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가톨릭교회에 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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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로마가톨릭교회에 관한 고찰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로마카톨릭 교회

●용어

●로마가톨릭의 4대 교리

●성경

●특징

●교회의 직분구성

●신도의 분포

●역사

●한국의 로마가톨릭 교회

본문내용

. 이 지침서는 돈을 많이 걷는 것을 목적으로 했기 때문에 웅변적 과장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대사와 관련해 교리상의 잘못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루터의 주장처럼 대사를 통해 신자들의 미래의 죄까지 사해진다고 한 일은 없지만 고해성사표를 판매했고 이 표를 가지면 일생 중 언제라도 고해성사를 보면 교황이 보류한 죄까지 사해진다고 한 일은 있었다고 한다. 또 설교가들은 고해성사표를 사는 순간 교회의 영적 은혜를 얻기 때문에 통회가 필요없다는 식으로 설교를 했고 죽은 사람을 위해 대사를 얻을 때에도 고해성사를 보거나 통회할 필요 없이 돈만 주면 되도록 되어있었다.
작금의 대사 설교가 성실한 신앙생활을 위한 노력보다는 돈으로 자기 영혼을 구하려고 고심하고 순례와 같은 외적 행사에 더 신경을 쓰고 있는 현실을 개탄한 루터는 대주교에게 새 훈령을 통해 대사설교의 폐단을 없앨 것을 요구하고 신학자들이 대사 교리를 명확히 밝힐 것을 촉구하면서 작금의 대사 시행을 반박하는 신학 명제로서 대사 명제와 대사 논문을 첨부했다. 루터는 후에 자신이 95개 조문을 발표하게 된 동기는 바로 이 편지에 대해 주교들이 아무런 회답을 주지 않은데 있었다고 말했다. 이 95개 명제는 루터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출판업자들의 손에 들어가 1518년 95개 항목으로 정리돼 「95개조 명제」로 인쇄됐다.
논쟁이 이어지면서 루터는 자신의 신학 체계를 전 분야에 걸쳐 발전시키게 되고 쇄신의 주장은 분열의 빌미가 되어가고 있었다. 1518년 1월 대사 설교가로 활동하던 도미니코회 수사 텟첼이 106개조 반박문으로 95개조 명제를 논박하자 루터는 대사 명제에 대한 해설서와 대사와 은총에 관한 글로 대응했고 저명한 신학자인 엑크(Johann Eck, 1486~1543)와도 논쟁을 벌였다.
알브레히트 대주교는 교황청에 루터가 이단적 새 교리를 전파시키고 있다고 보고했고 교황 레오 10세는 독일에서 발생한 대사 사건을 교리 논쟁으로 간주해 직접 개입을 피하려고 했다. 루터는 교황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대사 명제의 출판에 대해 해명하고 교황에 대한 충성을 표시했다. 하지만 이러한 충성 선언과는 달리 루터가 동봉한 「대사 효력에 관한 해설서」는 교황의 권위보다는 공의회의 결정이 우선적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으며 따라서 교황에게 복종을 표시하면서도 자신의 주장은 결코 취소할 수 없음을 고집했다.
레오 10세 교황은 8월 23일 아우구스부르크 제국 의회에 교황특사로 파견한 가예타노 추기경을 교황 특사로 파견해 10월 12일부터 14일까지 루터에 대한 청문회를 열었지만 끝내 루터는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로마에 출두하라는 교황의 지시를 피하기 위해 아우구스부르크를 탈출한 루터는 자신의 문제가 교황청이 아닌 독일 법정에서 취급되도록 요청함으로써 사건을 정치 쟁점화하려 시도했고 교황권을 문제 삼으면서 세계 공의회 소집을 청원했다. 루터는 이후 세속 군주의 보호 아래에서 자신의 확신을 실현하게 됐다
6. 로마가톨릭 개혁
15세기 말에서 16세기에 걸쳐 루터 등에 의한 종교개혁 운동으로 서방 교회는 로마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로 분열됐고 이 분열을 치유하려는 운동이 16세기 들어서 본격적으로 전개됐으며 이러한 쇄신 운동을 19세기 초 역사가들은 로마 가톨릭 교회 종교개혁이라고 불렀다. 로마 가톨릭 교회 개혁은 루터의 종교 개혁 이후에 생겨난 반 로마 가톨릭 교회적인 운동의확산을 저지하고 교회의 가르침을 명확히 하려고 했다. 로마 가톨릭 교회 개혁은 특히 교회의 내외적인 개혁을 정치적으로 후원했으며 정치적 결속을 공고히 하고 잃어버린 교회의 영향력과 영토 회복을 도모하기도 했다.
당시 교황으로부터 쇄신의 주역으로 각별한 관심을 받던 예수회가 16세기 로마 가톨릭 교회 개혁 운동의 중추가 됐다. 예수회는 특히 영성 생활 지도와 선교 활동, 자선 사업, 청소년 교육과 신학 연구 등을 통해 로마 가톨릭 교회 개혁과 신앙 복구의 원동력이었다. 이러한 운동은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폴란드, 헝가리 등 여러 유럽 국가에서 거의 동시에 나타났다.
독일의 로마 가톨릭 교회 제후들은 새롭게 변모하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모습에 고무돼 쇄신을 실행했고 자기들의 영지 안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만을 인정했다. 이에 따라 가톨릭 제후들이 통치하는 지역에서 개신교가 확산되면서 정치적 종교적 갈등이 야기됐고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종교 회의를 통해 제국의 로마 가톨릭 교회 제후들은 자기 영토 안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 신앙만을 인정하도록 허용됐다. 1617년 페르디난드 2세가 보헤미아의 왕이 됐을 때 개신교를 억제하려 함으로써 같은 기독교인끼리 전쟁을 벌인 30년 전쟁(1618~1648)이 일어났다.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전쟁이 끝났을 때 정치적으로는 신성 로마 황제의 권위가 실추됐고 종교적으로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개신교 모두 동등한 권리를 갖는 데 합의함으로써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가톨릭 개혁과 종교 분쟁이 종결됐다
●한국의 로마가톨릭 교회
한국 로마 가톨릭교회는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한 다른 나라와는 달리 지식인이 자발적으로 받아들였다는 특징이 있다. 청나라에서 활동하던 예수회의 선교사와 사신으로 청나라에 간 조선의 지식인 간의 교제로 로마 가톨릭, 즉 천주교가 조선에 들어온 것이다. 주로 정계에서 소외되어 있던 시파가 천주교를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정적인 벽파에서는 천주교 탄압을 빌미로 시파를 탄압했다. 즉, “조상을 몰라보는 사람”(무부지자[無父之者])이라는 게 박해의 명분이었지만, 실제로는 정치성을 띤 사건이었다. 실제로 황사영의 백서사건으로 유명한 황사영은 ‘백서’에서 ‘천주교가 반대 당파를 제거하는 데 이용되고 있다.’라고 하였다. 하지만 조선 천주교회는 순교자들이 수없이 나오는 가혹한 탄압을 받으면서도, 최초의 한국인 천주교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청나라에서 사제 서품을 받는 등 활발히 성장한다. 현재 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회는 16개 교구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교구는 서울, 대구, 광주의 3개의 관구 안에 소속되어 있으며, 한국 내 각 교구장의 협의회인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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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1페이지
  • 등록일2009.12.22
  • 저작시기2009.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69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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