫 목사중 이 기풍 목사를 제주도에 파송 하였고. 1912년 총회 조직 기념으로 중국 산동성에 선교사를 파송 하였다. 감리교 역시 만주지방 선교에 노력하였다. 선교하는 교회의 사명을 다한 한국 교회는 해방 후 교회 재건 뒤에도 계속 선교 활동을 전개하였고. 특히 1970년대에 와서 선교 열의는 더욱 확장되었다. 해방 후의 경우를 보면 장로교 총회는 1955년 제40회 총회 결의로 태국에 김 순일, 최 찬영 목사와 그 가족을 선교사로 파송하여 6.25 폐허를 딛고 일어선 한국 교회의 해외선교 열의를 보여 주었다. 예장 고신 측에서도 대만에 김 영진 목사를 선교사로 파송 하여 고산족(高山族) 전도에 열의를 가하게 하였다. 1970년대에는 각 교단과 교회들이 선교 열의에 가득하여 일본, 인도네시아, 대만, 필리핀, 홍콩, 태국, 파키스탄, 중동, 사라와크, 구암도, 멕시코, 남미 각국, 서독, 이집트 등 세계 각지에 한국 선교사를 파송하여 복음을 역수출하는 입장이 되었다. 한국 교회의 조직이 선교하는 교회로서 출발하였고, 지금도 그러한 모습으로 전진하고 있다. 현재(2001년 2월) 세계 여러 나라에서 활동 중인 선교사는 9.133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예장 합동측 총회가 1.027명, 통합측 총회가 629명. 개혁측 총회가 453명, 기성 총회가 338명, 기감이 321명, 기침이 296명, UBF가 1.517명을 파송하고 있으며 이외에도 군소 교단 및 각 개 교회에서 많은 선교사들이 파송 되어 활동하고 있다. 이들을 지역별로 분류해 보면 중남미에 584명, 북미에 1.130명, 아시아에 3.049명, 아프리카에 597명, 유럽에 1.125명, 중동에 125명, 태평양 연안에 271명, 비공개 1.042명, 중국에 315명, 현지인 240명으로 되어 있다(한국세계선교협의회 집계).
Ⅲ. 대형 전도회와 교회 성장운동
1965년부터 시작된 전국 복음화 운동에 이어 전군 신자화 운동을 비롯하여 각 계층을 위한 전도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와 같은 전도 운동은 1970년대에 와서 초대형 집회로 확산되고 교회 성장 운동으로 심화되었다.
1. 대형 전도 집회
1973 서울 여의도 516광장에서 모인 빌리 그레함 전도 대회는 100만의 성도들이 한자리에 집결한 민족 최초의 최대 집회였다. 미국의 세계적 부흥사 빌리 그레함 목사를 강사로 한 이 집회는 한국 교회의 저력을 세계에 보인 초대형 집회로서 한국 교회에 큰 자극을 주었다. 1974넌 8월에는 한국 대학생 선교회(C.C.C.)가 주축이 되어 실시한 엑스풀로 74는 전도 집회와 훈련이라는 측면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참으로 한국에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한 집회였던 것이다. 1978년 8월에는 한국의 부흥사들을 중심으로 하여 민족 복음화 성회를 개최하였다. 이외에도 각종 집회들이 계속하여 모여졌고, 전도에의 열의가 계속 일어나게 된 것이다.
2. 교회 성장 운동
선교 l00주년을 앞두고 각 교단에서는 교회 성장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70년대 후반기에 일어난 이와 같은 경향은 한국 교회의 시대적 사명을 다하는 것으로서 의의를 가지며, 나아가서 교회 성장을 통한 자기 정화의 길을 걷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1985년 선교 백주년 기념으로 각 교회가 전개한 진홍운동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예장(합동)- 만 교회 운동
②통합측- 매년 3백 교회 증가운동을 전개하여 1985년까지 3천 교회 목표. ③기독교 감리교회- 5천 교회 운동. ④기독교 장로회- 2천 교회 증가 운동. ⑤기독교 성결교회- 2천 교회 지향. ⑥침례교 연맹-1천 교회 운동. ⑦나사렛교회- 5백 교회를 목표하여 성장 운동을 펼쳤다. 이렇게 교단마다 교회 성장 운동이 불일 듯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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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10.19
  • 저작시기20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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