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 공화국의 정당정치와 정당구도(제3공화국 제 4공화국 정당정치 정당구도)
본 자료는 4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해당 자료는 4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4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제34 공화국의 정당정치와 정당구도(제3공화국 제 4공화국 정당정치 정당구도)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I. 서론

II. 박정희 정권의 등장
1. 5.16 군사 정변의 배경
2. 민정이양 작업

III. 제3 공화국 시기 정당 정치
1. 제 3공화국의 출범
2. 경제개발과 대외정책(경제개발계획, 한일협정, 월남파병)
3. 제6대 대통령 선거/ 제7대 국회의원 선거
4. 3선개헌과 제7대 대통령 선거/ 제8대 국회의원 선거

IV. 제4 공화국 시기 정당 정치
1. 유신체제의 등장과 배경
2. 유신체제의 전개와 저항세력의 성장
3. 유신체제의 붕괴과정과 그 배경

V. 결론

본문내용

으로 유신정권의 정치경제적 성격에서 찾아진다. 따라서 YH사건은 유신체제의 자본편중적이고 노동억압적인 성격으로부터 기인한 것이었다. 또한 유신체제의 반민주적 성격과 위기에 취약한 정치구조적 성격을 드러냄과 동시에, 본격적인 반유신세력의 집결을 매개하는 계기로 기능하였다. 즉, YH사건은 유신체제에 대한 국민적 저항을 이끌어 내고 확산시키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2) 부마항쟁
부마항쟁이란, 유신정권이 김영삼 신민당 총재를 제명시킨 직후 부산과 마산에서 발생한 격렬한 항의시위이다. 10월 16~17일, 이틀 동안 부산대와 동아대 학생 및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격렬한 항의시위를 벌였고, 이 같은 시위는 곧 마산으로까지 번져 나갔다. 박정희 정권은 경찰력으로는 도저히 사태를 진압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부산에서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공수단 병력을 투입하여 시위 군중을 해산하였다.
부마항생의 정치사적 의미는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부마항쟁은 박정희 정권을 국제사회에서 더욱 고립시켰다. 부마항쟁은 미국의 보호를 받으며 강권을 제멋대로 휘두르는 박정희 정권의 본성을 폭로함으로써, 일본과 미국 등에서는 한국 민중의 투쟁을 지지하는 목소리를 보내왔다.
둘째, 부마항쟁은 민주화와 통일을 갈망하는 민중의 정치적 투쟁이었다. 이는 유신체제에 대한 시민들의 불신과 분노가 절정에 달하였음을 의미한다.
셋째, 부마항쟁은 유신체제를 뿌리째 뒤흔들어 박정희의 암살로 이어졌다. 부마항쟁으로 인해 체제 내부에 심각한 분열현상을 보였다. 이는 권력투쟁으로 진전되었으며, 마침내 박정희 피살과 체제의 와해로 이어졌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는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탄에 숨을 거두었다. 유신의 창안자였으며 관리자였던 박정희의 죽음은 유신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김재규의 총탄이 유신붕괴의 근본적인 요인이라고 볼 수 없다. 날이 갈수록 더해 가는 유신체제의 경직성과 반민주성, 그리고 반민중적 요소들은 이미 유신의 종말을 예고하고 있었다.
유신체제의 몰락은 몇 가지 요인들을 통해 설명되어 질 수 있다.
첫째, 체제 성격이 권위주의이었기 때문이다. 권위주의 정권들은 국민의 자발적 지지보다는 강력한 지도자의 통치력에 의해 유지된다. 그러기에 저항세력은 존재한다. 특히 한국은 유신쿠테타가 일어나기 이전에 일정한 수준의 민주주의 체제를 갖고 있었다. 4월 혁명과 그 이후 학생운동의 경험이 있었고 야당도 활동하고 있었다. 언론의 자율성도 일정하게 있었다. 이러한 국내적 상황이 유신체제를 용납할 수 없었다.
둘째, 경제적 위기이다. 유신체제는 권위주의적인 지배였지만 체제의 안정을 위한 정당성을 경제성장에서 찾고자 했다. 그러나 1970년대에 일어난 경제적 위기는 유신체제를 흔들기 시작했다. 중화학공업에 대한 과잉투자, 부동산 투기 조장 정책, 무리한 수출주도 산업화 등이 경제적 위기의 원인이 되었다.
셋째, 한·미 간의 정책적 갈등이다. 이 당시 한미관계는 긴장상태가 고조화된 상태였다. 거기에 더불어 1979년 6월 29일, 2박 3일 간의 미국의 카터 대통령의 방한은 갈등을 더욱 더 심화시켰다. 이 때 이뤄진 한미정상회담에서 인권을 중요시 여겼던 카터 대통령은 한국 내 정치범의 석방을 요구했고, 이어서 김수환 추기경과 김영삼 총재 등 야권지도자들을 면담하여 한국정부의 반감을 샀다.
V. 결론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기 직전의 정치문화는 파이너교수가 말한 정치문화의 네 가지 순위 중 가장 낮은 ‘최저위’형 정치문화였다. 즉, 민간인 지배에 대한 정통성이 전적으로 중요성을 갖지 못하는 시대라고 생각한다. 그 결과 박정희 군부의 지배가 성립되었던 것이다. 또한 박정희는 그 당시 우리나라는 개도국이었기 때문에 개도국의 군대를 ‘근대화의 추진력’으로 규정했다. 신흥국의 군대가 전통적인 관습보다 더 서구화된 이념과 관습으로 변모되어 가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박정희 정권은 도로와 통신시설 등 여러 가지 시설을 구축함으로써 근대화에 공헌했다. 이렇게 박정희는 18년의 집권 기간 동안 한국의 경제 개발과 경제적 자립을 위한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를 통해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대한민국을 산업대국으로 바꾸어놓았다. 경제적 측면으로 볼 때, 이러한 점들로 인해 박정희는 우리나라를 일으켜 세운 대통령으로 비춰진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의 사고방식은 국민들의 민주적 사고방식을 해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민주주의 측면에서 34공화국 시대를 살펴본다면 국민들은 쉽게 자신의 의견을 표출할 수 없을 만큼 정치적 자유가 억압되어 있었다. 즉, 진정한 실질적 민주주의의 실현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유신시대에 접어들면서 국민들은 함부로 자신의 정치적 견해나 정치인에 대한 평가를 쉽사리 할 수 없었다. 또한 제3,4 공화국 시기 우리나라의 경제 정책은 국가가 주도하는 권위주의 체제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권위주의 체제는 국민을 위한다기보다 주요 엘리트 계층을 위한 것이었다. 이들은 나라의 발전을 위한다는 명분하에 자신들의 잇속을 챙기기 바빴다. 또한 독일로 파견을 간 간호사광부, 월남파병 등 국가의 경제적 발전을 위해 국민들의 노력과 희생이 뒤따랐다.
박근혜는 아버지 박정희가 정치에 참여한 것에 대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고, 그렇게 했어야만 하는 시대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무리 악한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국민의 생명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내일을 위해 국민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겼던 박정희 정권의 역사는 사실로 기록되어야 한다.
< 참고문헌 >
이윤섭, 『박정희 정권의 역사』, 서울:필맥, 2011
지병문, 『현대 한국의 정치』, 고양시:피앤씨미디어, 2014
서중석, 『내일을 여는 역사』, 서울:민족문제연구소, 2016
임지봉, ‘유신헌법과 한국 민주주의’, 학술논문, 2012, p.183-201
정윤재, ‘제 3,4공화국의 성격과 리더쉽-박정희대통령의 근대화 리더쉽에 대한 연구’, 경남대학교 학술논문, 1995, p.275-278
네이버, 21세기 정치학 대사전
네이버, 두산백과, 박정희 정권
  • 가격1,500
  • 페이지수12페이지
  • 등록일2019.03.03
  • 저작시기2019.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1085074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