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공산주의운동사 2 (해방후 편 4~6장 1945-1953) - 남북한의 공산주의 한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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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공산주의운동사 2 (해방후 편 4~6장 1945-1953) - 남북한의 공산주의 한국전쟁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에 직면, 그러나 11월 25일, 중공군의 2개 야전군을 앞세운 공산측의 반격이 시작, 12월 5일경 미 8군은 평양을 포기하고 공산측이 북한의 대부분 지역을 장악.
당시 인민군은 15개 사단의 약 15만 병력으로 재편성, 중공군은 약 28개 야전사단이 참전.
3.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 3차 전원회의
1950년 12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 3차 전원회의가 ‘현 정세와 조국이 당면한 긴급과업을 토의하기 위해’ 소집. 회의의 목적은 패전의 책임을 문책하여 내부 위기를 미연에 방지하려는 것이었음 중공군이 전쟁에 참여하면서 국내 정치는 한층 복잡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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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강도 강계시에서 12월 21일~23일에 걸쳐 진행, 상당수의 군사간부 및 당 간부들을 무능력과 과오, 범죄행위 등으로 문책 또는 숙청. 중국인민지원군이 참전함으로서 새로운 경쟁자로 부각된 연안파 출신의 무정(당시 2군단장)이 주된 희생자가 되었고, 민족보위상 김일도 패배주의 의식을 유포했다는 혐의로 철직, 이외에도 최강이나 김한준 등 사단장들도 비겁행위 때문에 철직처분. 김일성은 군 및 당 요직의 일대개편을 시도, 남일을 총참모장에, 김책을 인민군 전선사령관에 임명.
1950년 세모에 공산측은 50만 대군과 100만 예비부대를 인솔한 대공세를 단행, 1951년 1월 4일, 유엔군은 서울에서 철수, 4월 22일에는 70만 병력 가운데 절반을 투입하여 재차 대공세를 감행했으나 실패하여 5월 20일부터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짐. 그로부터 1개월 후인 1951년 6월 23일, 소련외무성 부상 말리크는 공산측의 휴전회담 의사를 표시.
4. 제 4차 전원회의와 그 여파
1951년 11월 2일에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 4차 전원회의가 소집, 김일성은 당 문호를 기본성분과 철저한 이념무장을 갖춘 자들에게만 국한시킨 관문주의를 규탄, 농민들의 입당을 주장.
이러한 정책변화는 관문정책이 시행되는 동안 당비서를 역임한 허가이에 대한 공격의 근거를 제공, 허가이는 당에서 철직처분을 받고 부수상으로 밀려남.
당시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군사위원회가 조직되었고 정치, 군사부문까지 실권을 장악.
5. 전시의 주요 문제
1951년~53년의 시기는 북한정권이 맞이한 가장 어려운 고비였음, 1953년 7월 휴전직전까지 대규모 공습이 계속되면서 가옥 약 60만호, 공장 8,700개소, 학교 약 5,000개소, 병원 또는 진료소 약 1,000개소가 폭격으로 파괴 구체적인 내용은 표에서 확인할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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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더해 1951년 홍수로 곡물생산이 현저히 저하, 1952년에는 불과 전년도에 비해 7.7% 증가했다고 발표,
1952년 초봄 평양당국은 반관료주의, 반탐오, 반낭비운동을 선언, 이 운동은 1951년 8월 말에 만주에서 전개된 중공의 3반운동의 재판에 가깝다는 사실에 주목.
1953년 휴전 당시 북한 주민들의 사기는 극도로 저하, 이는 북한 당국에 심각한 압력으로 작용하여, 유엔군 측과 타협하도록 하는데 작용.
1952년 4월 10일, 김일성의 생일 40돌 직전에 발간된 노동신문에는 김일성의 생애를 극단적으로 이상화시켰으며, 3일후에는 박창옥, 박헌영, 박정애가 김일성에 관한 논문을 발표.
김일성에 대한 개인숭배는 단지 말로만 끝나지 않았으며, 4월 12일, 당 상임위원회는 김일성의 출생지와 주요 전적지에 김일성 기념관을 건립하도록 지시, 김일성고급중학교도 설립.
1953년 3월 초, 스탈린의 사망이 발표, 김일성은 즉각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 인민애도기간을 설정, 반기를 게양, 추도식을 진행,
이후 휴전회담의 진행되면서 기본문제 가운데 하나인 포로교환문제가 부각, 공산측은 전면적인 포로교환을 요구한 반면, 유엔측은 자유귀한의 입장을 고수. 1953년 6월 18일, 이승만은 일방적으로 포로를 석방하기도 함.
6. 정전과 박헌영 일파의 숙청
1953년 7월 25일, 정전회담이 완전합의에 도달했다고 발표, 28일에는 김일성과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펑 떠화이가 북한 전역에 정전을 선언, 이로서 한국전쟁은 막을 내림.
정전 이후 수많은 표창장과 훈장이 당 고급간부들에게 뿌려짐, 김두봉, 박정애, 박창옥은 모구 국기훈장 제 1급을 수여받음.
최용건도 부수상에 임명되었지만 박헌영만은 불길하게도 아무런 언급이 없었음. 박헌영은 2월 7일, 당 고급간부 전원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된 조선인민군 창건 제 5주년 기념대회에 마지막으로 모습을 보인 후 감금상태에 있었던 것이 확실함. 박헌영의 제거일자는 추측하건데 제 5차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이 내린 당내 종파주의를 근절하라는 지시가 있었던 시점임.
제 5차 전원회의는 1952년 12월 15일에서 18일까지 열림,
1955년 12월 중순 박헌영은 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선고를 받았으며, 박헌영 일파의 숙청은 3년여를 끌었음. 허가이는 1953년 4월초 심문차 법정에 소환되자 자살함.
7. 정전 무렵의 북한
한국전쟁이 끝나갈 무렵, 갑산-소련파와 연안파는 구남로계의 대부분의 숙청과 소련의 지원을 받은 김일성의 지배권 증대로 당내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게 됨.
당시 김일성은 3면공세를 전개, 당 조직을 확장하고 권위를 높이려 함. 첫 번째는 당은 대중노선을 추구, 둘째는 사상사업과 선전활동의 쇄신에 관한 것이며, 셋째는 행정조직을 개편하여 지방 정권기관들을 강화하고 중간기관을 축소, 재편함으로서 국가기관의 위신을 높이는 것이었음.
한국전쟁은 비록 공산측이 적에게 커다란 희생을 치르게 했고, 막대한 중공군의 투입으로 비공산 통일한국의 수립을 저지할 수는 있었지만 결국 북한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일대 참패였음.
개인적인 문제제기
한국공산주의운동사 해방후 편을 읽고 요약하면서 몇 가지 의문점과 유사점을 가지게 되었다. 우선 첫 번째는 한국공산주의 운동사에 이렇다 할 업적이 없었던 김일성이 공산주의자들이 이룩한 국가에서 최고수위가 될 수가 있었는지, 소련은 왜 김일성을 북한의 지도자로 지목하게 되었는가, 이며
다음으로는 박헌영의 숙청과정을 보면서 시대와 인물들은 변했지만 장성택의 숙청과정과 너무 흡사한 부분이 많은 것으로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북한의 역사는 되풀이 되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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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9.02.09
  • 저작시기20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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